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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하이젠베르크는 왜 보어를 방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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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하이젠베르크는 왜 보어를 방문했을까

2016.07.19 11:00

100퍼센트의 진리는 없으며, 모든 것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서로 뒤섞여 있다.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독일에서는 자네의 지도 아래 원자력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모든 일들이 진행되고 있고, 자네가 그 일을 완전히 꿰고 있기 때문에 세부적인 논의는 필요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리고 자네는 지난 2년 동안 그 일에 전념했다고.
- 1957년 보어가 하이젠베르크에게 쓴, 부치지 않은 편지에서


대부분의 독일 과학자들은 나치와 함께 일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조차도 있는 힘을 다해서 이 범죄자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 막스 보른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인이 우라늄 폭탄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들은 모두 이류밖에는 안되겠지요. 가엾은 하이젠베르크.
- 오토 한,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영국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듣고 나서.

 


어떤 직업에 어울리는 얼굴이 있다는 말은 외모에 대한 편견을 뜻하겠지만 그래도 이를 무시하고 배역을 캐스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연기자 가운데 학자에 어울리는 사람을 꼽으라면 남명렬 씨가 1순위 아닐까. 실제 남 씨는 한 제약회사의 광고에서 학자의 풍모를 여지없이 보여주며 약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얼마 전 신문을 뒤적거리다 남 씨의 사진이 있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훑어보니 남 씨가 ‘코펜하겐’이라는 연극에 출연하는데 이번이 세 번째라고 한다. 그만큼 적임자라는 말이다. ‘덴마크 수도가 제목이라... 무슨 얘기지?’ 궁금한 마음에 기사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연극의 소재가 과학 그것도 20세기를 풍미한 양자물리학이 아닌가.


남명렬 씨가 맡은 역할은 양자역학의 대부인 닐스 보어다. 사실 외모로만 보면 얼굴이 길쭉하고 풍채가 좋은 보어가 떠오르지는 않지만(오히려 하이젠베르크 역을 맡은 서상원 씨가 더 맞을 것 같다) 이론물리학자로서는 잘 어울렸다.

 

1941년 이론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의 만남을 소재로 한 연극 ‘코펜하겐’이 상연되고 있다. 출연진으로 왼쪽부터 남명렬(보어), 이영숙(마그리트), 서상원(하이젠베르크). - 극단 청맥 제공
1941년 이론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의 만남을 소재로 한 연극 ‘코펜하겐’이 상연되고 있다. 출연진으로 왼쪽부터 남명렬(보어), 이영숙(마그리트), 서상원(하이젠베르크). - 극단 청맥 제공

전쟁이 갈라놓은 우정


연극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독일 이론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1941년 9월 코펜하겐에 있는 보어를 방문했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대선배(16세 연상)이자 오랜 동료이고 두 사람은 1920년대 후반 ‘코펜하겐 해석’을 내놓으며 아인슈타인을 제치고 양자역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런데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두 사람 사이도 멀어지기 시작했고 1940년 덴마크가 독일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불편한 사이가 돼버렸다. 그런 와중에 뜬금없이 하이젠베르크가 보어를 방문한 것이다.


연극은 이미 고인이 된 세 사람(보어의 부인 마그리트(이영숙)를 포함해서)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사이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 이 방문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과거와 교차하며 그리고 있다. 당시 하이젠베르크는 원자력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의 방문은 이와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보어는 수년 전 미국에 머물 때 존 휠러와 함께 우라늄 핵분열에 대한 이론연구를 수행했는데 흥미로운 결론에 이르렀다. 즉 핵분열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려면 우라늄235를 농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라늄 광석은 99% 이상이 우라늄238이고 이런 상태에서는 중성자가 흡수되면서 반응이 멈추게 된다. 두 사람은 1939년 발표한 논문에서 당시 기술로 우라늄 광석에서 1% 미만인 우라늄235를 분리농축해서 폭탄을 만들 정도의 충분한 양을 얻으려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결론내렸다.


따라서 보어는 이 문제에 대해 원론적인 차원 이상의 의견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보어로서는 아끼던 후배였지만 이제 원수의 나라의 국민이면서 그 나라를 위해 연구를 하는 상태에서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상황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연극은 두 사람, 특히 하이젠베르크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다양한 관점에서 그리고 있는데 옛날 같았으면 어쨌든 하이젠베르크에게 공감할 수는 없다고 말했겠지만 필자도 나이가 먹다보니 나름 갈등이 컸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즉 평생 지적 호기심을 원동력으로 살아온 그에게 원자폭탄이 실현가능한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본인이 최초로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현실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인 동시에 그렇게 해준 권력이 나치라는 혐오스런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성공은 곧 나치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걸 의미한다.


