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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는 시 9]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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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는 시 9]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2016.04.02 18:00

찔레꽃
                                      송찬호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 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 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수 년, 삶이 그렇게 징 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에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GohRo(f) 제공
GohRo(F) 제공

송찬호 시인의 고향이자 거주지는 충북 보은입니다. 어디선가 그의 글에서 본 기억으로는 그가 사는 마을은 경북 상주까지 차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이랍니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나의 외가가 보은군 내북면이기에 다정한 마음으로 지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마을은 아마도 속리산 자락 남단 어디쯤인 듯했고 (뜬금없이 아쉽게도) 나의 외가와는 정반대편이었습니다. 그래봐야 군(郡) 단위 고을이니 멀어야 차로 반시간 안에 닿을 거리일 겁니다.

 

시인이 사는 그 마을에도 찔레나무 숲이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선남선녀의 두 청춘이 종종 그 찔레나무 숲에서 만나 찔레꽃처럼 새하얀 마음을 주고받았나 봅니다. 찔레꽃잎처럼 희디흰 치열(齒列)을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연인은 결혼할 수는 없었나 봅니다. 그러니 은밀한 사랑이었겠죠. “결혼식 날 아침 네[신부]가 집을 떠나면서” 시인에게 “찔레나무 숲에 가보라”고 말했으니 한동네에 살았을 듯합니다. 그러면서 신부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편지지 여러 곳에 얼룩졌을 손글씨의 편지를 고이 접어 두 청춘이 자주 만났던 찔레나무 숲의 “하얀 사기 사발” 속에 넣어두었나 봅니다.

 

예식장에는 차마 가지 못한 참담한 시인은 예식을 올리고 있을 시간에 텅 빈 마을에 남아 혼자만의 또 다른 경건한 의식(儀式)을 치르듯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한쪽 눈썹을 면도하면서 찔레꽃잎처럼 하얗게 된, 사라진 눈썹 자리를 응시하며 실연(失戀)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러고는 그날 아침 신부의 말대로 두 사람에게 익숙한 찔레꽃 숲으로 가서 다른 이의 신부가 된 연인의 편지를 읽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차마 다 읽지는 못하”고 시인은 고향을 떠납니다(아마도 신부는 그 고향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을 테니까요).

 

고향에서 사랑을 잃은 시인의 타향살이는 “징 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처럼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어 허둥댔겠지요. 그리고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시인은 고향에 돌아옵니다. 그러고는 다시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빛 사기” 그릇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한 두 청춘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은 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었기에, 어떤 말도 어떤 이미지도 입에 담지 못하고 그저 찔레꽃처럼 “벙어리처럼 하얬”습니다. 그렇듯,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 없는 시인의 창백한 사랑은 이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청춘의 계절 봄의 절정인 오월의 뱀처럼 꿈틀거리며 웁니다. 차마 말 못할 안타까운 사랑은 애써 지우려고 면도를 해도 다시 자라는 눈썹 같을 테니까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찔레나무 숲을 찾아가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는 듯한 이 시를 읽노라면, 시를 즐겨 읽는 사람들은, 모두 말해주지 않는 아스라한 삶의 사연을 자기만의 청력으로 엿듣는 걸 좋아하는 동족(同族)인가 봅니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 주
과학은 유용합니다. 문학은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쓸모없기에 문학은 삶을 억압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자유롭고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있음’을 꿈꿉니다. 그것이 하등 쓸데없는 문학의 의미이고, 문학의 꽃인 시의 본질입니다. 우연히 얼핏 들은 어떤 노래가 온종일 귓가에 남듯이, 어느 날은 우연히 읽게 된 시 한 편이 우리의 허한 마음을 칩니다. 그 무용한 힘에 간혹 우리 마음은 속절없이 작동합니다. 그런 아이러니한 의미의 생명을 믿어, 시인이 소개하는 시 한 편과 그 시 속의 이야기들을 준비했습니다. 당분간 매주 연재합니다. 마음 놓고 독자인 당신의 마음의 행로를 뒤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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