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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는 시 8]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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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는 시 8]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

2016.03.26 18:00

等雨量線 1  

                                  황지우


  1
  나는 폭포의 삶을 살았다, 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
  쏟아지는 힘을 비켜갈 때 방울을 떠 있게 하는 무지개;
  떠 있을 수만 있다면 空을 붙든 膜이 저리도록 이쁜 것을

 

  나, 나가요, 여자가 문을 쾅 닫고 나간다.
  아냐, 이 방엔 너의 숨소리가 있어야 해.
  남자가 한참 뒤에 중얼거린다.

 

  2
  이력서를 집어넣고 돌아오는 길 위에 잠시 서서
  나는, 세상이 나를 안 받아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파트 실평수처럼 늘 초과해 있는 내 삶의 덩어리를
  정육점 저울 같은 걸로 잴 수는 없을까.
  나는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아이들이 마구 자라
  수위가 바로 코밑에까지 올라와 있는 생활;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내 자신이 한계이다.
  어디엔가 나도 모르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은
  불구가 내겐 있었던 거다.
  커피 숍에 앉아, 기다리게 하는 사람에 지쳐 있을 때
  바깥을 보니, 여기가 너무 비좁다.

 

  3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인도에 대해 생각한다.
  시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
  물위 그림자 큰 새가
  피안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기절해 쓰러져버린 인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히말라야 근처에까지 갔다가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한다.

 

pixabay 제공
pixabay 제공

우리 현대사의 또 하나의 고통, ‘IMF 사태’를 기억하시겠지요. 이 시가 수록된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가 출간된 때가 바로 그 시절이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시인인데다가 8년 만에 출간된 그의 시집이었기에 언론과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었지만, 이 시집의 시의 화자는 마치 ‘IMF 사태’로 상처받은 공통된 서민으로 읽히기에 딱 좋았습니다(그때까지의 황지우 시인은 변변한 직업이 없었으니까요). 그 바람에 기대 이상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던 이 시집의 독자는 대부분 삼사십 대 남성들이었습니다. 그때의 무더기 실직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이 시집 속의 이야기들이 독자 자신의 상황이었을 테니까요.

 

안타깝게도 그때의 실업난은 당시 직장인들의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어 오늘날 청년들은 그 바통(baton)을 받아 쥐고 인생이라는 트랙을 이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의 제목 ‘等雨量線’(등우량선)은 시대를 넘어 오늘의 독자에게도 바통처럼 그 의미를 이어 쥐어줍니다. 즉, 기상 관측 용어인 ‘등우량선’(等雨量線)은 ‘우량의 분포를 표시하려고 강우량이 비슷한 지점을 연결한 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인생의 이야기인 셈이죠.

 

그 시를 읽어봅니다. 세 개의 연(聯)으로 나뉜 이 시는 각 연마다 숫자로 영역을 구분해놓고 있지만 모두 한 이야기입니다. “떠 있을 수만 있다면 空을 붙든 膜이 저리도록 이쁜 것”(1연)과 “시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 / 물위 그림자 큰 새가 / 피안을 끌고 가는 것”(3연)과 “히말라야 근처에까지 갔다가 /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3연)는 모두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라고 말한 시인의 예술적 희망이지만, 그것과 대비된 삶의 고백, 즉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 내 자신이 한계”(2연)라는 아픈 현실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인의 현실 삶은 “폭포의 삶을 살았다, 고는 말할 수 없지만”이라고 밝히듯 치열한 생활인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마구 자라 / 수위가 바로 코밑에까지 올라와 있”기에 나름 경제 생활인이 되기 위해 “이력서를 집어넣고 돌아오는 길 위에 잠시 서서”는 “아파트 실평수처럼 늘 초과해 있는 내 삶의 덩어리를 / 정육점 저울 같은 걸로 잴 수는 없을까”라고 성찰합니다. 자신의 삶은 현실이라는 “실평수”보다 늘 크게 표기된 ‘분양 평수’처럼 부풀려 있었다는 반성의 말이겠지요.

 

그럼에도 시인은 ‘시인이기에’, “쏟아지는 힘을 비켜갈 때 방울을 떠 있게 하는 무지개; / 떠 있을 수만 있다면 空을 붙든 膜이 저리도록 이쁜 것을” 꿈꿉니다. 못 보면 못 느끼고 눈으로 보았어도 마음에 담지 않으면 못 본 것과 같으니, “空을 붙든 膜이 저리도록 이쁜 것”, 즉 폭포수 주변의 허공(“空”)에 뜬 물방울들을 비춘 햇볕의 산란 현상인 무지개의 막(膜)의 구체적인 현상을 시인이 보았으니 그 “이쁜 것”에 마음이 꽂힐 수밖에요. 그런 시인의 관심이 생활인으로서는 “언제나 한계”에 봉착해 있겠지만, 마음에 꽂힌 그 예술적 꿈의 화살을 뽑지 않는 한 시인은 (아마도 취업을 위해) “커피 숍에 앉아, 기다리게 하는 사람에 지쳐 있을 때 / 바깥을 보니,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 세 번씩이나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밝힌 시인은 현실 생활을 옥죄는 “여기가” 아닌, 드넓은 인도의 “갠지스 강”과 거대한 “히말라야”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시인은 “갠지스 강”에서 화장(火葬)할 때 물위를 낮게 나는 새가 제 그림자를 수면에 드리워 방금 주검을 떠난 영혼을 피안(彼岸)으로 데려가는 아름다운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히말라야 근처에까지 갔다가” 그 거대한 “산그늘”에 매료돼 곧바로 산속으로 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합니다. 일탈을 꿈꾸는 그 누군가는 바로 시인 자신이고 싶겠죠. 누구든 ‘진짜 시인’이라면 그럴 겁니다. 문학은 아득한 것을 눈앞에 데려다놓는 일이니까요.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 주
과학은 유용합니다. 문학은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쓸모없기에 문학은 삶을 억압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자유롭고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있음’을 꿈꿉니다. 그것이 하등 쓸데없는 문학의 의미이고, 문학의 꽃인 시의 본질입니다. 우연히 얼핏 들은 어떤 노래가 온종일 귓가에 남듯이, 어느 날은 우연히 읽게 된 시 한 편이 우리의 허한 마음을 칩니다. 그 무용한 힘에 간혹 우리 마음은 속절없이 작동합니다. 그런 아이러니한 의미의 생명을 믿어, 시인이 소개하는 시 한 편과 그 시 속의 이야기들을 준비했습니다. 당분간 매주 연재합니다. 마음 놓고 독자인 당신의 마음의 행로를 뒤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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