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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투더 1969③]그해 여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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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투더 1969③]그해 여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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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달 정복은 미국뿐 아니라 지역과 인종, 이념을 떠나 전 세계를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대사건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류 최초로 달에 상륙한지 40년이 지난 지금 본지는 그 때의 감동과 재미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시기 동아일보 기사를 살펴봤다. 당시 평범한 대중들이 보였던 관심과 환호는 언론이 얼마나 이를 비중 있게 다뤘는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1969년 6월 18일부터 8월 18일까지 동아일보에 보도된 아폴로 11호 관련 기사를 근거로 ‘백투더(Back to the) 1969’ 시리즈를 마련했다. 제1편 21일 2시 56분 20초 “인간 달에 섰다” 제2편 아폴로 11호가 남긴 잊혀진 이야기들 제3편 그해 여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약간 흔들리는 TV 화면에 인간이 달에 내려서는 모습이 비쳤을 때 모든 사람이 그랬듯이 미국 국민들도 말문이 막혔었다. 이름난 텔레비전 논설가들도 간간히 ‘참 대단하군요’ ‘저런’ 하는 탄성만 토할 뿐이었다. 사람이 달에 내려섰고 걸어다니고 있다는 경이적인 사실과 그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우주공간을 건너 전해주는 텔레비전의 마술 앞에 모든 형용사는 빛을 잃고 말았다.” “신문마다 초대형 활자, 짧은 표현, 지면의 3분의 2를 넘는 달 사진을 안배하여 1면을 짰다. 사상 최대의 활자를 썼다는 뉴욕타임스紙의 제목은 ‘사람 달에서 산책’이었고, 워싱턴포스트紙의 제목은 ‘독수리 내리다…사람 달 산책’이었다.” 아폴로 11호 발사…달 착륙…미국 시민은 축제 분위기 연출 사람이 달 위를 성큼성큼. 1969년 동아일보는 이 경이로운 광경을 담아낸 미국의 TV 방송과 신문의 모습을 7월 22일자 기사를 통해 상세히 설명했다. 미국의 보통 시민들은 ‘말문이 막혀 모든 형용사가 빛을 잃은’ TV 방송을 숨죽이며 지켜봤고, 초대형 활자와 달 사진이 지면 가득히 채워진 신문 1면을 흥분과 함께 손에 쥐었을 것이다. 비록 아폴로 계획에 쏟아부은 천문학적 비용에 일부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당시 동아일보가 전하는 미국 내 보통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신명나는 축제 분위기에 가까웠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된 16일자, 지구 귀환에 성공한 25일자 신문은 그 흥겨운 분위기를 아래와 같이 전했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는 이 곳 케이프케네디 상가는 사상 최고의 경기로 아우성이며 술집마다 술이 없어 주문을 못 따르고 호텔 방은 무지무지한 고가로도 얻기 힘들다. (중략) 개인주택이나 아파트 등이 방 하나에 1박 요금 20~50달러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고급 음식점의 예약이 끝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설 음식점도 주문에 맞추기 위해 트럭들에 냉동장치를 해서 음식을 저장하고 있다. 상점마다 아폴로 11호의 작은 동메달과 우주사진엽서 등이 날개 돋힌 듯이 팔려 인류 신기원의 문전은 즐겁고 요란하기만 하다.” “이곳 휴스턴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은 바로 술집의 바텐더들과 밴드 연주자들이었다. (중략) NASA 본부의 직원들은 세 우주인이 착수(着水)에 성공하자 모두 의자에서 일어나 감격스러운 순간을 기뻐했고, 휴스턴 우주센터는 그동안 밤새워 일했던 직원들에게 착수 바로 그 순간 아폴로 착륙선이 그려진 넥타이 핀을 나눠 주었다.” 런던 도쿄 바르샤바…각국 반응 “굉장하다” 7월 16일과 21일은 세계 주요 도시의 시민들도 아폴로 11호를 관심 있게 주시하며 찬사를 보낸 날이었다. 동아일보는 영국 런던에 대해 “대부분 시민은 TV로 감격하며 발사광경을 주시했다” “런던 심장부의 트라팔가 광장에서는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의 달 착륙이 전해지자 하늘을 진동시킬 듯한 환희의 함성으로 넘쳐났다”와 같은 반응을 전했다. 