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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언제부터 전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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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언제부터 전쟁을 했을까?

2016.05.02 20:00

지난 가을 필자는 우연히 강석경 작가의 에세이집 ‘이 고도(古都)를 사랑한다’를 읽었다. 신라 1000년의 수도였던 경주의 곳곳을 테마로 한 에세이 20여 편이 실려 있다. 대구 태생인 강 작가는 대학 진학 이후 한 30년 동안 서울생활을 하다 염증을 느껴 인도로 떠나기도 했지만 결국 경주에 정착했다고 한다.


인터넷 시대에 프리랜서가 굳이 수도권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해서 귀촌을 고민하던 필자는 책을 읽으며 경주에 매료됐고 귀촌을 해도 어차피 연고도 없는 곳일 테니 차라리 강 작가처럼 경주에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전답사 겸 여행을 떠나기로 했지만 이런 저런 일이 생겨 계속 미루다 지난주에야 경주에 다녀왔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과 대학교 때 친구와 여행하다 하루 이틀 머물긴 했지만 솔직히 경주는 낯선 도시였다. 책을 읽으면서 경주를 유적과 도심이 모자이크처럼 섞여 있는 곳으로 상상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서북쪽은 인구 20만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동남쪽에 유적들이 몰려 있다.


천마총을 비롯해 거대한 고분 20여 기가 있는 대릉원에 와서는 책에서 ‘우리의 뿌리이자 원형의 다른 이름-대릉원에서’라는 에세이를 읽은 뒤 둘러보는 식으로 이곳저곳을 다녔다. 특히 분황사와 황룡사지가 인상적이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분황사 모전석탑은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좀 놀랐다. 벽돌로 지어서인지 탑이라기보다는 집 같았는데 안내문을 읽어보니 벽돌이 아니라 벽돌 모양으로 잘라 만든 돌(模塼)로 쌓은 것이라고 한다.


불공을 드리고 있는 보살들을 뒤로 하고 분황사를 나오자 남쪽으로 노란 꽃이 만발한 유채밭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 그 유명한 황룡사터가 눈에 들어왔다. 553년 진흥왕이 광활한 늪지를 개간해 새로 궁궐을 지으려고 했는데 누런 용이 나타나자 마음을 고쳐먹고 절을 지은 게 ‘황룡사(黃龍寺)’라고 한다. 선덕여왕 14년(645년) 황룡사 한 가운데에 9층목탑이 세워지면서 100년 가까운 대역사가 마무리됐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경주 황룡사지에서 고려말 유학자 길재가 망국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경을 둘러보며 지은 시구가 떠올랐다. 금당터에서 남쪽을 바라본 풍경으로 바로 앞 9층목탑터에는 초석 64개가 여전히 남아있어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현재 황룡사 복원을 위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 강석기 제공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경주 황룡사지에서 고려말 유학자 길재가 망국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경을 둘러보며 지은 시구가 떠올랐다. 금당터에서 남쪽을 바라본 풍경으로 바로 앞 9층목탑터에는 초석 64개가 여전히 남아있어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현재 황룡사 복원을 위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 강석기 제공

원래 궁궐을 지으려고 했던 터라서 그런지 탁 트인 평지에 자리 잡은 황룡사는 엄청난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 같다. 9층목탑이 서 있던 자리에는 한 변의 길이가 22미터인 정사각형 안에 초석 64개(8×8)가 여전히 박혀있다(탑은 1238년 몽고 침략 때 불탔다고 한다). 책에서 높이를 80미터로 추정하는 부분을 읽고 과장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그 정도 올라갔을 것 같기도 하다.


신라의 궁궐이 있던 자리인 반월성터을 걷던 필자는 문든 신라의 역사에 대해 좀 더 체계적으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불국사로 가서 통일신라시대 예술의 백미인 다보탑과 석가탑을 감상하려는 계획을 접고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된 결정이었던 것 같다.


박물관을 들어서자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전율이 일 정도로 품격이 높았다. 1200여 년 전 이 종을 만든 장인(예술가)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백팔배라도 드리고 싶었지만 초등학생들이 다가오고 있어서 발걸음을 돌렸다. 본관 2층은 네 개의 방으로 나뉘어 시대 순으로 신라 1000년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데 진품유물들이 가득했다.


구석기시대를 시작으로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거치며 바뀌는 유물은 서서히 나라의 틀이 잡히면서 본격적인 신라의 역사가 시작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경주 최대 고분인 황남대총(왕과 왕비로 추정되는 두 사람의 무덤이 붙어 있다)을 발굴할 때 나온 부장품은 양과 질 모두에서 압도적이었다.


