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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 명이 사망한 ‘난징 대학살’을 기억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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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 명이 사망한 ‘난징 대학살’을 기억하나요?

2016.08.09 20:00

※편집자주: ‘피스&그린보트’는 한국의 환경재단과 일본의 비정부기구(NGO)인 피스보트가 함께 주최하는 환경과 평화, 공존을 위한 아주 특별한 여행입니다. 2005년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첫 돛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약 8000여명의 한일 시민들이 환경과 평화, 인간 공존을 위한 다양한 체험과 교류를 하며 국적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2016년엔 9회를 맞이하여 지난 7월 30일부터 8월 7일까지 8박 9일의 일정을 마쳤는데요, 혼자만 알기엔 아쉬운 피스&그린보트와의 의미 있는 추억을 지금부터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중국 장쑤성 난징시에 위치한 난징대학살기념박물관.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 이곳을 피와 눈물로 얼룩진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 김효정에디터 제공
중국 장쑤성 난징시에 위치한 난징대학살기념관.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 이곳은 피와 눈물로 얼룩진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 김효정 에디터 제공

  

“집은 불 타고 있었고, 그 안에서 남동생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깊게 주름진 얼굴의 노인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에게 1937년 12월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잊어서도 안될 악몽이었으며 씻을 수 없는 상처였고 그것은 곧 우리 모두의 슬픔이 되었다. 난징대학살. 책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그날의 비극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생존자의 이야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6주만에 30만명이 사망한 최악의 대학살


“난징성을 침략한 일본군들이 중화문을 포함한 각 성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차별적인 살해와 방화가 자행되었죠. 어머니는 저희 형제들을 데리고 난징 동굴로 도망을 가셨는데 남동생 한 명이 집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알아채고 돌아갔지만 이미 불타고 있는 집에서 동생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그 비명은 이내 잦아들었습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동생을 잃었습니다. 여동생은 무차별 총격에 의해 아직까지도 총탄 자국이 턱에 남아 있습니다.”

 

난징대학살 당시 13살이었다는 생존자. 8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제공
난징대학살 당시 13살이었다는 생존자. 8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제공

난징대학살기념관은 난징에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사망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1985년 8월에 건립됐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 동안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 됐는데 당시 일본군의 점령이 너무 빨라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난징에 남아있었던 인구가 50~60만 명 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남겨진 중국인들 매일 이어지는 폭격 속에서 살았고, 비가 오는 날에야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비 오는 날은 비행기가 뜰 수 없어 폭격이 잠시 중지 되었기 때문이란다. 중국인들이 흘렸을 눈물만큼, 아니 그 보다 더 많은 비가 내렸다면 희생자들이 조금은 적어졌을까. 마음이 무거워 지는 순간이었다.  

 

강가로 모인 중국인들은 이유도 없이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 김효정에디터 제공
강가로 모인 중국인들은 이유도 없이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 김효정 에디터 제공

 

전시장 곳곳에는
전시장 곳곳에는 '300000'이라는 숫자가 각인되어 있다. 이는 난징대학살의 사망자 수이다. - 김효정 에디터 제공

 ●끝이 없는 잔인함, 중국인 100명 참수 경쟁


일본군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중국인을 학살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난징 내에 남아있는 국민당을 축출한다는 명목으로 성인 남성들을 학살했던 내용이다. 군인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 손에 총을 쏠 때 생기는 굳은살이 있거나, 모자를 오래 썼던 흔적이 있는 사람들을 강가에 모아 기관총을 겨눴고 이마저도 총알이 아깝다는 이유로 생매장, 혹은 수류탄을 사용해 집단 학살했다.

 

실제 학살에 사용되었던 수류탄. - 김효정에디터 제공
학살에 사용되었던 수류탄. - 김효정 에디터 제공

일본도를 사용하여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하는지 시합했던 일본장교 무카이(向井)와 노다(野田)는 언론에 대서 특필되기도 하였는데, 마치 스포츠를 중계하듯 일간지에 보도 되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들은 전후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당했으나 죽는 순간까지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여성들에 대한 잔인함도 극에 달했는데, 2만~8만 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고 살해를 당했다. 이 중엔 임신중인 여성들도 있었다.

 

무카이와 노다의
무카이와 노다의 '100인 참수 경쟁'의 기사가 실린 신문지면.  - 김효정 에디터 제공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의 스승으로 삼자"


기념관 곳곳에는 그 날의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한 각오와 평화를 위한 메시지가 적혀있었고, 엄숙하게 희생자를 추모했다. 또한 가해 일본군과 중국인 희생자, 생존자들의 데이터가 색상 별로 분류되어 배치돼 있었다. 1층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두꺼운 파일들이 그 날을 잊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 하는 듯 했다.

 

엄청난 규모의 데이터베이스. 신원이 파악된 희생자, 생존자, 가해자들의 정보가 빼곡히 담겨있다. - 김효정에디터 제공
엄청난 규모의 데이터베이스. 신원이 파악된 희생자, 생존자, 가해자들의 정보가 빼곡히 담겨있다. - 김효정 에디터 제공

생각해보니 난징대학살은 까마득한 과거가 아닌,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래서 더욱 참담했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잊혀진 채 전쟁이란 이름 아래 사라져갔던 중국인들을 위해 잠시 묵념했다. 그리고 기념관 한 쪽 벽면에 적혀있는 메시지를 중얼거리며 읽었다.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의 스승으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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