프랑스 파리에 대해서는 “모든 거리에 인적이 끊기고 모든 사람은 가정에서 TV로 역사적인 아폴로 11호의 발사를 보았다” “관광객들은 소형 TV와 라디오를 들고 공원 벤치에서 아폴로 11호의 발사를 지켜봤다”고 보도했다. 일본 도쿄에 대해선 “밤을 새며 달 착륙을 고대하던 일본인들은 달 착륙이 성공하자 ‘굉장하다’ ‘정말인지 믿을 수 없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일본 전국의 TV 라디오 방송들은 이 역사적 순간을 보도하기 위해 모두 철야 방송을 했다”고 전했다. 동유럽 공산국가 폴란드의 바르샤바 시민들은 어땠을까. “미국 대사관에 마련된 TV를 보기 위해 약 500명의 바르샤바 시민이 운집해 ‘굉장하군’ ‘놀라운데’ ‘야 성공이다’ 등 환호를 울렸다. 한 방송논평가는 ‘아폴로 11호 발사는 신기원을 수립하는 대사건으로 전세계가 최대의 관심과 감격과 조바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라이벌이자 적대국인 소련 모스크바 시민들도 신속하게 인류 최초 달 탐사에 관한 보도를 접했다. 동아일보 7월 16일자는 “소련 관영 타스 통신은 전례없이 아폴로 11호 발사 직후 세 우주인의 이름을 밝히고 ‘그들의 사명은 암스트롱과 앨드린을 달에 착륙시킨 뒤 다시 전원 지구로 귀환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고 전했다. 또 22일자에는 “타스 통신은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지 8분 만에 이를 재빨리 보도했으며, 이보다 1분 뒤 모스크바 방송도 최종 뉴스 시간에 7번째 뉴스로 논평 없이 짤막하게 보도했다”고 전했다. 아시아 중동 중남미 곳곳에서 전쟁…중국인, 인류 달 정복 까맣게 몰랐을수도 아폴로 11호가 발사되고 인간이 달을 밟은 날. 이처럼 세계 곳곳의 시민들은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달 착륙 광경을 지켜봤다. 하지만 지구촌 한편에서는 그같은 잠시의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도 있었다. 1969년 여름은 세계 역사의 격동기 한가운데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특히 전쟁이 많았다. 아시아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중국·소련의 국경분쟁이 있었고,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연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중남미 지역에서는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특히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던 중국 국민은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홀로 동떨어진 것처럼 아폴로 11호의 존재 자체를 아예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동아일보 16일자는 ‘중국에서는 완전 묵살’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북경의 반응을 전했다. “북경의 신문들은 16일 아폴로 11호 발사를 완전히 무시했다. 대신 프랭크 보먼 미국 우주인의 소련 방문과 그의 소련 요인과의 면담을 소개하면서 새삼 소련의 수정주의자들을 비난했다. 신화통신은 보먼의 소련 방문을 가리켜 ‘개탄할만한 또 하나의 이변’이라고 논평했다. TV 라디오 신문 등이 (아폴로 11호에 대해) 일제히 침묵을 지키는 통에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아폴로 11호의 역사적인 발사를 까맣게 모르고 지낼 것이다.” 蘇·中共 국경 분쟁…전면전 우려 그렇다면 당시 중국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최대 이슈는 뭐였을까. 아마도 대규모 전면전 양상으로 치달았던 소련과의 국경 분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우리와 적대 관계인 공산권 내부에서 벌어졌던 양대 거두의 분열은 국내에서도 큰 관심거리였다. 이에 동아일보도 북경과 모스크바에서 전해오는 분쟁 소식을 연일 비중있게 전했다. 6월 17일자 1면에는 ‘소련군 150만 집결’ ‘蘇·中共 전면전 가능성’이란 기사가 실렸다. 20일자 2면 ‘중공 대병력 집결…소련 국경에 120만명’이란 제목의 기사는 “중공은 거세지는 소련의 국경 위협에 맞서 국방력의 40% 이상을 흑룡강 성과 신강 성의 변경지대에 배치하고 있다”고 있다고 전했다. 6월 27일자 1면 ‘蘇, 중공에 강력 조처’, 7월 9일자 1면 ‘蘇·中共 대규모 충돌’ 등의 기사는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소련 공산당은 26일 중공 지도자들의 반(反) 레닌주의적 노선과 그들의 분열주의 책동에 가차 없는 타격을 가하는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중공군과 소련군은 8일 만주 북방 경계선인 흑룡강을 끼고 공군력까지 동원된 10시간에 가까운 일대 충돌을 일으켰다고 북평(북경)방송이 보도했다.” 8월에도 두 나라간 국지전은 계속됐다. 