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연구비, 받기도 힘들고 받아도 힘들었어요”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밴드 구글플러스

2016년 09월 28일 00:00 프린트하기

 

pixabay 제공
pixabay 제공

 

  과학의 기본은 창의력입니다. 대한민국이 과학강국으로 거듭나려면 과학자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할 수 있는 ‘연구 자율성’이 무엇보다 중시되는 이유입니다. 동아사이언스 취재진은 2016년 노벨상 수상 시기에 앞서 국내 과학계 현황과 내, 외부의 목소리를 십분 반영한 ‘과학자 연구 자율성 높이자’ 기획 시리즈를 28, 29일 양일에 걸쳐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한국 정부에서 과학자들에게 주는 연구비 규모는 이제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연구비 생태는 어떤 상황일까. 동아사이언스 과학동아 취재팀은 국내 과학기술분야 연구자 10명을 인터뷰한 결과, 안타깝게도 한국의 연구비 지원 구조는 덩치만 클 뿐 내실은 없는 기형적인 구조인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한국의 국가 R&D 지원 구조가 과학자들의 사기를 꺾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우려했다. 취재팀은 이들 가운데 7명이 지적한 문제를 가상의 인물인 ‘이공계’ 교수가 연구 과제에 응모할 때부터 연구를 마치기까지의 과정을 시간 흐름 순으로 엮어봤다.

 

#Intro. 연구의 시작

내 이름은 이공계. 부모님이 훌륭한 과학자가 되라고 지어 주신 이름이다. 국내 대학에서 생명과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대학부설병원 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5년 동
안 일했다. 최고 권위의 학술지에 잇따라 논문을 발표하면서 주목받았고, 교수가 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감사하게도,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학생들과 함께 연구실을 꾸렸다. 마침 좋은 연구 아이디어도 떠올랐다. 이제 연구비만 있으면 연구에 돌입할 수 있다.

 

 

#1. 대학입시보다 더한 연구비 경쟁률

때마침 정부 연구비 지원사업 공고가 났다. ‘이건 정말 대박 아이디어야’라는 생각으로 과제 지원서를 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경쟁률이 무려 20대 1이다.

 

→ 한국 과학자들이 연구비를 따기 위해 피튀기는 경쟁을 하는 이유는 국가 연구비 구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 약 19조 원의 R&D 예산에서 기초과학에 약 5조 원을 지원했다. 하지만 국립대 인건비와 정부출연연구기관 지원금 등을 제외하면 실제 풀뿌리 연구(일선 과학자들의 상향식 제안 과제)에 투입되는 예산은 2조~3조 원에 불과하다.

 

한국의 정부 R&D 예산은 각 부처를 통해 연구자들에게 지원되는데, 그 중 가장 많은 연구비를 지원하는 곳이 미래창조과학부다(34.3%, 2015년 기준). 미래부와 교육부의 연구비 지원을 담당하는 한국연구재단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연구재단이 집행하는 연구개발 예산은 약 2조7807억 원이다(기초, 응용, 개발 연구 포함). 연구재단에 문의한 결과, 그 중 풀뿌리 연구와 기획과제의 비중은 각각 1조1095억 원(39.9%)과 1조4988억 원(53.9%)이었다. 이는 노벨상 수상 업적의 다수가 상향식 과제에서 나왔고, 미국 국립보건원(NIH) 전체 예산의 74%가 풀뿌리 연구에 투자된 것과 대조적이다.

 

기획과제에 참여할 수 있는 연구자가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도 큰 문제다. 대부분의 기획과제는 연구 주제와 방법이 아주 구체적으로 짜여져 있어 몇몇 연구자만 지원할 수 있다. 과제 기획에 참여한 연구자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다.

 

생명과학 전공 A 교수는 “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키워드를 너무 많이 넣어서 다른 연구자들은 참여할 수 없게 만들었다”며 “과제 제안 요청서(RFP)를 보면 특정 인물의 이름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생명과학 전공 A 교수
작년에 교수 한 사람당 약 1억 원 정도를 지원하는 기초연구사업(그랜트)에 지원했습니다. 12개 과제를 선정하는데 240개의 과제가 지원했더군요. 경쟁률이 20대 1이었죠. 반면 교수 한 명에게 7억~10억 원을 5년 동안 지원하는 국책사업(기획과제)은 경쟁률이 많아야 3대 1이었어요.

 

 

#2. ‘비전문가’가 심사하는 내 연구 주제
첫 번째 도전에서 고배를 마시고 ‘재수’를 했다. 이번에는 어렵사리 서류평가를 통과해 발표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심사위원이 내 연구 분야를 너무 모르는 것 같다….

