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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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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아인슈타인

2007.08.21 11:58
1930년대는 참으로 우울한 시기였다. 전세계적으로 대공항이 일어나 빵과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다. 20세기 최고의 풍운아인 히틀러는 인종주의에 부리를 둔 제3제국을 세워 유럽을 삼키려 했고, 미국은 이를 피해 망명해온 고급 과학자들을 수혈하는 기쁨을 누렸다.유대인들의 수난시대 1933년 1월 30일 콧수염을 단출하게 기른 히틀러가 독일공화국 총리에 오르자 국민들은 열광했다. 1차대전 이후 14년 동안 극심한 경제난과 실업난에 허덕이던 독일 국민들에게 그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히틀러는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 집권 2년 만에 6백만명이던 실업자를 2백만명으로, 6년 뒤인 1939년에는 불과 몇만명으로 줄였다. 또한 생산력도 집권 초기에 비해 2배로 올려놓았다. 흔히 2차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적 재건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히틀러가 이뤄낸 경제적 부흥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 속에서 물가를 안정시키고 실업을 해결하고 경제적인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을 감행한 히틀러의 자신감은 여기서 비롯됐을 것이다. 히틀러는 집권 1년 뒤 국민투표에서 90%의 지지를 받고 제3제국 총통에 올랐다. 제3제국이라 함은 독일이 영화를 누렸던 신성로마제국(962-1806)과 독일제국(1871-1918)의 정통성을 이어받자는 뜻. 독일 국민은 게르만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당시는 부인과 딸이 밤마다 1차대전 전승국의 병사들에게 몸을 팔아 음식을 얻어오면 자존심 강한 독일 남자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이를 먹어야 했던 때였다. 그러니 정치적인 테러를 서슴치 않으며 절대권력을 꿈꾸는 히틀러라 할지라도 독일의 자존심만 회복해준다면 그의 독재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불행의 씨앗은 여기서 싹텄다. 히틀러의 나치스(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는 북유럽인을 포함해 아리안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만이 완전한 인간이고 인류의 발전에 기여해왔다고 주장하면서 게르만 민족의 단합을 외쳤다. 사실 나치스의 집권도 오랫동안 유대인을 미워해온 뿌리깊은 인종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다. 나치스는 집권 전부터 유대인에 대한 테러를 감행해왔는데, 이제는 합법적이고 공개적으로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제3제국을 통치하는 동안 약 8백만명의 다른 민족을 죽였는데, 그 중 6백만명이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처형이 극에 달했던 1942년 아우슈비츠수용소 가스실에서는 매일 2만명이 잠들었다. 물론 히틀러는 나약한 게르만민족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는 노동력을 잃은 환자나 정신질환자를 40만명이나 가스실과 사형장으로 보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독일 내에서 이뤄낸 업적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문학, 예술, 심지어 과학조차도. 1933년 그는 도서관과 대학 연구실 등에서 압수한 1만여권이 넘는 유대인들이 저술한 책을 베를린 오페라광장에서 불살랐다. 이 안에는 아인슈타인이 쓴 책들도 들어있었다. 유대인이라면 20세기 최고의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조차도 인정치 않았던 것이다. 독일을 떠나는 과학자들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한 후 한동안 취직을 하지 못했던 까닭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 내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반유대주의 때문이었다. 이런 과거의 아픈 상처를 딛고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았는데, 그에게 새로운 시련이 다가온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독일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망명해 미국시민이 됐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독일이 본 가장 큰 손실은 당시 양자역학과 핵물리학 연구의 중심이었던 괴팅겐학파가 깨진데 있다. 괴팅겐학파라면 막스 보른, 제임스 프랑크, 에드워드 텔러, 엔리코 페르미, 하이젠베르크 등과 같은 과학자들이다. 괴팅겐학파의 수장이었던 막스 보른(1882-1970, 195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은 반유대주의 법률 때문에 교수직을 내놓아야 했다. 스스로 가장 모범적인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독일 재건에 힘썼다. 유대인이지만 그의 조국은 독일이었던 것이다. 192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프랑크(1882-1964)는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마자 보따리를 쌌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는 행선지를 미국 볼티모어로 정했다. 수소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텔러(1908-)도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괴팅겐대학 교수였던 그는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만 해도 유대인으로서 독일에서 학문적 경력을 쌓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희망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물리학자로 괴팅겐학파로 분류되는 엔리코 페르미(1901-1954)의 경우는 다소 특별하다. 그는 1929년 28살의 나이로 무솔리니에 의해 왕립아카데미의 최연소회원이 됐던 천재 물리학자였다. 그런데 무솔리니가 히틀러와 손을 잡으면서 이탈리아에서도 반유대주의 캠페인이 펼쳐지자 고민이 생겼다. 아내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기 위해 아내와 함께 스톡홀름으로 갔다가 곧바로 미국으로 도망가버렸다. 제임스 프랑크, 에드워드 텔러, 엔리코 페르미는 미국에서 다시 만났다. 히틀러의 광란을 잠재울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를 맨해튼계획이라고 한다. 