이에 동아일보는 ‘蘇·中共 대전은 일어날까’라는 특집 기획을 마련해 여러 차례 분석 기사를 싣기도 했다. 8월 15일자 2면 ‘蘇·中共 국지전 계속’ ‘蘇, 비상돌입…中共, 일전 각오’라는 기사는 “중공의 각 성(省) 방송들은 15일 밤 ‘중공 영토를 감히 침범하려든다’고 맹렬히 소련을 규탄, 성민(省民)들에게 ‘소련과의 일대 격전을 각오하라’고 촉구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이집트, 인간 달 밟은 21일에도 치열한 전투 벌여 중소 분쟁 못지않게 동아일보가 관심 있게 다뤘던 전쟁은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전쟁이었다. 6월 26일자 1면 ‘수에즈 일대서 격전’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26일 아침 수에즈 운하 남쪽 홍해 상공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벌여 (중략) 수에즈 운하 휴전선 90km 일대에서 야포와 장갑차, 탱크를 동원해 10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7월 3일자 1면 ‘수에즈서 공중전’이란 기사는 “이스라엘 제트기들은 2일 수에즈 운하 상공에서 이집트 전투기들과 1967년 6월 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공중전을 벌여 이집트 미그기 4대를 격추시켰다”며 “이스라엘 특공대는 수에즈만의 한 이집트 해안경비초소를 기습, 이집트 군 13명을 사살함으로써 중동 위기는 악화 일로를 치닫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7월 9일자 2면에서는 점차 치열해지는 중동 지역의 전투 상황을 전했다. 이 기사는 “중동지역에서 지상전과 공중전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7일 밤 이집트 정규군이 중동전 이래 처음으로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영토를 침공했다”며 “8일 이스라엘과 시리아 공군기들이 이스라엘 점령 지대의 골란 고지 상공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전개, 시리아 전투기 7대와 이스라엘 전투기 4대가 각각 격추됨으로써 중동 위기는 무덥고 긴 여름을 맞이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7월 10일자 4면에는 ‘구약 이래의 빙탄’이란 제목으로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국 사이에 기습과 보복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으며 아랍 측이 전쟁 준비를 갖추게 되는 이듬해에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분석 기사가 실렸다. 닐 암스트롱이 달을 밟은 21일에도 양국 간 전투는 계속됐다. 21일자 2면 ‘이스라엘, 아랍공 대폭격’이란 제목의 기사는 “이스라엘 공군기들이 21일 수에즈 운하 너머로 출격하여 2시간 이상에 걸쳐 아랍공화국 군 야포 진지를 비롯한 주요 시설에 대해 전례 없이 대규모의 폭격을 가하고, 아랍 공군 전투기 5대를 격추했다”고 보도했다. 엘살바도르-온두라스, 축구 시합이 전쟁으로 번져 전쟁의 그림자는 중남미 지역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된 7월 16일 이 지역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6일자 2면 ‘엘살바도르·온두라스 전면전 돌입’이란 기사는 “엘살바도르 공군기들과 육군이 14일 온두라스를 침공한데 뒤이어 온두라스도 이날 밤부터 반격을 시작, 2차대전 때 사용하던 코르세어 전투기로 엘살바도르의 각 도시 및 군사 기지를 폭격함으로써 축구 경기로부터 시작된 두 나라간의 충돌은 드디어 전면전으로 확대됐다”며 “엘살바도르 군은 온두라스 남부 고속도로를 따라 도처에서 백병전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가 언급한 것처럼 두 나라의 전쟁은 축구 경기가 발단이었다. 16일자 3면 ‘온두라스·엘살바도르 전면전 내력’이란 기사는 “축구로 전쟁이 일어난 데는 보다 깊고 오랜 양국 사이의 원한이 깔려 있다”며 “높은 인구 밀도를 가진 엘살바도르의 국민들은 직업을 찾아 인접 국가들로 넘어가 살고 있는데 온두라스는 자국 내에 30만 명의 엘살바도르 인이 살고 있고 그 중 많은 수는 불법체류자라고 주장해왔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6월 두 나라를 오가며 펼쳐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양국 관중들 사이에 폭력이 오고 간 게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 때의 격앙된 분위기는 이후 온두라스 일부 시민들의 자국 내 거주 엘살바도르 인에 대한 보복성 폭력으로 이어졌고, 양국 간의 외교관계 단절 선언을 거쳐 전쟁까지 발발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 전쟁, 연일 1면에 실려 해외 곳곳에서 벌어졌던 이같은 전쟁 소식은 당시 우리 국민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그저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가까웠다. 