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본문바로가기

동아사이언스

“별자리 외우는 게 무슨 과학이냐?”

통합검색

“별자리 외우는 게 무슨 과학이냐?”

2011.01.07 00:00
최근 모습을 드러낸 새 고등학교 ‘과학’ 과목 교과서는 기존 교과서와 판이하게 다르다. 첫 단원이 우주의 ‘빅뱅’이며,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이라는 칸막이를 과감하게 없앴다. 우주를 배경으로 이온의 개념을 제시하거나 행성 대기를 설명하며 CO₂의 화학 구조를 소개하는 식이다. 역사적 흐름, 인문학적 맥락 속에 과학 개념을 소개하는 스토리텔링을 강조한다. 또한 기존 교과서에 없었던 최신 과학기술 이야기가 교과서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번 개편은 아직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먼 훗날 과학교육 혁명을 촉발시킨 세계적 ‘사건’으로 기록될지 모를 일이다. 그만큼 지금까지의 과학교과서에서 벗어난 파격적 변화를 이끌었다. 올해 고1부터는 ‘2009 개정 교육과정’ 시행에 맞춰 이 교과서로 과학수업을 받게 된다. 이번 개혁을 주도한 이덕환 융합형과학모델교과서개발사업단장(서강대 화학과 교수)을 서강대에서 만났다. 아래는 이 교수와의 일문일답. ● 요즘 새 과학교과서를 설명하고 다니느라 무척 바쁘다고 들었다. “전국 곳곳의 과학교사들을 만나 이번 개편에 대해 설명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갖고 있다. 이번 달만 해도 경북, 제주도 등을 다녀야 한다. 부산은 세 번 갔다와야 한다.” ● 새 교과서에서 융합형 과학, 현대과학의 성과를 강조한 이유는. “학생들이 ‘과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숲’이 무엇인지 보여줘야 한다. 지금까지 과학 교육은 ‘나무만 열심히 들여다봐라.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숲이 그려질 거다’ 이런 식이었다. 소위 ‘구성주의’ 교육철학에 매몰돼 있었다.” ● 기존 구성주의 교육이 갖는 문제점이라면. “구성주의는 계단 올라가듯이 하나하나 배워야 한다는 철학이다. 저 꼭대기에 뭐가 있는지 나중에 알고, 우선은 차근차근 이 계단의 의미가 무엇인지 밟아 올라가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견디라는 것이 우리 교육현장에서 보였던 구성주의 철학이었다. 이 때문에 전체 그림, 즉 숲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아이들은 계단 몇 개 올라가다가 재미없다고 다 가버렸다.” ● 새 교과서는 그런 현실을 개선할 목적으로 보다 흥미를 유도한다는 것인가. “흥미보다는 ‘관심’이란 말을 쓰고 싶다. 관심은 학생들이 흥미를 못 느끼는 상황에서 ‘뭔가 중요한 것이구나’ 같은 깨달음을 유도하는 것이다.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단순히 우리 실생활에 과학적 원리가 숨어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과학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다는 인식을 주는 것이다.” ● 기존 구성주의 교육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물론 구성주의의 위계적 개념 교육이 다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숲을 먼저 보여주는 방식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1학년 때 융합형 과학을 통해 숲을 먼저 보고, 학년이 올라 물·화·생·지 개별 교과목에 들어갈 때는 위계적으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두 가지를 다 활용하자는 취지다.” ● 새 교과서에서 말하는 ‘숲’이란 무엇인가. “우주와 자연, 생명, 문명. 이 네 가지에 대한 현대과학적 이해가 곧 숲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살고 있는 누구인지’ 가르치는 것, 이게 바로 과학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닌가. 단원을 ‘우주와 생명’, ‘과학과 문명’으로 구성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 과학교과서에 인문학적 고민을 담은 것 같다. “과학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을 앞에다 내세우지만, 과학은 인간을 둘러싼 배경을 탐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분야다. 그래서 과학도 인문학적 소통이 중요하다. 그동안의 과학교육은 학생들에게 소통 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 ● 기존 교과서에 소통이 없었다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 “(예전 교과서를 보여주며) 이게 무슨 책이냐? 책이라고 할 수 없다. 글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문장들만 나열돼 있을 뿐이다. 과학도 결국 말과 글을 통해 이해하고 전달된다. 그동안 우리는 과학에서 글(소통)은 필요 없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따라서 학생들은 낱낱의 개념들을 연결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훈련을 해본 적이 없다. 과학에 대한 소통 방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 교과서가 바뀌어도 학생들은 여전히 구성주의 교육에 익숙해 할 것 같다. “한번은 새 과학교과서를 서강대 1학년생들에게 읽어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자 밑줄을 그어가며 중요해 보이는 단어에 동그라미 치는 식으로 읽더라. 텍스트를 글로써 읽는 게 아니라, 문장을 스캔해 가면서 필요한 단어만 기억하는 거다. 