 

→ 연구비 지원 대상자를 선정할 때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DNA 복구와 관련된 연구 제안을 발생학 전공자가 평가하는 식이다. 이는 국내에 세부 분야별 연구자 그룹이 적고, 서로 학연이나 공동연구 등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연구비 지원 대상 선정에 이해관계가 반영되지 않게 하려다 보니 전문성이 떨어지는 평가자를 섭외하게 된다.

 

현업을 떠난 지 오래된 연구자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많다. 생명과학 전공 B 교수는 “결국 연구 제안의 깊이나 창의성, 혁신성보다는, ‘과제수행 잠재력’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하나의 기준인) 논문을 얼마나 많이 냈는지, 논문을 낸 저널의 피인용지수(임팩트 팩터·논문이 얼마나 인용됐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에 의존해 평가하게 된다”고 한탄했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문제를 보완하고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작년부터 심사위원 자격 규정을 완화했다”며 “같은 학과에 속한 교수이거나, 지도교수가 같은 경우 등이 아니면 심사위원에 포함될 수 있다”고 말했다.

 

생명과학 전공 C 교수
제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연구 제안서를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평가할 수 있는 건 과거 논문 발표 기록밖에 없더군요.

 

지구과학 전공 D 교수
오랫동안 직접적인 연구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심사위원들이 비슷한 분야에서 반복적으로 심사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3. 내 연구에 개입하는 ‘보이지 않는 손’
재수 끝에 어렵사리 연구비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게 됐다’며 학생들과 기뻐했는데, 이게 웬걸. 시어머니가 한둘이 아니다.

 

→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비 지원 기관의 과도한 요구와 간섭을 지적했다. 정부 연구비는 미래창조과학부, 산업통상자원부, 보건복지부 등 여러 부처를 통해 연구자들에게 지원된다. 각 부처마다 연구 과제를 관리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연구자에게 과도한 간섭을 한다.

 

생명과학 전공 B 교수는 “과제당 1년에 1편 이상 국제학술논문을 발표하도록 종용하거나, 발표 예정 논문을 자신들에게 ‘사전 검열’ 받도록 제도화 한 기관도 있다”고 푸념했다. 그는 “그로 인해 논문 발표 시점을 놓치거나 내용을 온전히 담지 못해 저평가되고, 게재 거부를 당하는 사례도 빈번하다”고 말했다.

 

요구사항도 많다. 정보통신공학 전공 E 교수는 “매년 연구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것 외에도 정부 부처나 국회에서 자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 연구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정보통신공학 전공 E 교수
장기 기초 연구 과제로 연구비를 지원받았는데 지원 기관에서 느닷없이 산업화 계획을 요구하면서 처음 계획과 다르게 끌고 가려고 하더라고요. (요구하는대로) 안 하면 돈을 못 준다고까지 말하면서요.

 

기계공학 전공 G 교수
국가연구개발성과를 관리한다고 요즘은 한 달에 한 번씩 논문 숫자를 세서 보고하라고 합니다. 매년 논문 숫자를 채워야 하니까 덜 익은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내는 경우가 있죠. 그런 논문은 그야말로 세상에 나오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는 건데, 그냥 실적용이죠 뭐.

 

 

#4. 평가는 천편일률, 장기연구는 ‘그림의 떡’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5년 동안의 연구를 마쳤다. 학생들과 노력한 끝에 세계 최고는 아니지만 만족스런 성과를 얻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연구 성과를 평가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논문을 낸 학술지들은 영향력지수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조금 걱정이 된다.

 

→ 한국의 국가 R&D 예산은 대부분 응용연구나 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춘 콘트랙트 형태다. 이른바 ‘추격형 연구’에 적합한 방식이다. ‘선도형 연구’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기초연구비 지원 규모를 확대했지만, 평가 방식은 기존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기초연구 과제를 대상으로 피인용지수가 높은 저널에 논문을 얼마나 냈는지, 특허가 얼마나 되는지 등을 따지는 정량적인 평가 방식이다. 논문 개수와 저널의 영향력이 과학적인 성과를 대표하는 지표가 아님에도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량적인 평가를 주로 한다. 한국연구재단의 경우 2014년부터 평가자들에게 정량적 평가를 지양하고 정성적 평가를 할 것을 주문하고 있지만, 부처마다 상황이 달라 연구자들이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연구 주제로 반복해서 연구비를 지원 받을 수 없는 구조 역시 문제다. 중복 연구를 방지한다고 만든 기준인데, 연구비 지원 기간이 끝나면 같은 연구 주제로 다시 지원 받을 수 없다. 결국 새로운 분야로 연구 주제를 바꾸거나, 자신의 연구를 새롭게 포장하는 ‘신조어’를 만들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1989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토마스 첵에게 40년 이상 한 가지 주제를 연구하도록 지원한 것과 대조적이다.