당시 우리에게도 아폴로 11호 못지 않게 우리의 이목이 집중됐던 굵직한 이슈들이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베트남 전쟁과 미국 닉슨 대통령의 외교, 국내에서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시도였다. 1969년 6월 중순부터 아폴로 11호 기사가 넘쳐나기 시작하던 7월 11일까지 동아일보 1면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뤄졌던 국제 이슈는 단연 베트남 전쟁이었다. 한국군 창설 이래 첫 ‘전투병’ 해외파병을 했던 전쟁이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1964년 9월을 시작으로 해병대인 청룡부대, 육군의 맹호부대와 백마부대 등을 잇따라 베트남으로 파병했다. 이후 1973년 3월까지 연 인원 32만 명의 국군이 파병돼 4407명이 전사하고 1만 706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기간 한국 기업들도 베트남에 진출해 군수물자 납품과 각종 용역사업으로 전쟁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1969년 6~8월 동아일보에서는 당시 자본주의 진영이던 남베트남의 정세와 베트남 전쟁의 진행 상황에 대한 보도가 주를 이뤘다. 특히 남베트남의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 기사에 자주 등장했다.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의 티우 정권은 당시 부정부패와 무능의 상징이었다. 티우 대통령은 1975년 4월 30일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에 사이공이 함락됐을 때 미국 군용기에 금괴를 잔뜩 싣고 누구보다 먼저 조국을 등졌던 인물이다. 6월 16일자 2면 ‘공산군 공세 격화’라는 기사는 “공산군은 15일 다낭, 출라이, 벤헤트 등 월남 전역의 10여 개 미군 기지 및 진지에 로케트와 박격포를 퍼붓는 한편, 아샤우 계곡의 미군 기지를 14일에 이어 또 다시 습격, 연합군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6월 20일자에는 ‘사이곤의 초조와 비관’, 21일자는 ‘티우, 혁명적 계획 손질’, 28일자는 ‘철군, 미군의 메시지와 모험’ 등의 기사들이 1면에 비중있게 실렸다. 7월 3일자 1면에는 ‘월맹군, 남침 격감’과 ‘월맹군 철수, 남파 감소…하노이 진의는?’, 7일자 2면에는 ‘공산군 전역서 공세…사이공 등 44개 목표 포격’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전쟁 상황을 알리는 소식들을 쏟아냈다. 6월 20일자에는 남베트남 정권에서 횡행했던 부정부패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기사가 실렸다. ‘월남 부유층 줄지은 해외도피’ ‘출국에 거액의 뇌물 거래’ ‘티우의 자녀도’ ‘매주 200명 꼴’ 등의 제목을 단 이 기사는 “자유 월남의 티우 대통령의 부인이 금년 초 스위스를 방문, 그 곳에 저택을 마련해놓고 돌아오는 즉시 자식들을 모두 (스위스로) 보내버렸다”고 전했다. 두 한국인, 월맹군에 잡혔다 탈출…캄보디아서 귀국 화제 한편 6월 18일에는 북베트남(월맹) 군과 캄보디아 군에 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한 두 한국인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를 모았다. 이날 신문은 ‘캄보디아 두 한국인 석방’ ‘꿈만 같다…감격의 환호성’ 등의 기사로 이 소식을 비중있게 전했다.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전쟁 액션영화다. “캄보디아에서 간첩죄의 누명을 쓰고 억류중이던 박정환 소위(27·용산구 이태원동 군인아파트 10동 113호), 파월 기술자 채규창 씨(39·전북 군산시 구암동 329)가 제3국을 통한 다각적 외교 활동에 의해 석방, 18일 오후 항공편으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1968년 1월 베트콩의 구정 공세 때 메콩델타 지역의 미토에서 월맹군에게 포로가 돼 베트콩 포로수용소를 거쳐 북괴(북한)로 이송돼가던 도중 태권도 5단의 박 소위가 월맹군 3명을 태권도로 때려누이고 캄보디아로 탈출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박정환 소위와 채규창 씨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이 국경 지대의 밀림 속을 헤매다 캄보디아 군에게 잡혔고, 이후 간첩으로 몰려 캄보디아에 억류중이었다가 외교 협상끝에 겨우 풀려나게 됐다. 