맨해튼계획은 아인슈타인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함으로써 수립된 계획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참여했다. 별의 에너지 생성원리를 밝힌 한스 베테(1906-)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어머니로부터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1932년 나치스 완장을 두른 젊은이들이 강의 중인 그의 교실에 들어와 난장판을 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듬해 대학에서 강제로 쫓겨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튼계획에 합류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의 수학자 폰 노이만 역시 어머니로부터 유대인의 피를 물려받았다. 1925년 부다페스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30년부터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이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졸지에 망명자 신세가 됐다. 그 역시 맨해튼계획에 참여해 원자폭탄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히틀러를 떠난 유대인 중에는 화학자나 생물학자도 많았다. 192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오토 마이어호프(1884-1951), 1943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헝가리의 과학자 게오르크 헤베시(1885-1966), 1953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한스 크렙스(1900-1981)와 프리츠 리프만 (1899-1986), 1964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콘라트 블로흐(1912-), 박테리오파지를 발견한 공로로 1969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막스 델브뤼크(1906-1981) 등. 이들의 망명이 독일과학에 큰 손실을 끼쳤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히틀러의 자존심은 매우 강했다. 그는 독일 민족이 외국에서 상을 받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노벨상조차도. 그래서 비타민 B2를 분리해 1938년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오스트리아의 과학자인 리하르트 쿤(1900-1967), 성호르몬 발견으로 1939년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아돌프 부테난트(1903-1905), 같은 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게르하르트 도마크(1895-1964)는 나치스의 압력으로 노벨상 수상을 거절해야만 했다. 히틀러에게 협조한 과학자 비록 유대인들에게는 히틀러가 밉겠지만, 그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찬성하면서 거들던 과학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190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레나르트(1862-1947)였다. 레나르트는 과격한 민족주의자로 독일과학의 우수성에 관한 것이라면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1차대전 때에는 독일 연구원들의 업적이 영국과학자들에 의해 은폐되고 표절된다고 그들과 싸웠다. 또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유대인의 물리학’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히틀러가 등장해 아리안 과학의 우수성을 주장하자 앞장설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결국 레나르트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아인슈타인은 독일을 떠나야 했다. 괴팅겐학파의 하이젠베르크(1892-1968)는 히틀러 치하에 남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경우. 그는 많은 과학자들이 히틀러가 싫어 독일을 떠날 때 함께 떠나지 못해 몹쓸 짓을 당했다. 1932년 하이젠베르크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자 나치스들은 이를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히틀러와 연대’를 공개적으로 서약하도록 하는 축하행사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나치스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잔당’으로 몰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양자역학은 상대성이론과 더불어 유대인의 졸작이라고 매도당했기 때문에, 그는 나치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스를 위해 원자폭탄을 만드는 일의 책임을 맡았다. 이런 이유로 전쟁이 끝나자 전범으로 체포돼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가 개발책임을 맡았기에 독일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없었다는 동료들의 변호로 풀려났다. 그의 능력으로는 능히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는데 일부러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와 더불어 양자역학을 세웠던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1887-1961)는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 총통을 지지한다는 고백문을 썼다. 그러나 나치스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교수직마저 빼앗았다. 그제서야 나치스의 본색을 간파하고 단돈 10마르크만 지닌 채 아내와 더불어 탈출했다. 나치스 치하에서 그들과 맞서 싸운 용감한 과학자도 있었다. 191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막스 폰 라우에(1879-1960)는 나치스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전 세계적인 유태인 사기극’이라고 폄하하자, 그 비난을 17세기 갈릴레이의 종교재판과 같다며 비웃었다. 그는 나치스 때문에 독일에서 엄청난 두뇌들이 유출되는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으며, 히틀러의 우라늄계획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하이젠베르크와 더불어 연합군에게 억류됐다.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 과학자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아직까지 베일에 싸인 것이 많다. 특히 인간생체실험에 대한 것은 두꺼운 장막 속에 감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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