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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는 시 2] “어느 영혼이 지난밤 꽃살문 같은 꿈을 꾸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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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는 시 2] “어느 영혼이 지난밤 꽃살문 같은 꿈을 꾸었나”

2016.02.13 17:49

서리

 
문태준

겨울 찬 하늘 한 켜 살껍질을 누가 벗겼나
어느 영혼이 지난밤 꽃살문 같은 꿈을 꾸었나
갓 바른 문풍지 같고 공기로만 빚은 동천産 첫물
사락사락 조리로 쌀을 이는 소리가 난다

 

 

pixabay 제공
pixabay 제공

 

[마음을 치는 시]의 두 번째는 비교적 짧은 시를 골라보았습니다. 짧아도 맛깔납니다. 문태준 시인의 「서리」입니다.

 

‘서리’는 순우리말입니다. 다른 말로는 ‘강상’이라고도 하고 ‘청녀’라고도 일컫습니다. 둘 다 한자어입니다. 강상(降霜)은 내릴 강(降) 서리 상(霜), 즉 서리가 내린다, 혹은 서리 자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청녀(靑女)는 우리의 민속 신앙에서 ‘서리를 다스린다는 여신’을 의미합니다. 왠지 슬픔이 응어리진 한(恨)이 서려 있는 여인의 사연을 떠올리게 하는 말인 듯합니다.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서리’는 차가운 대기 중의 수증기가 지상의 물질 겉면에 얼어붙은 것이죠. 그래서 서리는 늦가을이나 겨울의 자연 현상 중 하나입니다만, 이 시를 쓴 문태준 시인은 서리의 발생 원인을 (모든 시가 그렇듯이) 다른 데에서 발견하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가 아니라 산문이거나 과학 정보가 되겠죠.)

 

이 시의 첫 행을 읽어보면, 시인에게 서리는 숫돌에 잘 벼려진 칼의 날로 생선회를 뜬 듯한, 겨울 하늘의 투명하고 얇은 살점입니다. 서리의 이미지가 그렇듯, 종잇장처럼 얇게 회 뜬, 거의 투명한 복어회가 떠오르는군요. (일단, 침 한번 삼키겠습니다.) 시의 두 번째 행에서는 서리의 발생이 “꿈”의 흔적일지 모른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누가 꾼 꿈? 육체를 가진 지상의 인간이 꾼 꿈이 아니라 어느 영혼이 꾼 꿈이랍니다. 그 꿈의 모양은 “꽃살문”입니다.

 

꽃살문, 하면 독자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는지요? 저는 변산반도 내소사(來蘇寺) 대웅전의 못질 하나 하지 않은 꽃살문이 떠오르는군요. 어쨌든 꽃살문의 무늬는 성에꽃 모양이겠죠. 시의 세 번째 행은 이 무늬의 시적 상상으로 이어집니다. 성에꽃 무늬의 서리; 팽팽한 문풍지 속의 꽃무늬; 하지만 투명한; 그래서 “공기로만 빚은”; 새벽이나 아침에 처음 발견하게 되는 서리; 그래서 “동천産”(해가 뜨는 동쪽 하늘에서 만들어낸); 하루의 시작에서 겨울 하늘이 만들어놓은 굳은 물; 그래서 “첫물”이라고, 시인은 서리의 정체성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냅니다.

 

앞의 3행에서 신비한 자연과 삶을 엮어 서리를 노래했다면, 마지막 4행은 오롯이 삶, 아니 총체적인 삶이 아닌 구체적인 생활에서 서리를 발견합니다. 그 서리를, 시인이, 시인의 어머니가 아침밥 짓기 전에 조용히 밟으며 걸었나 봅니다. 공복(空腹)인 채로 발밑에서 서리 밟히는 소리를 들었나 봅니다. 아무리 추울지라도 오감(五感)의 창문을 활짝 열어둔 시인의 청명한 시입니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 [마음을 치는 시]를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 주
과학은 유용합니다. 문학은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쓸모없기에 문학은 삶을 억압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자유롭고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있음’을 꿈꿉니다. 그것이 하등 쓸데없는 문학의 의미이고, 문학의 꽃인 시의 본질입니다. 우연히 얼핏 들은 어떤 노래가 온종일 귓가에 남듯이, 어느 날은 우연히 읽게 된 시 한 편이 우리의 허한 마음을 칩니다. 그 무용한 힘에 간혹 우리 마음은 속절없이 작동합니다. 그런 아이러니한 의미의 생명을 믿어, 시인이 소개하는 시 한 편과 그 시 속의 이야기들을 준비했습니다. 당분간 매주 연재합니다. 마음 놓고 독자인 당신의 마음의 행로를 뒤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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