당시 동아일보 6월 20일자 3면은 채규창 씨의 증언을 토대로 ‘자유에의 길은 멀더라’ ‘사선 17개월 채규창 씨 귀환보고’ ‘허기져 쓰러지면 혹독한 매질’ 등의 기사를 실었다. 25일자 4면에서는 ‘구사일생의 비기(秘技) 태권도’ ‘박정환 소위는 이렇게 살아왔다’ 등의 후속 기사도 실렸다. 이후에는 ‘사선 500일-베트콩에 잡혀갔던 채규창 씨의 생환 수기’라는 특집 기획이 마련돼 귀국까지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여러 번에 나눠 소개했다. 닉슨 대통령, 루마니아 전격 방문 전세계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갈라져 첨예한 대립을 하던 이 시기 미국 닉슨 대통령의 과감한 외교 행보는 세계적인 이슈였다. 특히 북한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베트남 참전 당사자인 국내 독자에게도 닉슨의 행보는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가장 눈길을 끈 사건은 닉슨 대통령의 루마니아 전격 방문이었다. 6월 30일자 1면 ‘닉슨, 루마니아 방문’ ‘닉슨의 아시아·루마니아 행차…협상의 시대 탐색’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은 이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닉슨 미국 대통령은 월남전 후의 아시아 정책을 구상하기 위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 파키스탄 등 5개국을 7월 하순 1주일에 걸쳐 순방한다. 그는 이 순방에 이어 소련 블럭 내에서 자주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동유럽의 공산국가 루마니아를 방문할 예정이다.(중략) 7월 23일 워싱턴을 떠날 닉슨 대통령은 우선 역사적인 달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아폴로 11호의 착수(着水)를 목격하기 위해 태평양으로 비행할 것이며, 그 후 아시아 순방과 루마니아 방문 뒤 8월 3일 이전에 귀국할 것이다. (중략) 루마니아 방문은 2차 세계대전 중 루즈벨트 대통령의 ‘얄타 회담’ 참가와 트루먼 대통령의 ‘포츠담 회담’ 참가 이래 처음 있는 미국 대통령의 공산국가 방문이라 특히 주목을 끌고 있다.” 이 무렵 닉슨 대통령의 루마니아 방문이 갖는 의미를 짚어보는 분석 기사도 여럿 실렸다. 7월 3일자 ‘닉슨 루마니아 방문의 파장…자유노선의 가속’이란 기사는 ‘소련의 위협 견제’ ‘외교적 줄타기로 이익 노려’ 등의 제목을 달고 “동서의 대립과 공산권의 분열을 틈타 자주노선을 추구해 온 동구권의 이단아인 루마니아는 오는 8월초 예정된 미국 닉슨 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이제 국제정치의 초점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4면에는 ‘동구의 라틴 고도(孤島), 루마니아’라는 제목으로 루마니아에 대한 소개와 이 나라를 이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서기장의 성장과정을 실었다. “소련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풍부한 석유 및 전력을 등에 업고 1948년 이후 이룩한 연평균 23.2%라는 놀라운 경제성장은 국민경제구조와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나아가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독자 노선을 추구하게 된 배경으로 지적된다.(중략) 차우셰스쿠는 줄곧 공산권 내에 ‘타국 내정 불간섭 원칙’을 내세우면서 중공과 소련의 분쟁을 이용, 루마니아의 국가 이익을 살려온 민족공산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차우셰스쿠는 훗날 북한의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 김일성 주석궁을 본떠 인민궁전을 짓는 등 북한 못지 않게 악명 높은 독재 왕국을 24년간 유지했다. 그 사이 루마니아는 유럽의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1989년 12월 차우셰스쿠가 길거리에서 총살되는 장면은 전세계에 전파를 탔고 이는 동유럽 공산권 붕괴의 상징이 됐다. 닉슨이 루마니아를 방문한 8월 2일자 1면에는 ‘닉슨 오늘 루마니아 방문’ ‘차우셰스쿠와 두차례 회담’ 등이 톱 기사로 나왔다. 8월 4일자 2면에는 닉슨 대통령을 극진히 환대하는 루마니아 현지의 모습을 실었다. ‘열광, 닉슨의 공산국 착륙’ ‘성조기 물결’ ‘꽃다발 세례’ ‘길가에서 키스’ ‘아가씨와 호라춤도’ 등의 제목을 단 이 기사는 “루마니아 방문 이틀째인 3일 2시간 반 동안 부카레스트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성조기의 물결과 환호성 속에 유례없이 열광적인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닉슨, 중국에 화해 제스처…핑퐁 외교 출발점 만들어 이 무렵 미국은 중국에게도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7월 24일자 ‘아폴로 이후의 미국과 중공’이라 사설은 이와 관련된 당시 국제 정세를 짚었다. “닉슨 대통령은 공존의 시대를 외치고 협상의 시대를 역설하고 있었다. 