문득 신라가 그냥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동기, 철기 등 새로운 재료로 만든 도구를 확보한 부족이 주면 부족을 제압하며 규모를 키워 어느 순간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조직을 구성했고 훗날 가야를 병합해 덩치를 키웠다.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공격과 간섭에 시달렸지만 마침내 힘을 키워(물론 당나라를 끌어들였지만) 두 나라를 멸망시켰고 신라를 삼키려는 당을 물리쳤다. 박물관의 유물들은 그 지난한 역사를 증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또한 승자들의 역사가 아닐까. 신라라는 나라가 세워지고 팽창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삶이 파괴됐을 것이다. 경주에 남아있는 고분들도 결국 왕족, 즉 당시 권력자들의 무덤 아닌가. 요즘은 ‘금수저 흙수저’라는 표현을 쓰지만 최근까지도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얘기할 때 ‘성골 진골’이라고 말했다. 필자 같은 사람은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도 않았을 사람들이 묻힌 고분을 보면서 감상에 젖는다는 게 좀 어색해졌다. 박물관을 나설 즈음에는 경주에 대한 열정이 꽤 식어있었다.

 

1996년 독일 북동부 톨렌제강에서 한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발견한 위팔뼈로 위쪽에 돌화살촉이 박혀있다. 추가 발굴 결과 약 3200년 전 이곳에서 병사 수천 명이 뒤엉킨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음이 밝혀졌다.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역사보존과(MVDHP)/S. Suhr 제공
1996년 독일 북동부 톨렌제강에서 한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발견한 위팔뼈로 위쪽에 돌화살촉이 박혀있다. 추가 발굴 결과 약 3200년 전 이곳에서 병사 수천 명이 뒤엉킨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음이 밝혀졌다.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역사보존과(MVDHP)/S. Suhr 제공

130여 명 유골 발굴


여행을 마치고 집에 와보니 구독하고 있는 주간 학술지 몇 권이 기다리고 있다. 다음날 아침 커피를 홀짝이며 느긋하게 페이지를 넘기다 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이언스’ 3월 25일자(한 달 쯤 늦게 배달된다)에 실린 기사의 타이틀 이미지로 돌화살촉이 박힌 뼈 사진이다. 바로 이틀 전 박물관에서 봤던 돌화살촉이 떠올랐다.


‘석기시대 인류가 사냥한 동물의 뼈인가?’ 이렇게 추측하며 좀 읽어보니 그게 아니다. 사람의 위팔뼈 위쪽에 돌화살촉이 박혀 있는 것이었다. 즉 사냥이 아니라 3200년 전 유럽의 한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죽은 사람의 뼈였던 것이다. 박물관에서 돌칼과 돌도끼, 돌화살촉을 보면서도 사냥만을 생각했던 필자로서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여섯 쪽에 걸친 심층기사였는데, 석기시대가 아니라 청동기시대 벌어진 전투에 대한 얘기다. 그럼에도 돌화살촉이 박힌 뼈가 클로즈업된 건 이유가 있다. 일단 금속을 쓸 수 있게 됐다고 해서 돌과 나무가 완전히 대체된 건 아니라는 정도에서 넘어가자. 아무튼 이 사진을 보며 설사 석기시대라도 돌화살촉 같은 도구가 무기로도 쓰였을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몰아낼 때 순순히 말로 떠나라고 했겠는가.


기사는 1996년 한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독일 북부 톨렌제강 강둑에서 우연히 발견한 뼈 하나(앞에 언급한 위팔뼈)로 시작한 발굴작업이 지금까지 밝혀낸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여러모로 충격적인 내용이다. 필자가 경주박물관에서 맡은 희미한 피비린내가 과도한 상상력의 결과만은 아님을 시사하기도 해서 이 자리에서 소개한다.


‘톨렌제 계곡’으로 명명된 유적지가 속한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역사보존과와 그라이프스발트대의 고고학자들이 2009년에서 2015년까지 진행한 본격적인 발굴 결과 불과 450평방미터 면적에서 최소한 130명의 유골이 나왔고 말도 다섯 마리나 됐다. 그런데 발굴 면적은 기껏해야 전체의 10%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최소한 750명은 될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130명은 거의 젊은 남성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앞의 위팔뼈처럼 무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뼈가 상당수 있었고 청동으로 만든 갑옷과 투구도 나왔다. 불과 방 하나 면적인 12평방미터에서 두개골 20개를 포함해 뼈 1478개를 수거하기도 했다.


이를 재구성해보면 직업군인을 포함한 수천 명의 군인들이 강변에서 전투를 벌여 수백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3200년 전 이 지역에는 도시는 물론이고 웬만한 규모의 마을이 있었다는 흔적도 없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당시 인구밀도를 1평방킬로미터에 5명 미만으로 추정했다. 물론 전투에 대한 기록도 없다. 따라서 이런 곳에서조차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이 벌어졌다면 당시 인구가 많았던 근동과 북아프리카, 지중해 지역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참고로 청동기시대는 약 5000여 년 전 근동에서 시작됐다.