 

정보통신공학 전공 E 교수
미국에서 연구할 때 한국에서 방문한 교수와 다른 연구자들이 갈등을 빚은 적이 있었어요. 컴퓨터과학 분야에서는 학술지보다 콘퍼런스에서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것을 더 높이 치는데, 한국에서 방문한 교수가 자기는 꼭 저널에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거든요. 연구 실적을 평가할 때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SCI)에 등재된 저널에 논문 몇 개를 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기계공학 전공 F 교수
연구 과제를 선정할 때 ‘주제 중복성’을 따지기 때문에 본인이 연속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힘들고, 다른 누군가 비슷한 주제로 과제를 하고 있어도 연구비를 받기 힘들어요.

 

#5. 실패 두려워하는 ‘생계형 과학자’ 만들어
다행히 나쁜 평가를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동료 교수 중 한 명이 ‘불성실 실패’ 판정을 받
고 지원받은 연구비 일부를 회수조치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새로운 연구 과제에 지원해야 하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있기는 하지만 실패할 위험이 높아서 고민이 된다….

 

→ 미국에서 오랫동안 연구한 정보통신공학 전공 E 교수는 한국의 연구비 지원사업에서 연구 성과를 성공과 실패로 구분하는 점에 놀랐다. 과제 수행 기간이 끝나면 연구 결과를 평가하는데, C~D등급을 받으면 상세 평가를 실시한다. 그리고 성실히 연구를 수행했다고 판단되면 ‘성실 실패’로 인정한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불성실 실패’ 평가를 받은 연구자에게는 연구비 환수나 3년 동안 연구개발 사업 참여를 제한하는 등의 불이익이 주어진다.

 

비도덕적인 연구자들을 걸러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실패 판정에 대한 연구자들의 거부감이 매우 크다. 처음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연구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할 위험이 있지만 성공했을 때 영향력이 큰 연구에 도전하지 못하게 만든다.

 

지난 8월 18일에는 불성실 실패 판정으로 연구비 환수 조치를 받은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에 제기한 소송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기도 했다. 기계공학 전공 G 교수는 “후배들에게 정말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정부 돈을 받지 말고, 차라리 숨겨서 긴 호흡으로 연구해 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해주고 싶다”고 한탄했다.

 

기계공학 전공 F 교수
연구라는 것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구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연구비를 환수당할 수 있다면 무서워서 연구하기 힘들 거예요. 중간평가에서 탈락해 연구가 중단되거나 연구비가 삭감되는 경우도 있고, 최종평가에서 기준점수를 넘지 못해 연구비를 환수당한 과제도 있습니다.


 

#Outro.

‘좋은 연구 성과를 내고, 후진도 양성하겠다’는 꿈을 안고 과학자가 됐지만, 한국의 연구비 환경은 녹록치가 않다. 특히 기초과학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비 지원과 평가를 경험하면서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한 연구자는 “기회만 있다면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도 말했다.

 

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은 “많은 연구자들이 실험실 구성원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연구를 하는 ‘생계형 과학자’로 길들여져있다”고 말했다.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이 창의적인 연구 과제에 연구비를 지원하기 위해 과제를 공모했지만, 지원한 국내 연구자들의 과제 제안서가 천편일률적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고 그걸 풀겠다거나,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를 풀겠다는 도전은 없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기존의 문제를 새로운 접근 방법으로 풀어보겠다는 정도의 제안을 해 왔다.

 

국 이사장은 “노벨상급 좋은 연구 성과는 소재를 선택하는 방법부터 연구 수행 방법까지 모두 달라야 한다”며 “지금처럼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그런 성과를 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동아사이언스 탐사취재 일환으로 진행된 과학동아 10월호 특집

‘데이터로 본 노벨 생태계’ 중 일부를 발췌, 게재한 것입니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밴드 구글플러스

2016년 09월 28일 00:00 프린트하기

 

혼자보기 아까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해 보세요

네이버밴드 구글플러스

이 기사가 괜찮으셨나요?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3 + 10 = 새로고침
###
과학기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소개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고발 소재 등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