몇 페이지를 읽고 나서 뭘 읽었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잘 못한다. 스토리를 이해하지 않고 중요한 단어만 끄집어내 머리에 집어넣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개념 위주 교육의 가장 큰 폐해다.” ● 지금까지 우리 학생들은 그런 식으로 과학 공부를 해오지 않았나. “맥락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단어나 공식을 찾아내서 그걸 매개로 참고서를 찾아보고, 문제를 풀어보고 하는 식이었다. 이건 국어 교육에서도 볼 수 있는 문제점 아니냐. 국어 참고서를 봐라. 시를 한 편 써놓고, 시어 하나하나에 밑줄을 그어 시험에 나올 만한 설명을 빼곡하게 달았다. 시를 (작품으로서) 아예 읽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 시가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이고, 어떤 정서를 담았는지를 보는 문학 그 자체의 교육에서 벗어난 것이다. 과학도 그랬다.“ ● 그동안 과학교육이 위계적 개념에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자 양성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학자가 되려는 이공계 학생들에게 매우 낮은 효율성을 보였다. 대학교수들은 지금 이공계 입학생의 과학 수준은 10여 년 전 입학생들에 비해 사실상 배운 게 없다고 보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위계적 개념교육은 문과 학생에게 과학이 철저히 외면당하는 결과도 낳았다.” ● 고교생의 약 70%가 문과생이다. 어떤 문제점이 있나. “대학에 온 문과생들에게 고등학교 때 뭘 배웠냐고 물어보면, ‘뭔가 배운 것 같기 한데 기억에 남는 게 없다’고 말한다. 고교 졸업생의 70%가 3년 동안 과학을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현실이다. 7차 교육과정 이후 지난 10년간 이 70% 학생에 대한 과학교육은 거의 포기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교사는 물론 사범대에서도 문과생을 위한 과학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 ● 문과 학생까지 아우르는 과학 교육이 왜 중요한가. “과학 교육도 이제 과학자를 키우기 위한 목적에서 벗어나 과학적 교양을 갖춘 ‘시민’을 양성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 교양 시민을 양성해야 하는 이유는. “권위주의 시대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 없었다. 청와대에서 원자력이 필요하다고 방향을 정하면 그냥 따라가면 되는 거였다. 청와대가 머리 쓰면 되는 것이지, 일반 국민이 특별히 공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는 다르다. 구성원 전체의 사회적 합의가 필수다. 이를 위해서는 공통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 세계관 공유와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나. “지금 내가 평양 사람하고 마주앉아서 ‘민주적으로 뭘 해보자’ 이러면 잘 안 되는 거 아니냐.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세계관이 갖춰져 있을 때 열린 마음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한 것이다. 과학에 근거한 세계관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우주·자연·생명에 대한 현대과학적 이해는 우리 사회 내부를 넘어서 70억 인구가 공유할 수 있는 세계관이다.” ● 지금까지의 과학교육으로는 세계관을 가르치기에 부족했나. “예를 들어 기존 교과서에는 우주론이 없다. 역사적인 맥락, 인문학적 배경이 없는 채 그저 별까지의 거리나 별의 밝기를 측정하고, 느닷없이 별자리도 배운다. 별자리는 서양 신화를 그려 넣은 것으로 과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식이다. 황도12궁도 마찬가지다. 별들이 행성을 갖고 있고,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으며, 영원불변하지 않고,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며, 중성자별이 되고, 블랙홀이 되는 등의 내용이 우리 학생들이 배워야 할 지식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갈 학생들이 (이미 과학에서 상식으로 자리잡은) 빅뱅 우주론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 거냐.” ● 다른 나라와 비교해 이번 과학교과서 개편은 어떤 의미를 갖나. “앞서 말한 융합적인 시각, 교양시민 양성, 세계관 공유 등의 철학으로 과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세계 과학교육이 지향하는 추세다. 이런 가운데 한국이 가장 먼저 실천에 옮김으로써 앞서나가게 됐다. 그래서 우리가 과연 (이런 과학교육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측면도 있다. 이웃나라 일본도 이번 개혁에 주목하고 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노요리 료지 이사장은 지난해 여름에 기자들을 모아놓고 ‘일본은 뭐하고 있나. 한국처럼 과학교과서를 바꿔야 한다’고 소리친 적이 있다. 이런 교과서로 전국 규모의 정규수업에서 가르치는 건 한국이 최초라고 볼 수 있다.”

태그

이 기사가 괜찮으셨나요?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이 기사어떠셨어요?

댓글 0

8 + 5 = 새로고침
###
    과학기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소개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고발 소재 등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