 

지금까지 전체 유적지의 10%인 450평방미터가 발굴됐는데 최소 130명의 유골이 나왔다. 사진은 이 가운데 12평방미터 구역으로 두개골 20개를 포함해 뼈 1428개가 출토됐다. - MVDHP/C. Hartl-Reiter 제공
지금까지 전체 유적지의 10%인 450평방미터가 발굴됐는데 최소 130명의 유골이 나왔다. 사진은 이 가운데 12평방미터 구역으로 두개골 20개를 포함해 뼈 1428개가 출토됐다. - MVDHP/C. Hartl-Reiter 제공

갑옷은 직업군인 존재 증거


톨렌제 계곡 유적은 청동기시대 전투현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일뿐 아니라 무기와 병사가 함께 발굴된 가장 오래된 전장 유적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라고. 죽은 병사와 버려진 무기들이 강변 습지대에 묻히면서 잘 보존됐기 때문이다. 반면 당시 이집트나 그리스 지역의 문헌은 많이 남아있고 그 가운데는 전쟁에 대한 기록도 있지만 이를 입증할 유물이 전혀 없는 상태다. 예를 들어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톨렌제 계곡 전투가 일어나고 약 100년 뒤에 벌어진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 묘사된 전투장면을 후세의 창작으로 여겼다.


기사에서 독일고고학연구소 스벤트 한센 박사는 “오랫동안 우린 선사시대에 전투가 벌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며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은 신분을 상징하는 귀중품이나 권력의 상징으로 설명했지 실제 무기라고 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수십 명이 습격을 하는 수준의 싸움이나 분쟁은 벌였겠지만 직업군인이 동원된 수천 명 규모의 전투를 벌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직업군인 또는 고도로 훈련된 군인이 있었다는 가장 큰 증거는 갑옷과 투구의 존재다. 상대의 공격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한 장비이지만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입을 경우 오히려 화를 자초한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군장을 하고 전투에 임했다는 건 많은 훈련을 소화했다는 뜻이다. 또 말의 존재는 기병이 있었다는 의미이고 일부 유골 주변에서 주석 반지나 청동 장식술, 청동 팔찌 등이 함께 출토돼 신분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음을 추정케 했다. 즉 당시 지배층이나 직업군인이 말에 올라 장교의 역할을 하며 전투를 지휘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뼈의 상처를 면밀히 조사한 결과 아문 흔적이 전혀 없어 사람들이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죽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다는 뜻이다. 반면 사망자의 27%에서 오래 된 상처의 흔적이 보였다. 즉 이들이 오래 전부터 전투를 해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당시 무기들의 파괴력을 잘 보여주는 유골로 위는 떡메처럼 생긴 목재 무기에 맞아 구멍이 뚫린 두개골이고 아래는 청동화살촉이 박힌 두개골이다. 안쪽에서 찍은 사진으로 화살촉이 두개골을 뚫고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 위 MVDHP/D. Jantzen; 아래 톨렌제계곡연구프로젝트/V. Minkus 제공
당시 무기들의 파괴력을 잘 보여주는 유골로 위는 떡메처럼 생긴 목재 무기에 맞아 구멍이 뚫린 두개골이고 아래는 청동화살촉이 박힌 두개골이다. 안쪽에서 찍은 사진으로 화살촉이 두개골을 뚫고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 위 MVDHP/D. Jantzen; 아래 톨렌제계곡연구프로젝트/V. Minkus 제공

한편 치아의 DNA를 분석해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을 재구성한 결과 전투원 가운데 현지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많은 사람들은 수수가 풍부한 음식을 먹었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당시 주로 남유럽에서 재배되던 곡물이다. 즉 유럽 곳곳에서 병사들이 집결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도 별로 살지 않는 북유럽 오지에서 이런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것일까. 발굴 과정에서 나무와 돌로 만든 다리의 흔적이 나왔는데, 아마도 이 지역이 교통의 요지였던 것 같다. 즉 두 부족이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전투를 준비했고 이 과정에서 유럽 각지의 용병을 고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다. 톨렌제 계곡 유적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인류가 조직적으로 대규모의 전투를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한반도에서도 일찌감치 필자가 추측하는 수준 이상의 큰 규모와 잦은 빈도로 전투가 벌여졌을지도 모른다. 박물관에 가지런히 배열된 돌화살촉은 아름답기까지 하지만 결국은 끔찍한 살상무기일 뿐이다. “과거는 아름답고 사람들은 순수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감상일지도 모른다. 지금 필자가 살고 있는 도시는 조선시대에 지었다는 돌다리말고는 이렇다 할 유물도 없는 곳이지만 차라리 그래서 더 정겹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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