연극은 영국 작가 마이클 프레인이 1998년 발표한 동명의 희곡이 원작이다. 같은 해 영국에서 초연됐고 토니상, 몰리에르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된 인기작이다. 연극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 방문을 조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 보고 난 뒤에도 상황이 명쾌히 정리되지 않았다. 정말 하이젠베르크는 왜 보어를 만났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이젠베르크가 의도적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회피한 것일까 아니면 능력이 안 돼서 실패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1934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컨퍼러스에 참석한 하이젠베르크(왼쪽)와 보어. 이들은 부자와도 같은 친밀한 사이였다.
1934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컨퍼러스에 참석한 하이젠베르크(왼쪽)와 보어. 이들은 부자와도 같은 친밀한 사이였다.

방문도 불확정성의 원리로 설명?


필자는 연극을 보기 전에 먼저 희곡을 읽어보려고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봤지만 아쉽게도 번역돼 있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원서 이북을 사서 다운받아 읽어봤다. 희곡의 대화를 통해 1941년 하이젠베르크가 왜 보어를 만나러갔는지 알아보자. (본문 인용은 연극 대사가 아니라(녹음을 못했다) 필자가 희곡을 번역한 것이다.) 참고로 연극에서는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의 집을 방문해 담소를 나누다 두 사람이 산책을 나갔고(도청을 피하기 위해) 이때 나눈 대화가 논의의 중심이다.


장면1. (사자(死者)들의 대화)
하이젠베르크: 전 단순히 선생님에게 물리학자가 원자에너지를 실제적으로 이용하는 연구를 할 도덕적 권리가 있는지 여쭤봤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보어: 기억이 안 나네.
하이젠베르크: 기억을 못하신다니. 아닙니다. 선생님은 바로 경계하셨어요.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멈추셨죠.
보어: 난 두려웠으니까.
하이젠베르크: 두려웠다고요. 그렇다면 기억하시는군요. 선생님은 두려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서 계셨죠.
보어: 왜냐하면 그 질문이 뜻하는 바가 뻔했거든. 자네가 그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하이젠베르크: 그리고는 제가 히틀러에게 핵무기를 만들어주려고 애쓰고 있다고 결론지으셨죠.
보어: 그러지 않았나!
하이젠베르크: 아닙니다! 저희가 만들려고 했던 건 원자로였어요! 전력을 생산하고 선박을 움직이는 장치죠!


즉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에게 과학자의 윤리에 대한 원론적인 물음을 던졌을 뿐인데 보어가 확대해석해 대화가 끊어지고 어색한 상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이젠베르크가 적국(연합군)의 원자폭탄 연구현황에 대해 알아보려고 방문했다는 설명이 있다.
 

장면2. (1941년 대화 장면)
하이젠베르크: 스톡홀름 신문을 보니 미국에서 원자폭탄 연구를 한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보어: 아. 이제 나오는군. 이제 나와. 이제야 모든 걸 알겠어. 자네는 내가 미국인들과 연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이젠베르크: 아마도요. 가능한 일이죠. (독일) 점령지 유럽에서 누군가가 있다면 바로 선생님이겠죠.
보어: 그래서 자넨 연합국의 핵 프로그램을 알고 싶은 거고.
하이젠베르크: 전 다만 그런 게 있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약간의 힌트 약간의 실마리만이라도. 전 방금 조국을 배신하고 제 목숨을 걸고 선생님께 독일의 프로그램을 말씀드렸습니다...
보어: 그럼 이제 내가 보답을 할 차례라는 말인가?
하이젠베르크: 선생님, 전 알아야만 해요! 전 결정을 해야만 하는 책임자입니다! 연합국이 폭탄을 만들고 있다면 전 제 조국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다음으로 양 진영이 핵개발을 중단할 수 있게 보어가 중재를 맡아달라고 요청하러 왔다는 설명이 있는데 설득력은 약하다.
 