아폴로 11호의 후광에 따른 힘의 우위와 승리의 외교 행각을 이처럼 맛본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미국 정부는 최근 침묵을 깨뜨리고 대 중공정책의 일대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은 중공과의 사이에 그토록 싸여있는 장벽을 물리치고 대화의 길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일정량의 중공 상품 구매와 특정인의 중공 여행 제한을 철폐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중공의 반응은 극히 냉랭한 것으로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 그래도 미국 정부가 대화의 길에 선수를 쓰고 있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평가될만한 일이다.” 닉슨의 이같은 노력은 훗날 양국 간의 역사적인 ‘핑퐁외교’로 이어진다. 핑퐁외교는 1971년 4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중국 선수단이 미국 선수단을 자국에 공식 초청하면서 시작된다. 이를 수락한 미국 선수단 15명은 며칠 뒤 중국 땅을 밟았고,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미국인이 중국을 방문하는 최초의 사례가 됐다. 이 일을 계기로 20년 이상 적대적이었던 양국 관계가 개선되고, 1972년에는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주석의 정상회담까지 성사된다. 이같은 분위기는 1979년까지 이어져 마침내 미중 수교로 결실을 맺었다. 박 대통령 ‘3선 개헌’ 시도…전국 대학가 반대 시위로 혼란 1969년 여름 국내 정치도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른바 ‘3선 개헌’ 추진이 그 혼란의 중심이었다. 박 대통령은 1963년 제5대 대통령에, 1967년 6대 대통령에 취임했기 때문에 당시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이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장기 독재를 우려한 대학생들은 6월말부터 한달 가까이 전국적인 개헌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 와중에 정부의 무리한 시위 진압은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시기 동아일보에는 독자 투고를 통해 찬반토론을 펼치는 ‘조류(潮流)’라는 정기 코너가 있었다. 여기에 7월 10일자로 투고한 서울대 문리대 유민성 군의 ‘탄압만이 최선인가’라는 글은 당시 대학생들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하다. “나는 왜 데모를 하는가. 나는 신념이 없이 행동하기는 싫다.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확고한 신념 때문에 거리로 뛰쳐나온다. (중략) 거리에서, 골목에서 어지러이 쫓기면서 나는 무력한 소시민인 우리들을 발견하다.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하다. 간첩의 악랄한 침투를 막기 위해서 헬리콥터가 부족하다고 모든 국민은 없는 주머니를 털어 모았다. 그런데 그 귀하고 비싼 줄만 알았던 헬리콥터가 머리 위를 수없이 선회한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안개처럼 몽롱한 조국의 앞날을 본다.(중략) 우리는 학생이기 이전에 국민이며 우리들의 의사는 진지하게 공개적으로 검토되어지거나 최소한 그 발표만이라도 허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들의 것인 정부의 적일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메마른 눈물을 뿌리며 추방되다시피 교문을 나와야만 하는가.“ 7월 4일자 신문에는 경찰이 진압 도중 대학 교수와 신문 기자까지 폭행한 소식을 전했다. ‘교수에도 경찰봉’이라는 기사는 “4일 낮 12시 반경 서울 중랑교에서 데모 학생들을 귀교시키기 위해 학생들을 버스에 태우던 서울대 공대 일부 교수들이 경찰 곤봉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또 ‘본사 기자에 폭행’이란 기사는 “4일 오전 11시 20분경 안암동 로터리 앞길에서 데모 취재를 하던 본사 사진부 심종완 기자가 고려대 통계학과 1학년 이유권 군이 경찰봉에 얻어맞으며 연행되어가던 것을 찍으려하자 경찰관들은 ‘너는 뭐냐?’