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본문바로가기

동아사이언스

향(香) 없는 술은 코감기 환자 같다: 소주, 정종, 와인 편

통합검색

향(香) 없는 술은 코감기 환자 같다: 소주, 정종, 와인 편

2016.10.15 18:00

집술[家酒]은 즐기는 마음 없이는 내키지 않을뿐더러 재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집술을 즐기는 일은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의 취미이기도 할 테다. 즐김 정도에 따라 나름의 모양과 콘셉트도 있기 마련일 테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노하우도 쌓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문가도 아니거니와 꼼꼼히 취득하고 학습할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다. 수준급의 상차림은 외식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내 입맛과 취향의 소박한 ‘집술’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 공감할 만한 독자의 눈과 마음이 잠시 머무르기를 바랄 뿐이다.

 

두 번에 걸쳐 막걸리와 맥주에 대한 집술 얘기를 했다. 그다음 주종으로 소주와 청주와 와인이 있겠지만, 이 주제를 오래 끌고 가는 것도 지루할 듯해 오늘은 그들은 뭉뚱그려 얘기해본다(내 경우엔 양주와 고량주는 집에서는 마시지 않기에 제외한다).

 

GIB 제공
GIB 제공

우선 ‘소주’다. 소주는 ‘사를 소(燒)’ ‘술 주(酒)’자를 쓴다. ‘불사르는 술’이라니 알코올 도수가 높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이 본말의 뜻은 유명무실해졌다. 흔하디흔한 ‘희석식’ 소주가 시장을 장악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의 농도가 높은 주정에 물을 타서 그 농도를 낮춘 것을 의미하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증류식 소주는 값도 비교적 비싸거니와 동네 작은 상점에서는 구입하기 힘들어서 나 역시 아주 가끔 일반 소비자들처럼 희석식 소주를 구입한다.

 

흔히 ‘화학주’라고 비하해 일컫는 희석식 소주는 에탄올 주정을 물로 희석하고 아스파탐 등을 넣어 만들기에 곡물 특유의 자연 발효향이 전혀 없다. 그래서 여러 소주들의 각각의 맛을 구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알코올 자체의 자극성과 아스파탐의 밍밍한 단맛이 전부이기에 그럴 것이다. 나는 그 맛 없는 맛을 지우기 위해 소주에 오이나 양파를 섞는다. 그 둘 중 하나를 채를 썰어 주전자에 담고 소주도 붓는다(보라색 양파를 섞으면 빛깔이 예쁘다). 발효된 곡물 향은 이미 구할 수 없지만, 야채 향이라도 추가하면 그럭저럭 마실 만해지기 때문이다. 향(香)이 없는 술은 코감기 환자가 먹는 음식처럼 뭐든 무미하다.

 

다음은, 어릴 적 차례 상에서 내가 처음 마셔본 술, ‘청주’(淸酒)다. 보통 ‘정종’이라고 일컫는 청주는 첫사랑의 추억처럼 각인되어 있어서 집에서는 가을 한때만 마신다. 내 취향을 잘 아는 아내가 기분 좋은 어느 날 한두 줌의 햇밤을 깎아 찬물에 담가놓은 날이면 나는 일부러라도 청주를 사러 마켓에 다녀온다.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ㄱㅈ법주를 구입한다. 가장 흔한 ㅂㅎ수복보다 몇 천원 비싸지만 청주 특유의 까끌한 맛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 술병에 물 적신 티슈를 감싸서 냉동실에 15분간 넣어두면 급속도 온도가 떨어져 마시기에 적당해진다. 하얀 도자기 잔에 청주를 따른다. 음복하듯 반 모금을 마신다. 목련 같은 생밤을 입에 넣고 깨문다. 생밤은 쪼개지고 부서지고, 청주의 떫은맛과 발효의 맹아 같은 생밤의 향이 어우러져 입안을 채운다. 청주와 생밤은 술과 안주로서 가장 잘 어울리는 식물성의 조화가 아닐까.

 

GIB 제공
GIB 제공

술과 안주 관계에서 내겐 언제나 술이 주연이지만 안주를 위해 술이 조연인 경우가 있다. 문어숙회가 주인공일 때가 그렇다. 문어숙회에는 어떤 술이 어울릴까? 소주? 청주? 그리 나쁘진 않겠지만, 내 선택은 ‘화이트와인’이다. 그중 알코올 도수가 13도쯤 되는 것이 더 좋다. 7천원쯤 되는 칠레산 저가 와인이면 족하다. 냉장된 새큼한 화이트와인은 문어숙회의 찰지고 담백한 맛과 참 잘 어울린다. 하지만 초고추장의 단맛은 몇 점만에 금세 질리게 한다. 그 대신 레몬즙을 많이 섞어 옅게 만든 간장에 다진 마늘과 청양고추를 썰어 넣고 참기름 몇 방울을 떨군 소스에 문어숙회를 찍어 먹어보시라. 어느새 젓가락만 빨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문어숙회를 사기 위해 나는 밤 9시쯤에 대형 매장을 방문한다. 폐점을 앞두고 있기에 둘이 먹을 만한 양의 문어숙회를 절반 가격인 8천원쯤에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집술’의 즐거움은 약속도 없이 즉흥적으로 마련되는 게 아닐까. 마치 입덧 시기를 갓 통과한 임신부가 한겨울에 갑자기 물냉면을 떠올리듯 말이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주
뉴스를 보다보면 무엇인가를 분석해서 설명을 해주는 내용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야 원인을 정확하게 찾고,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고개를 들어 사물을 그대로 보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면 분석한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생활의 시선’을 매주 연재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천천히 읽으면서 감정의 움직임을 느껴보세요.

이 기사가 괜찮으셨나요?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댓글 0

3 + 8 = 새로고침
###
    과학기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소개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고발 소재 등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제보하기

    관련 태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