장면3. (사자들의 대화)
하이젠베르크: 하지만 선생님은 그들에게 얘기해볼 수 있었어요!
보어: 뭘 말인가?
하이젠베르크: 1941년 제가 말씀드린 것 말이죠! 선택은 우리들 손에 달려있다는 걸요! 저와 오펜하이머의 손에! 나치가 제게 물을 때 제가 단순한 진실을 얘기할 수 있다면 오펜하이머도 실망스러운 진실을 얘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보어: 자네가 내게 원하는 게 이건가? 미국인들이 뭘 하는가를 말해주는 게 아니라 멈추게 하라는 것?
하이젠베르크: 우리 둘 다 멈출 수 있다는 걸 말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보어: 난 미국인들과 접촉이 없었어!
하이젠베르크: 영국사람들과는 있었잖아요!


어쩌면 하이젠베르크는 뛰어난 옛 동료 대다수가 주변을 떠난 가운데(유태인이므로) 잘 나가는 자신을 자랑할 사람이 없어 보어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장면4. (사자들의 대화)
마그리트: 미안해요. 하지만 그게 하이젠베르크가 여기 온 진짜 이유는 아니잖아요. 그 사람은 자신이 비밀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걸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던 거예요. 그럼에도 자신이 고상한 도덕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도요. 게슈타포에게 감시받고 있음에도 말이죠. 그 덕분에 지금 너무나 중요한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죠.

 

1956년 출간된 덴마크어판 로베르트 융크의 책 ‘태양 천 개보다도 더 밝은’에 실린, 1941년 방문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설명을 보고 격분한 보어는 이듬해 하이젠베르크에게 편지를 썼지만 부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1998년 하이젠베르크에 호의적인 면이 있는 연극 ‘코펜하겐’이 화제가 되면서 2002년 편지가 공개됐다. 보어의 구술을 아내 마그리트가 받아썼다.
1956년 출간된 덴마크어판 로베르트 융크의 책 ‘태양 천 개보다도 더 밝은’에 실린, 1941년 방문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설명을 보고 격분한 보어는 이듬해 하이젠베르크에게 편지를 썼지만 부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1998년 하이젠베르크에 호의적인 면이 있는 연극 ‘코펜하겐’이 화제가 되면서 2002년 편지가 공개됐다. 보어의 구술을 아내 마그리트가 받아썼다.

원자로 개발로 방향 잡아


집에 돌아온 필자는 거의 20년 전에 읽은 하이젠베르크의 전기를 꺼내들었다. 아르민 헤르만이라는 과학사가가 쓴 전기로 필자 기억에 하이젠베르크가 시간을 끌며 연구를 회피했다는 식으로 서술했던 것 같다. 다만 코펜하겐 방문 건은 읽은 기억이 없는데, 씁쓸하게도 중간쯤 ‘읽어버린 낙원’이라는 제목의 장에 이 에피소드가 있다.


19년 만에 ‘다시’ 읽어보니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평가는 필자의 기억이 대충 맞았다. 즉 하이젠베르크는 당시 기술로 우라늄235을 분리농축해 폭탄을 만든다는 건 현실성이 없다고 믿었고 대신 플루토늄 폭탄(나가사키에 떨어진 종류)을 만들 가능성은 있다고 봤지만 이를 나치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에너지 생산을 위해 원자로를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유도해 연구를 진행했다. 희곡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장면을 보자.


장면5.
하이젠베르크: 진짜 결정의 순간입니다. 1942년 6월이에요. 코펜하겐을 다녀오고 아홉 달이 지났죠. 히틀러는 즉각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는 연구는 다 중지시켰습니다. 이때 알베르트 슈페어 혼자 평가를 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원자로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첫 신호를 얻었죠. 처음으로 중성자가 늘어난 겁니다. 13퍼센트로 증가폭이 크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시작이니까요.
보어: 1942년 6월? 시카고의 페르미보다(1942년 12월) 약간 더 빨랐군.
(중략)
마그리트: 당신은 슈페어에게 연구비를 계속 대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나요?
하이젠베르크: 원자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요? 물론 그랬습니다. 하지만 슈페어가 프로그램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만을 요청했죠.
마그리트: 원자로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고 얘기했나요?
하이젠베르크: 원자로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슈페어에게는 안했죠. 원자로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보어: 대단한 생략이군. 자네 말을 받아들여야겠지.


그럼에도 글 앞에서 인용한, 막스 보른(하이젠베르크가 스물두 살에 행렬역학을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멘토다)의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하이젠베르크가 과연 고의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원자로 연구도 결국은 플루토늄 농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하이젠베르크도 “어쩌면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만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이젠베르크는 당시 미국에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만일 알았다면 원자로 연구를 대규모 연구비가 투입될 수 있는 ‘긴급수준’으로 격상해야 한다고 건의했을지도 모른다. 저자 헤르만은 전기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양심의 영역에는 ‘백 퍼센트의 진리는 없으며, 모든 것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서로 뒤섞여 있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아무튼 당시 나치 권력 핵심부는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이젠베르크를 압박하지 않았다.

