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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는 시(詩) 19] “대나무 그림자가 장구채처럼 문에 어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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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는 시(詩) 19] “대나무 그림자가 장구채처럼 문에 어리던 날”

2016.06.18 18:00

집장구
                                   손택수


  일년에 한 번은 집이
  장구소리를 냈다
  뜯어낸 문에
  풀비로 쓱싹쓱싹
  새 창호지를 바른 날이었다
  한입 가득 머금은 물을
  푸― 푸― 골고루 뿌려준 뒤
  그늘에서 말리면
  빳빳하게 당겨지던 창호문
  너덜너덜 해어진 안팎의 경계가
  탱탱해져서,
  수저 부딪는 소리도
  새소리 닭울음소리도 한결 울림이 좋았다


  대나무 그림자가 장구채처럼 문에 어리던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코 고는 소리에도 정든 가락이 실려 있었다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요즘처럼 때 이른 더위가 이 땅을 가득 메우는 날들의 오후가 반복되면, 어느 오래된 시골집의 나무 마루든 황토벽에 종이 장판을 깐 조그마한 안방에서든 목침을 베고 큰대자로 누워서 고무줄로 배터리를 친친 감은 라디오에서 주파수 잡음에 섞여 흘러나오는 ‘정오의 희망곡’을 아무 생각 없이 자장가처럼 듣고 싶어지는 분들이 저 말고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이 시의 공간이 딱 그렇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독자의 마음은 벌써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시인의 고향집에 가 있습니다. 옛날 시골집의 방문마다 방 안쪽에 붙여놓은, 내구성이 약한 ‘창호지’는 해마다 새것으로 갈아야 했습니다. 사계절을 지내는 동안 아낙네가 밥상을 들여오다가 부딪쳐, 혹은 장날 장터에서 거나해진 가장(家長)이 박하사탕 한 봉지를 손에 쥐고 귀가해 방문 앞에서 발을 헛디디다가 무심결에 상처 낸 창호지가 몇 차례 덧대져 보기 흉해졌기에 일 년에 한번은 아예 일제히 새것으로 가는 것이죠.


그렇게, “뜯어낸 문에 / 풀비로 쓱싹쓱싹 / 새 창호지를 바른” 이튿날이면 “그늘에서” 천천히 마른 창호문의 창호지는 “빳빳하게 당겨”져 창호문을 닫으면 마치 장구처럼 공명(共鳴), 즉 울림소리가 극대화됩니다. 이 시는 바로 그 ‘잊힌 소리’를 독자에게 다시 떠올려줍니다. “수저 부딪는 소리도 / 새소리 닭울음소리도 한결 울림이 좋았다”라며 독자를 기억과 상상의 공간으로 데려갑니다. 그 구체적인 현장에서, 창호지를 새로 붙여서 팽팽하게 긴장된 창호문을 통해 남도 가락을 실은 장구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시인도 독자도 당연할 겁니다.


그런 이 시는 “풀비로 쓱싹쓱싹” “푸― 푸― 골고루 뿌려준 뒤” “빳빳하게 당겨지던” “너덜너덜 해어진” “탱탱해져서”와 같이, 마치 추임새처럼 자주 등장하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맛깔을 더합니다. 그리고 이 시의 ‘마음을 치는’ 대목, “대나무 그림자가 장구채처럼 문에 어리던 날”은 이른 여름 날씨에 후끈거리는 독자의 마음을 강 건너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의 졸음처럼 당장 그곳에 앉혀놓습니다. 그러고는 시인의 향수(鄕愁)처럼, “코 고는 소리에도” 실리는 “정든 가락”을 듣고 싶게 만듭니다.


우리가 분주히 부대끼며 사는 현실 세계에서 ‘시’는 어떤 이익에도 유용하지 않지만, 전혀 다른 가치와 의미로서의 ‘시’는 이런 여름 날씨에 우리가 ‘잊은’ 곳으로 독자의 마음을 인솔해 가서는 아스라한 “집장구”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려주며 하오의 단잠을 재워줍니다. 당장의 에어컨은 유용하고 시원하지만, 눈과 귀를 닫은 마음의 육신으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은 종종 차갑습니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 주
과학은 유용합니다. 문학은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쓸모없기에 문학은 삶을 억압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자유롭고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있음’을 꿈꿉니다. 그것이 하등 쓸데없는 문학의 의미이고, 문학의 꽃인 시의 본질입니다. 우연히 얼핏 들은 어떤 노래가 온종일 귓가에 남듯이, 어느 날은 우연히 읽게 된 시 한 편이 우리의 허한 마음을 칩니다. 그 무용한 힘에 간혹 우리 마음은 속절없이 작동합니다. 그런 아이러니한 의미의 생명을 믿어, 시인이 소개하는 시 한 편과 그 시 속의 이야기들을 준비했습니다. 당분간 매주 연재합니다. 마음 놓고 독자인 당신의 마음의 행로를 뒤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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