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본문바로가기

동아사이언스

장마 생각

통합검색

장마 생각

2016.07.02 18:00

해마다 이맘때면 반갑지 않은 손님, 장마가 찾아온다. 바야흐로 여름의 전주곡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온이야 장마 이전이라도 올해처럼 기상이변의 폭염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습도는 높지 않아서 뜨거운 볕만 피하면 큰 더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의 장마철부터는 체감이 전혀 다르다.

 

pixabay 제공
pixabay 제공

초청장도 없이 눅눅한 회색 망토를 펄럭이며 남쪽 하늘에서 날아온, ‘장마’라는 이름의 불청객은 양지든 음지든 가리지 않고 마치 떠들썩한 함진아비 일행의 소란처럼 이 땅의 동네방네에 온통 분무(噴霧)를 흩뿌리며 방문해서는 보름이든 달포든 집 안팎을 무뢰한처럼 제멋대로 들락거린다.


이튿날이면 중부지방에도 장마가 당도한다는 예보가 주요 뉴스로 오른 날 오후가 되자 갑자기 한 자락의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초록으로 짙어진 나뭇잎들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날은 마치 방금 불 꺼진 아궁이에 걸린 가마솥에서 천천히 식어가는 곰국처럼 후끈한 눅눅함만이 사방의 공기를 채웠다. 그리고 이튿날이 되자 예보대로 너울 같은 바람이 먼저 불어치더니 우리 동네에도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행인들의 머리 위로 하나씩 접시꽃 같은 우산들이 펼쳐졌다.


오늘날은 흔하디흔한 게 천우산(布雨伞)이지만 나의 유년을 떠올려보면 요즘은 보기 드문 비닐우산이 많았다. 주룩주룩 비 오는 날, 대나무 살에 하늘색 비닐을 씌워 만든 그것을 펼치고 있노라면, 얇은 비닐 위에서 튕기는 빗방울 소리가 경쾌한 타악기 소리가 되어 귓전에 울렸다.


까닭 모르게 나는 그 소리가 좋아, 굵은 장맛비가 내리는 날이면 종종 비닐우산을 펼쳐 들고 마당 한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아 투두둑투두둑하는 빗소리를 들었다. 그것을 ‘식물성의 감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그것은 바람에 실려 온 장맛비를 맞으며 온통 잎사귀들을 흔들며 기뻐하는 여름 나무들 같은 천진한 몸짓이 아니었을까. 그런 욕구와 행위가 모든 성장기의 특권이 아닐까.

 

pixabay 제공
pixabay 제공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청춘’의 한창때였던 청소년기에는 ‘우산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폭우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거센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이면, 평소와 다르게 하굣길의 시내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괜스레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흠뻑 맞으며 부러 보도블록 웅덩이에 이미 젖은 신발을 내디뎌 이십 리 길을 천천히 걸어서 귀가하던 날들도 장마기였다.


그랬던 이유는 기억에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굳이 인과관계를 생각해보자면 그해 장마철의 그날 하교 시간에 시원스레 장대비가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이 자주 하는 말, “그냥……”은 태곳적부터 우리에게 유전된 통과의례로서의 ‘청춘의 심리’일 것이다.


그렇게, 비닐우산 위에서 튕기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물장구를 쳤던, 그리고 찰박찰박 웅덩이에 내딛던 발이 젖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던 인생의 청춘기가 지나고, 그 후 먼 훗날, 오래 묶여 있던 접이 우산처럼 세월의 주름 골짜기가 깊어지는 나에게 이제 장마는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기에 그리 반갑지 않은 자연현상이다.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차선(次善)이 아니라 차악(次惡)을 선택해야 할 세상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일까. 올해의 장마는 그리 싫지만은 않다. 장마철이기에 단골 맥줏집의 팝콘과 내 몸과 마음이 눅눅해지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올해 장마가 시작되면서 이번 봄부터 내내 유난히 심했던 미세먼지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가령, 장마와 미세먼지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엉뚱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면 아마도 전자에 기표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상당수이지 않을까. 그것은 그야말로 차악(次惡)의 선택이겠지만, 그래도 물방울 입자인 습기가 화석 연료 가루가 대부분이라는 미세먼지보다 생활과 건강에 덜 해롭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주
뉴스를 보다보면 무엇인가를 분석해서 설명을 해주는 내용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야 원인을 정확하게 찾고,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고개를 들어 사물을 그대로 보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면 분석한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생활의 시선’을 매주 연재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천천히 읽으면서 감정의 움직임을 느껴보세요.

이 기사가 괜찮으셨나요?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댓글 0

14 + 3 = 새로고침
###
    과학기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소개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고발 소재 등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제보하기

    관련 태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