 

1945년 4월 미국의 특수부대 ‘알조스’는 독일 하이걸로흐의 산 속 지하실에 있는 우라늄 원자로를 접수한 뒤 해체했다. 당시 독일은 연쇄반응에 들어가는 수준이었지만 안전장치가 미비해 만일 더 진행됐더라면 오히려 위험했을 상황이었다.
1945년 4월 미국의 특수부대 ‘알조스’는 독일 하이걸로흐의 산 속 지하실에 있는 우라늄 원자로를 접수한 뒤 해체했다. 당시 독일은 연쇄반응에 들어가는 수준이었지만 안전장치가 미비해 만일 더 진행됐더라면 오히려 위험했을 상황이었다.

연극에 반발해 보어의 미발신 편지 공개


아무래도 책이 오래 된 거라(원서는 1976년 출간) 새로운 내용이 있나 해서 인터넷에서 하이젠베르크의 1941년 방문에 대해 검색하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즉 프레인의 ‘코펜하겐’이 화제가 되면서 연극을 본 사람들 다수에서 하이젠베르크를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쪽으로(필자처럼) 분위기가 흐르자 2002년 보어의 자손들은 소장하고 있던 보어의 미공개 편지를 공개했다.


편지는 1957년 쓴 것으로 1941년 하이젠베르크 방문에 대한 보어의 기억이 직설적으로 표현돼 있다. 홧김에 편지는 썼지만 막상 부치려다보니 하이젠베르크가 너무 큰 상처를 입을 것 같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보어는 왜 16년이나 지나서 이런 편지를 쓸 생각을 했을까.


1956년 오스트리아의 언론인 로베르트 융크는 맨해튼프로젝트와 독일원자폭탄프로젝트에 대한 책 ‘태양 천 개보다도 더 밝은’을 출간했다. 이 책을 읽고 하이젠베르크는 저자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서 하이젠베르크는 1941년 보어를 방문했을 때 과학자가 핵무기를 연구하는 게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전달이 안 된 상태에서 대화가 끊어졌다고 언급했다.


융크는 덴마크어판을 낼 때 이 부분을 추가했고 그 결과 하이젠베르크가 도덕적인 기반에서 독일의 원자폭탄프로젝트를 일부러 지연시킨 것 같은 인상을 줬다. 보어는 책을 읽고 격노했는데, 그의 기억에 당시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을 위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상황에 대해 매우 만족해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듬해 보어가 하이젠베르크에게 쓴, 그러나 차마 보내지는 못한 편지의 일부다.

 

하이젠베르크에게,
최근 덴마크어로 출간된 로베르트 융크의 ‘태양 천 개보다도 밝은’을 읽고 나서 자네에게 이 말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네. 덴마크어판에 발췌돼 있는, 자네가 저자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자네 기억이 자네 자신을 얼마나 속이고 있는지 놀라울 지경이군.
(중략)
나 역시 연구소(보어가 소장으로 있던 코펜하겐 이론물리연구소) 내 방에서 있었던 우리의 대화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네. 자네의 모호한 용어 사용은 나에게 오히려 더 확고한 인상을 심어주었지. 독일에서는 자네의 지도 아래 원자력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모든 일들이 진행되고 있고, 자네가 그 일을 완전히 꿰고 있기 때문에 세부적인 논의는 필요없다고. 그리고 자네는 지난 2년 동안 그 일에 전념했다고.
(중략)
난 자네가 우리가 고생하고 있지 않다는 걸 스스로에게 확신시키고 만일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 경우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도와주려고 우리를 방문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네.


즉 하이젠베르크가 옛정을 생각해서 독일 점령 이후 유태인인 보어의 신변에 문제가 있을까 걱정해 방문한 것이지 독일원자폭탄프로젝트에 있어서는 망설임 없이 전력을 다해 연구에 매진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독일이 미국에 뒤진 건 실력이 안 돼서다.


독일이 연합군에 점령된 뒤 원자폭탄프로젝트에 관여한 10여명의 과학자들은 영국으로 보내져 여덟 달 동안 구금됐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듣고 나서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오토 한(1938년 핵분열을 처음 발견한 독일화학자)은 이렇게 한탄했다.


“미국인이 우라늄 폭탄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들은 모두 이류밖에는 안되겠지요. 가엾은 하이젠베르크.”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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