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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혈액형 O형이라면 특히 조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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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9월 07일 16:00 프린트하기

처음에 그녀는 그를 거의 못 알아볼 뻔했다. 단 몇 시간 만에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다니 상상조차 힘든 일이었다. 그는 심지어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주검처럼 보였다.
- 서머싯 몸, ‘인생의 베일’에서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의 소설 ‘인생의 베일’은 자기밖에 모르던 철없는 아가씨가 애정없는 결혼과 이어지는 불륜,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을 겪으며 성숙한 여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2006년 영화로 만들어졌고 이듬해 국내에서 원제를 그대로 쓴 ‘페인티드 베일(The Painted Veil)’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다.

 

콜레라가 주요 모티브인 서머싯 몸의 장편 ‘인생의 베일’은 2006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 유니코리아 제공
콜레라가 주요 모티브인 서머싯 몸의 장편 ‘인생의 베일’은 2006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 유니코리아 제공

아버지가 변호사인 영국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키티 가스틴은 자라면서 미모가 눈에 띠었다. 어머니는 그런 딸 덕을 보려고 일찌감치 키티를 사교계에 내보냈지만 ‘기대 수준’에 맞는 신랑감은 나타나지 않아 세월만 보내자 모녀는 초초해진다. 결국 키티는 파티에서 만난 소심남 월터 페인의 청혼을 충동적으로 받아들인다. 페인은 영국령 홍콩(시대배경은 1920년대다)의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세균학자로 휴가차 영국에 머물다 파티에서 키티를 보고 한 눈에 반했다.


이국적인 홍콩에서 낭만적 삶을 꿈꾸던 키티 페인은 막상 현지의 따분한 상황에 환멸감을 느끼고 놀 줄 모르는 일중독자 남편을 경멸한다. 물론 월터가 자신을 애지중지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한 번도 그를 사랑한 적이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이런 중에 고위 공무원(홍콩 총독부 차관보) 찰스 타운젠트를 알게 된다. 마흔한 살 유부남인 찰스는 185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파란 눈, 감미로운 목소리로 키티를 사로잡고 둘은 바람을 피운다.


하루는 대낮에 집으로 찰스를 끌어들여 밀회를 즐기는데 마침 남편이 집에 들렀고 상황을 눈치챈다. 며칠 뒤 월터는 키티에게 콜레라가 돌고 있는 중국 메이탄푸의 병원 책임자로 자원했다고 알린다. 그러면서 자기를 따라가지 않으면 간통 고소장을 내겠다고 말한다. 키티는 어이없어하며 찰스를 찾아가지만 “아내와 이혼하고 당신과 결혼하겠다”라는 말 대신 “문제를 만들지 말고 남편을 따라가라”는 냉정한 반응에 경악한다.


결국 키티는 콜레라가 창궐하는 곳으로 왔고 처음에는 공포로 정신을 못 차렸지만 며칠 뒤 병원 겸 고아원 역할을 하는 수녀원을 방문해 깨달음을 얻고 그곳에서 자원봉사까지 하게 된다. 키티의 변화로 월터의 분노가 좀 누그러지는 와중에 키티가 쓰러졌지만 다행이 콜레라는 아니고 임신이었다.


“당신 얼마나... 언제 출산 예정이지?”
“두 달에서 세 달 정도 된 것 같아요.”
“내가 아이 아버지인가?”
“모르겠어요.”


예전이라면 “그걸 말이라고 해요?” 같은 거짓말로 넘기겠지만 수녀들과 지내며 ‘정화된’ 키티는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남편이 귀가하지 않아 먼저 자던 키티는 새벽에 찾아온 사람들로부터 월터가 콜레라로 생명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는다. 전날 아침 집을 나설 때까지도 멀쩡했던 사람이 사경을 헤맨다니 믿을 수 없었다.


“오늘 오후에, 그러니까 어제 오후죠, 병세가 나타났답니다.”
“왜 즉시 저를 부르지 않았나요?”
“부인의 남편은 당신이 콜레라에 걸린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건 끔직하고 역겨운 광경입니다. 박사님은 부인이 그걸 보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중증 콜레라 환자의 ‘쌀뜨물’ 설사. 이런 식으로 체내 수분과 전해질이 다량 빠져 나가면 24시간 내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 위키피디아 제공
중증 콜레라 환자의 ‘쌀뜨물’ 설사. 이런 식으로 체내 수분과 전해질이 다량 빠져 나가면 24시간 내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 위키피디아 제공

● 콜레라독소가 소장을 공격


키티가 남편을 봤을 때는 글 앞에 인용한 것처럼 이미 산송장 상태였다. 결국 월터는 간신히 몇 마디를 하고 숨을 거둔다. 그런데 누군가 월터는 환자를 치료하다 감염된 게 아니라 실험을 하다가 감염된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즉 아내의 임신에 충격을 받고(자신의 아이가 아닐 거라는 절망감에) 자살의 방법으로 택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무튼 월터가 콜레라로 죽는 건 이야기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임에도 불과 몇 페이지 분량으로 간단하게 처리되고 있다. 소설가로서의 한계일까.


