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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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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의 발견

2016.07.09 18:00

집집마다 개개인마다 오래된 것 몇 가지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웃고 울던 날들의 손때에 얼룩진 가구 같은 물건이든, 봄의 끝 무렵에 꽃 피는 철쭉 같은 식물이든, 우리 국민 인구의 5분의 1을 넘어섰다는 반려동물이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래되었다’는 느낌은 ‘그것’의 수명(?)과 쓰임새와 가치를 가늠하는 이의 추억과 정감의 정도에 따라 주관적으로 다르게 여겨질 것이다.

 

pixabay 제공
pixabay 제공

지난 5월의 어느 날은 20년 전에 내가 혼례식을 올린 날이었다. 수년 전, 그날의 동영상 앞에 앉아 있던 딸아이 때문에 우연히 다시 보게 된 비디오 속 등장인물 중 선친을 비롯한 몇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화면 속에서는 모두가 당시의 나이에 멈춰 활짝 웃고 있었다. 그날은 신랑도 신부도 만개했던 만큼 우리 부부에게는 각별한 날이었고 그렇게 새로운 한 가정이 뿌리내린 날이었다.


그 봄날, 부부가 된 우리는 맥줏집을 빌려 지인들과의 별도 피로연까지 마치고 무궁화호 열차와 난생 처음 타본 여객기에 올라 제주도에 착륙했다. 그리고 허름한 콘도에서의 첫날밤, 신부는 배낭에서 꺼낸 잠옷을 신랑에게 건넸다. 폴리에스테르 소재의 베이지색 쌍둥이 잠옷이었다.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자마자 낮부터 과음했던 술이 여태 깨지 않아 곧바로 무거운 짐짝을 부려놓듯 내 몸뚱이를 벌목되는 나무처럼 침대에 쓰러뜨렸다.


그 후, 달력 스무 권, 따져보니 144장의 낱장 달력이 세월 뒤편으로 뜯겨 나가고, 그날의 부부는 20주년을 맞아 2박 3일간 남해와 지리산을 여행했다. 남해 최남단의 작은 콘도에서 짐을 풀고 우리는 화이트 와인 한 병과 문어숙회와 라면을 끓여 먹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20년 전 그날의 잠옷이었다. 무수히 세탁했건만 잠옷은 잘 낡지 않는 재질 때문이었는지 색바램도 없이 그 시절의 내 마음처럼 여전했다. 면 소재와 달리 서늘한 촉감이 불편해 자주 착용하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지만 시간을 20년 전으로 되돌려놓은 듯해 새삼스러웠다.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새삼스럽다’는 말은 익숙한 것을 경험할 때 갑자기 새롭게 느껴지는 감정을 뜻한다. 그저 뻔하고 친숙했던 것에서 왜 느닷없이 이례적인 다른 느낌이 찾아오는 것일까. 그것은 그 ‘자체’에서 갑자기 새로운 무엇이 발생하여 알아차려지는 게 아니라, 기존에도 이미 있었지만 내내 간과했기에 느끼지 못했던 본질적 면모일 터이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에 우연히 발견한 무엇이다. 마치, 식구가 모여 쟁반 위에 썰어놓은 수박을 먹을 때, 수박의 끄트머리 삼각뿔 조각을 먼저 집는 사람이 그 부분이 더 맛있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철이 든 후에야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새삼스런 발견’의 의미가 징검다리를 건너 ‘일상의 창의성’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간다. 하고많은 일과 생활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창의적 발상은 바로 ‘새삼스런 발견’에서 시작될 때가 많지 않을까. 그 분야가 예술이든 과학이든 농어업이든 제조업이든 서비스업이든 말이다. 그리고 빤하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세상의 많은 일들은 마치 레고 같은 조립식 블록 완구 같아서 그 고착된 구조를 해체해 발상을 바꿔 재조직하면 전혀 새로운 무엇이 되어 주변을 놀라게 하는 경우를 우리는 가끔 보게 된다.


그렇듯, 익숙한 것들에 내재한 ‘개방된 속성’을 발견하는 것, 기존의 정체에서 또 다른 다양한 가능성을 여는 것은 ‘새로운 무엇’을 잉태하기 마련이다. 고질화된 안대를 벗어버리고 생각의 블록들을 유연하게 확장해서 다시 연결하다 보면 불현듯 뜻밖의 무엇이 눈앞에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느껴지는 감정이 ‘새삼스런 발견’의 신선한 희열이 아닐까. 그런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보면, 구태의연한 생활 태도야말로 참 무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주
뉴스를 보다보면 무엇인가를 분석해서 설명을 해주는 내용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야 원인을 정확하게 찾고,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고개를 들어 사물을 그대로 보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면 분석한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생활의 시선’을 매주 연재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천천히 읽으면서 감정의 움직임을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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