면서 심 기자를 주먹으로 치고 무릎으로 차는 등 폭행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6월 27일부터 7월 11일까지는 연일 전국 대학의 시위 상황을 비중있게 다뤘다. 6월 27일자 ‘500여 고대생 개헌 반대 데모’라는 제목의 기사는 “27일 낮 12시 25분경 고려대 학생 700여 명은 동교 배구장에서 ‘민주헌정수호’ 성토대회를 연 후 그 중 500명이 두 번이나 교문 밖으로 뛰쳐나와 출동한 경찰과 대치,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 이들을 교문 안으로 밀어넣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계명대 학생 400명 개헌반대 성토’라는 기사는 “이날 학생들은 개헌 절대반대 및 장기집권 지양과 부정부패 일소, 학원사찰을 중지하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한 후 해산했다”고 전했다. 6월 30일자에는 ‘2000여 高·延大生 개헌반대 거리로’ ‘경북대생들 거리 행진’이라는 기사가, 7월 4일자에는 ‘서울 시내 대학가 사실상 휴교’ ‘휴강…시험도 연기’ ‘교문서 등교 막기도’ ‘서울사대 임시 휴교’ ‘연대생 2명 즉결에 넘겨’ ‘길가던 학생 끌고가 뭇매’ ‘경찰 집계, 6일간 데모 참가 3만여 명’ ‘학생 500여 명 연행’ ‘학생 데모 일주일 째 단식 농성도’ ‘외국어대 철야 포위’ 등의 기사들이 실려 당시 혼란스러웠던 국내 정국을 짐작케 했다. 7월 7일자와 9일자 신문에도 ‘학술활동 아니고는 학생집회 일체 불허’ ‘각급 학교 전국 곳곳서 조기 방학…서울서만 7개 대학’ ‘가톨릭 의대생 100여 명 단식’ ‘조건부 단식에서 무기한 농성으로…개헌반대 경희대생’ 등의 기사들이 대학가 상황을 전했다. 정권의 무리한 개헌 추진은 전국 곳곳의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나오게 했다. 7월 11일자에는 ‘안동고, 1000여 명 개헌반대 성토’ ‘대전고, 3일간 휴교’ ‘부산 동래고, 무기한 휴교’ 등의 기사가 실렸다. 아폴로 11호가 지구를 떠나 달을 향해 질주하던 7월 19일 서울대는 시위 참가 학생을 대거 징계하는 조치를 내렸다. 23일자 ‘처벌 각 단대 파급…문리대도 22명선’이라는 기사는 “서울대는 지난 19일 열린 교수회의에서 개헌 반대 데모를 주동한 사회학과 1학년 이철(21) 군을 제적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이철 군은 지난해까지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지낸 전직 국회의원 이철 씨와 동일 인물이다. 이철 씨는 훗날 박 대통령의 유신체제 시기였던 1974년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 행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면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 등과 함께 잡혀가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훗날 형 집행 정지를 받아 석방되고 정치인으로 변신해 1980년대 이후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영화·잡지·소설, 음란성 이유로 탄압받기도 이 시기는 지식인 뿐만 아니라 예술인에게도 숨이 턱턱 막히는 갑갑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던 7월 16일 서울지방검찰청에서는 ‘음란성범죄 특별단속반’이 가동중이었다. 16일자 ‘소설도 조사 착수’ ‘영화 두 편을 입건’이라는 기사는 아래와 같이 소식을 전했다. “16일 오전 서울지검 음란성범죄 특별단속반은 월간지와 영화에 이어 일반소설 부문에 대한 수사에 나서 건국대 박승훈 교수의 ‘서울의 밤’ ‘영점하의 새끼들’ ‘영년구멍과 뱀과의 대화’와 염재만 씨 저작의 ‘반노’ 등 4편을 음란 문서로 단정, 음란 문서 등의 제조와 반포의 혐의로 입건, 소환했다. (중략) 염 씨의 ‘반노’는 변태적 부부의 성생활을 음란하게 묘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서울지검은 16일 극영화에 대한 입건대상을 재조정, ‘벽 속의 여자’ ‘내시’ 등 2편만을 입건하고 ‘너의 이름은 여자’에 대해서는 입건을 보류했다. 단속반은 15일 오후 ‘벽 속의 여자’의 박종호 감독, ‘너의 이름은 여자’의 이형표 감독 및 두 영화의 주연배우 문희, 김지미 양 등을 소환 심문했는데, 문 양과 김 양은 감독의 요청으로 선정적인 연기를 했다고 진술했다. 단속반은 ‘내시’를 제작한 신상옥 감독이 현재 일본을 방문중이므로 귀국하는대로 신 감독을 소환하기로 하고, 우선 이날 ‘내시’의 주연을 맡은 신성일 씨와 윤정희 양을 소환키로 했다.” 18일자는 후속 보도로 ‘남궁원 씨 등 심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입건된 소설가 염재만 씨는 이날 ‘변태적 부부의 성을 그린 것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성적 노예성을 파헤치고 이에 저항하는 인간의 초월된 자아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중략) 검찰은 지난 2주일간의 단속에서 아리랑 등 두 월간지와 극영화 2편, 소설 4편을 입건하고 월간지 편집 관계자 등 15명을 구속 기소했다.” 