전업작가가 되기 전 서머싯 몸의 직업은 의사였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이처럼 간단하게 묘사했을 수도 있다. 실제 콜레라 진행이 그만큼 빠르기 때문이다. 즉 월터의 경우처럼 증상이 나타나고(주로 설사) 24시간도 안 돼 사망할 수도 있는 전염병이 바로 콜레라다.


지난 8월 23년 15년 만에 국내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한 뒤 현재 네 명의 환자가 보고됐다. 이 가운데 세 사람은 동일한 유형의 콜레라균에 감염된 것으로 보이고 9월 3일 확증된 네 번째 환자는 유전자지문 분석결과 다른 유형으로 밝혀졌다. 상하수도 시설이 열악한 지역에서나 발생하는 줄 알았던 콜레라가 우리나라에서 보고됐으니 좀 뜻밖이긴 하다. 그러고 보니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콜레라 얘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콜레라는 콜레라균(학명 Vibrio cholerae)이 일으키는 소화기 질병이다. 대표적인 증상이 설사로 일반적인 배탈이 났을 때 설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증상이 나타나고 불과 하루 사이에 무려 10~20리터를 쏟아낸다. 따라서 설사처럼 보이지도 않아 ‘쌀뜨물(rice water)’라고 부른다.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환자는 극도의 탈수와 전해질 불균형으로 정신이 혼미해지고 사망에 이른다. 소설 속 월터의 케이스다. 그렇다면 콜레라균은 어떻게 이처럼 순식간에 사람을 초토화시킬까.


콜레라균의 작용 메커니즘은 연구가 많이 됐고 따라서 ‘미생물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런데 이를 들여다보면 좀 허탈해진다. 이중삼중 정교한 방어체계를 구축해놓은 인체가 미미해 보이는 공격에 어처구니없이 자멸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콜레라독소의 작용 메커니즘. 콜레라균이 분비한 독소는 소장 세포 표면의 분자(GM1)에 달라붙고 A단백질(파란 공)이 세포 안으로 들어간다. A단백질은 아데닐사이클라아제를 활성화해 cAMP를 많이 만들게 하고 그 결과 세포와 혈액에서 이온과 물이 장내강으로 분비돼 몸은 극심한 탈수 및 전해질불균형 상태가 된다. - 위키피디아 제공
콜레라독소의 작용 메커니즘. 콜레라균이 분비한 독소는 소장 세포 표면의 분자(GM1)에 달라붙고 A단백질(파란 공)이 세포 안으로 들어간다. A단백질은 아데닐사이클라아제를 활성화해 cAMP를 많이 만들게 하고 그 결과 세포와 혈액에서 이온과 물이 장내강으로 분비돼 몸은 극심한 탈수 및 전해질불균형 상태가 된다. - 위키피디아 제공

음식이나 물을 섭취할 때 들어온 콜레라균은 다른 세균처럼 위에서 위산에 두들겨 맞아 죽는다. 그러나 개체수가 많을 경우 소수가 살아남아 소장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전열을 가다듬고 증식을 한 뒤 소장벽 세포의 융모에 달라붙어 작업을 시작한다. 즉 콜레라독소를 내놓는다. 콜레라독소는 AB5라는 단백질복합체다. 즉 A단백질 하나와 B단백질 다섯 개로 이뤄진 분자다. B단백질 다섯 개는 도넛 형태로 고리를 이루고 있는데 융모 표면에 있는 복합당지질 분자인 GM1을 인식해 달라붙는다.


그 결과 세포막의 곡률이 바뀌면서 A단백질이 세포 안으로 들어간다. A단백질은 인체의 아데닐사이클라아제라는 효소를 활성화시켜 고리형 아데노실일인산(cAMP)이라는 분자를 많이 만들게 한다. cAMP는 신호분자로 농도가 높아지면 장내강의 나트륨 이온 유입을 차단하고 세포와 혈액의 염소이온이나 중탄산염이온을 장내강으로 분비시킨다. 그 결과 삼투압이 생겨 물이 딸려 빠져나간다. 이처럼 전해질 균형이 깨지면서 탈수가 일어난 결과 쌀뜨물 같은 설사와 구토가 일어난다.


콜레라균이 왜 이런 상황을 유도하는 독소를 지니게 됐는지는 진화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폭발적인 설사와 구토로 환자의 분비물이 주변 물과 음식에 들어가면 콜라레균이 새로운 숙주를 찾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콜레라의 실체를 몰랐던, 상하수도 시설이 미비했던 시절 콜레라가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며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이유다.


