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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니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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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니까 괜찮아!”

2016.09.10 18:00

한가위라고도 부르는 ‘추석’을 말 그대로 풀면 ‘가을(秋) 저녁(夕)’이다. 왜 ‘가을 저녁’일까. 아마도 우리의 농경생활과 뗄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추석은 한봄에 모를 심고 여름내 키운 벼를 가을에 햅쌀로 수확할 즈음이다. 그 즈음의 ‘가을 저녁’을 생각하자니, 한 해의 논농사를 방금 마치고 더 낮아진 들녘을 바라보고 있는 농부의 눈길이 선하다. 또는 추수만 남겨둔 저물녘, 바람의 장단에 노을을 비질하는 금빛 들판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농부의 풍경이 떠오른다.

 

GIB 제공
GIB 제공

그렇게 모색(暮色)의 ‘가을 저녁’ 문턱을 넘으면 짙어진 창공에는 어느새 정월 대보름만큼 커다랗고 둥근 보름달이 어둠을 밀어내며 지상을 내려다본다. 그러니 어찌 지상의 사람들이 그 환하고 복스러운 달빛의 시선을 피하랴. 그리하여 추석은 보름달과 함께 절정을 이룬다. 바로 그날, 조상과 육친과 이웃에게 복을 빌고 대지를 일궈 수확한 햇것들로 만든 음식을 둘러앉아 함께 먹으며 덕담도 농담도 웃음도 주고받는 큰 명절이 한가위요 추석이다.


마음이 넉넉해야 먹거리가 풍성할까, 먹거리가 넉넉해야 마음이 풍성할까. 마음이 넉넉해도 먹거리는 곤궁할 수 있고, 먹거리가 넉넉해도 마음은 각박할 수 있다. 하지만 봄여름 동안 빠듯한 곡식으로 허기를 달랬던 우리 조상 농부들이 추수를 마치면서 밥으로 지어 먹기에도 부족했던 쌀로 떡까지 만들어 먹을 정도로 한시적이나마 먹거리가 풍성해지는 때가 바로 추석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마음은 먹거리 앞에서 더욱 넉넉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둥그런 한가위 달도 소복이 한가득 담아놓은 송편처럼 벙글벙글 웃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나는 농가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해마다 이맘때면 짧아진 내 옷소매를 보시고 장에 가신 어머니께서 새 옷을 사 오시기도 했던, 그리고 할머니께서 시루에서 방금 쪄낸 송편의 솔잎 향이 코끝에 번져 마음속으로 히죽이기도 했던 유년이 떠오른다. 곡식뿐 아니라 사과, 배, 감, 대추, 밤 등 차례 상 맨 앞에 오르는 온갖 과실들이 희고 붉은 모습으로 소쿠리에 담겨 드나드는 손을 기다리던 추석날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밤이 되어도 꺼질 줄 모르는 배를 두드리며 포만에 찬 샛노란 달을 바라보았겠다. 그렇게, 차례도 지내고 성묘도 다녀오면서 먹고 노는 것이 전부였던 추석날은 길기도, 짧기도 하였다.


유년을 갓 지난 시절의 아침 추석 풍경은 알근했다. 이른 아침부터 정성스레 준비한 차례를 지내고 그 상을 물러 육친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면 조상에게 나란히 올렸던 술잔들에는 찰랑찰랑하게 정종이 가득 담겨 음복을 기다리고 있었고, 어른들은 넘치려는 그것들을 한 잔씩 가져다가 입술을 대었다. 그러고는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훗날 버릇이 좋아진다”고 하시며 막내아들인 내게까지 음복의 기회를 주시던 아버지의 말씀에 당신의 음복 습관을 따라서 두세 번에 나눠 한 잔을 들이키고는 전날 밤에 깎아 냉수에 담가놓았던 햇밤을 안주 삼아 ‘아작!’ 소리가 나게 깨물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에게 가을의 소리는 입안에서 쪼개지는 햇밤의 소리다.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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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밤 깨무는 소리가 가을의 청각이라면, 상응하는 가을의 시각은 음복 직후의 아침 하늘빛이다. 공복에 햇밤 두세 톨로 음복 술잔을 비웠으니 배 속에서 지핀 불씨가 얼굴에서 화로가 되었다. 진화하듯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나와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면 높고 파란 하늘에서는 아지랑이가 춤을 추었다. 그 알근한 하늘빛을 바라보자니 유쾌할 수도 불쾌할 수도 없는 나의 취기를 쓰다듬으며 지나가는 가을바람이 내게 “추석이니까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추석은 일상이 아닌 특별한 날이다. 그래서 그날만은 밥으로도 아껴 먹는 쌀을 빻아 송편도 만들고, 독에 용수를 박아 술도 빚고, 햇과일을 깎아놓고 수다를 떨며 달게 먹는다. 그날만큼은 먹거리가 풍족하여 마음도 아침 하늘처럼 맑고 달처럼 환한 날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덕담을 하는 것이다. 그 마음결이 비로소 추석을 넉넉한 ‘가을 저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추석에는 보름달 같은 덕담을 주고받아보자.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주
뉴스를 보다보면 무엇인가를 분석해서 설명을 해주는 내용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야 원인을 정확하게 찾고,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고개를 들어 사물을 그대로 보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면 분석한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생활의 시선’을 매주 연재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천천히 읽으면서 감정의 움직임을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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