어린이에게 꿈을 줬던 아폴로 11호 1969년 여름은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격동기였지만,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생업에 쫓겨 세상일에 관심 둘 여유가 없는 보통의 평범한 시민은 그 소용돌이에서 한 발치 비켜나 있는 듯 보인다. 6월 28일자 3면에 실린 ‘시원한 여름 풍물’이라는 화보 기사는 1969년 보통 사람들의 여름 풍경을 생생히 담아내기도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에게는 사람이 달 위를 걸었던 그 해 여름은 평생 잊기 힘든 추억이었다. 당시 흑백 TV로 접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광경은 수많은 어린이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프로젝트의 연구 책임을 맡고 있는 이대성(53)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항공연구본부장, 미 항공우주국(NASA)의 항공연구 부문 최고책임자(차관급)인 신재원(50) 국장보, 우주관측위성 ‘갤렉스’를 이용해 은하 자외선 촬영에 세계 최초로 성공한 이영욱(48)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국내 최초로 무인 달탐사용 소형 착륙선을 개발한 권세진 KAIST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등은 어린 시절 TV로 지켜본 달 착륙이 훗날 과학자의 꿈을 키우는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말한다. 이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의 마크 폴란스키(53) 선장은 13세 때, 국제우주정거장(ISS)의 페기 윗슨(49) 선장은 9살 때 TV 중계를 통해 달 탐사를 목격하고 우주인의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그해 여름 그들은 어디서 달 착륙을 지켜봤을까 7월 11일자 4면에는 웬만해선 믿기 힘든 해외 뉴스가 실렸다. “소련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살고 있다는 올해 164세의 노인 치탈리 미슨리모프. 1805년에 태어난 그는 영국의 넬슨 제독이 프랑스 해군을 무찌른 트라팔가 해전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데 그의 장수 비결은 산책을 즐기고 뜰에서 일하면서 조용한 생활을 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7월 23일과 24일자 신문에는 달 탐사와 관련해 흥미있는 기사들이 여럿 실렸다. ‘두 죄수 탈옥 성공’이란 제목의 기사는 “미시간 주 밀란 연방형무소의 죄수 6명은 아폴로 비행사들의 착륙 광경을 TV로 시청하는 도중 탈출을 기도해 4명은 감옥 안에서 잡히고 2명은 벽을 넘어 도주했다”는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황당한 소식을 보도했다. ‘TV 안보고 극장 가’라는 제목의 기사는 “태국 방콕에서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광경을 집에 가서 TV로 보라고 10개 중고교가 지난 21일 휴교했지만 TV 보러 귀가하는 학생보다 바(bar)나 극장으로 줄달음치는 학생이 더 많았다”며 “뜻한 바를 달성하지 못한 학교 당국은 빗나가는 학생을 바로잡아줄 겸 금주 주말에 보충수업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1969년 여름 세계 곳곳의 평범한 시민들은 각자가 처한 다양한 상황에서 제각각의 모습으로 우주로 잠시 눈을 돌렸을 것이다. 런던과 도쿄, 방콕, 파리, 바르샤바 시민들은 TV 앞에서 혹은 광장에서 닐 암스트롱의 걸음걸이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그해 여름 중국의 북경 시민들, 국경분쟁 전투에 내몰렸던 소련과 중국 병사,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이스라엘과 이집트 군인, 베트남의 밀림에서 생사를 넘나든 우리 국군들과 적(敵)이었던 베트남 병사들. 그들은 그때 인간의 달 착륙을 제대로 볼 수나 있었을까. 닉슨 대통령과 춤을 췄던 루마니아 아가씨, 19세기 초반부터 온갖 역사적 사건을 보고 들었을 미슨리모프 씨, 베트남 군 포로로 잡혔다 태권도로 탈출한 박정환 소위, 음란성 판정으로 심기가 괴로웠을 ‘반노’의 염재만 작가, 아폴로 11호가 발사된 날 검찰에 소환된 영화배우 문희 씨와 김지미 씨, 3선 개헌 반대를 외쳤던 서울대 유민성 군과 학교에서 쫓겨난 이철 군. 1969년 7월 21일 이들은 각자 어디서, 어떤 느낌으로 인간이 달을 밟는 광경을 바라봤을까. 그해 여름 인간의 달 정복은 그들 가슴 속에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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