 

● O형은 독소 분자에 친화력 높아


그런데 콜레라균이라고 해서 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건 아니다. 균주에 따라 콜레라독소 유전자가 없거나 있어도 유전형에 따라 병원성에 차이가 있다.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콜레라의 경우도 네 번째는 유전자지문 분석결과 콜레라독소 유전자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이번처럼 콜레라독소가 없더라도 다른 메커니즘으로 설사를 유발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경우는 같은 콜레라균에 감염됐더라도 사람에 따라 증상의 유무와 경중에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독일의 미생물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1883년 콜레라균을 발견한 뒤 특정한 세균이 특정한 질병을 일으킨다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주장하자 당시 떠오르던 세균이론에 반감을 갖고 있던 막스 폰 페텐코퍼라는 노교수가 코흐에게 콜라라균을 요청했고 배달된 병의 내용물을 그 자리에서 다 마셔버렸다. 페텐코퍼는 “세균은 콜레라와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의 기질이다”라며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동물을 자처한 것이다. 놀랍게도 엄청난 양의 콜레라균을 마셨음에도 페텐코퍼는 콜레라는커녕 배탈도 나지 않았다.

 

혈액형과 콜레라의 관계. 소장세포(융모) 표면에 있는 당분자는 혈액형에 따라 구조가 다르다. 그 결과 A형과 B형, AB형의 경우 콜레라독소가 잘 달라붙지 않아 타깃인 GM1에 결합하는 걸 방해한다(아래 왼쪽). 반면 O형의 경우 잘 달라붙어 GM1에도 더 쉽게 결합한다(아래 가운데). 한편 인구의 20% 정도는 소장세포 표면에 혈액형을 반영하는 당분자가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 O형처럼 독소가 GM1에 쉽게 결합한다(아래 오른쪽). - PLOS Pathogens 제공
혈액형과 콜레라의 관계. 소장세포(융모) 표면에 있는 당분자는 혈액형에 따라 구조가 다르다. 그 결과 A형과 B형, AB형의 경우 콜레라독소가 잘 달라붙지 않아 타깃인 GM1에 결합하는 걸 방해한다(아래 왼쪽). 반면 O형의 경우 잘 달라붙어 GM1에도 더 쉽게 결합한다(아래 가운데). 한편 인구의 20% 정도는 소장세포 표면에 혈액형을 반영하는 당분자가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 O형처럼 독소가 GM1에 쉽게 결합한다(아래 오른쪽). - PLOS Pathogens 제공

실제 콜레라가 유행한 지역에 대한 역학조사를 해보면 증상에 개인차가 큼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개인차를 유발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혈액형이다. 즉 O형인 사람이 다른 혈액형에 비해 콜레라 증상이 심하다는 사실이 1970년대 밝혀졌다. 예를 들어 1991년 페루에서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O형인 사람은 심각한 설사로 입원한 비율이 여덟 배나 더 높았다고 한다. 이런 역학적 통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혈액형이 왜 증상의 경중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모르는 상태였다.


학술지 ‘열대의학 및 위생 미국저널’ 8월호에는 O형인 사람이 콜레라 증상이 심한 건 독소에 대한 세포반응이 민감하기 때문이라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즉 O형의 경우 콜레라독소가 유도하는 세포내 cAMP의 농도증가폭이 커 다른 혈액형에 비해 농도가 네 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전해질을 장내강으로 내보내라는 신호가 훨씬 커 결국 심한 설사와 구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줄기세포를 분화시켜 만든 유사소장상피세포배양조직(enteroid)를 써서 이런 사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혈액형의 차이가 왜 이런 차이로 이어지는 걸까.


혈액형은 적혈구 표면에 있는 당분자의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 즉 O형은 단당류 네 개로 이뤄진 분자이고 A형과 B형은 여기에 하나(A형은 GalNAc, B형은 Gal)가 더 붙어 다섯 개로 이뤄진 분자다. AB형은 A형 당분자와 B형 당분자가 섞여 있다. 단당류 하나가 더 있느냐, 어느 종류가 붙었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구조가 달라지므로 다른 항원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혈액형에 따른 당분자는 소장의 세포표면에도 분포한다. 즉 O형인 당신의 소장 표면에 돌출돼 있는 당분자의 구조는 A형인 필자와 다르다는 말이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화학자들은 용액에 콜레라독소분자와 당분자를 함께 넣은 뒤 결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X선 회절법으로 구조를 분석한 결과 콜레라독소분자가 O형 당분자와 더 단단히 결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소장 세포 표면에는 콜레라독소분자의 타깃인 GM1뿐 아니라 혈액형 당분자도 존재하는데, 후자 역시 독소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독소의 GM1에 대한 결합력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인생의 베일’의 월터 페인의 성격은 A형일지 몰라도 진짜 혈액형은 O형이지 않았을까.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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