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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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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의 추억

2016.11.08 19:30

아주 조그만 원을 만들며 빙빙 도는,
사뿐한 듯 힘찬 발검음의 부드러운 행보는
하나의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있는
중심을 따라 도는 힘의 무도(舞蹈)와 같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표범’ 2연


맹수 하면 호랑이나 사자가 먼저 떠오르지만 필자는 표범에 훨씬 더 매력을 느낀다. 표범은 웬만한 크기의 먹이는 잡을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도 나무를 가뿐하게 오를 정도로 유연하다. 우아한 몸의 곡선은 플라톤식 표현을 빌리자면 육식동물의 ‘이데아’가 아닐까.


‘독일어로 된 가장 아름다운 동물시’라고 하는, 앞에 일부를 인용한 ‘표범’은 릴케가 조각가 로댕의 전기를 쓰기 위해 잠깐 비서로 일할 때 자주 가던 파리식물원에서, 창살 너머 좁은 우리 안을 무의미하게 왕복하는 표범을 관찰한 결과다. 당시 로댕은 젊은 릴케에게 “자연 앞에서 화가나 조각가처럼 냉혹할 정도로 사물을 파악하고 모사하려는 엄격한 훈련을 하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파리식물원에 자주 들르라고 권했다.


이 유명한 시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돼 왔는데, 전형적인 예가 물리적 창살에 갇힌 표범이 무형의 창살(일상, 가족, 직장 등)에 갇힌 인간을 상징한다는 해석이다. 심지어 이 시에서 묘사된 표범이 ‘사로잡힌 지 아주 오래된 상태’라는 동물행동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 시를 읽으며 창살에 갇힌 신세가 된 표범의 처지 그 자체가 안타까웠다.

 

국내 연구진이 표범의 한 아종인 아무르표범의 게놈을 해독했다. 에스토니아 탈린동물원에 있는 아무르표범 달라. - 탈린동물원 제공
국내 연구진이 표범의 한 아종인 아무르표범의 게놈을 해독했다. 에스토니아 탈린동물원에 있는 아무르표범 달라. - 탈린동물원 제공

아무르표범 다섯 개체 게놈 해독


지난 2013년 국내 연구진이 우리나라에 살았던 아무르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 게놈을 해독해 사자와 눈표범의 게놈과 비교한 연구결과를 발표했을 때도 표범이 빠져 좀 섭섭했던 기억이 난다. (이 연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과학카페 145 ‘호랑이와 가장 가까운 종은 사자?’ 참조) 그런데 얼마 뒤 우연히 당시 연구를 이끈 울산과기대 박종화 교수와 통화를 하게 됐다.


“그런데 왜 표범은 안 하셨죠?”
“시료를 구하지 못해서...”


약간 뜻밖의 대답을 듣고 ‘동물원의 표범들은 다 아프리카에서 온 것들인가...’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아무르호랑이의 게놈을 해독했는데 아무르표범(한반도를 포함해 동북아시아에 분포한 아종)이어야 의미가 있을 테니까.  참고로 사자와 함께 눈표범을 택한 건, 이전 연구결과 호랑이와 가장 가까운 종이 눈표범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난주 TV에서 국내 연구진이 아무르표범(한국표범)의 게놈을 해독했다는 뉴스를 봤다. 국립생물자원관의 여주홍 유용자원분석과장이 잠깐 인터뷰를 했는데 왠지 박종화 교수도 관련돼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학술지 ‘게놈 연구’ 사이트에 가서 논문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 저자 목록을 보니 역시 교신저자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박 교수다. 그때 필자와 전화를 한 뒤 걸려서 아무르표범 시료를 계속 찾았던 걸까 라는 과대망상을 잠깐 해봤다.


논문을 보니 표준게놈으로 쓴 시료는 대전 오월드에서 지내다 죽은 암컷 아무르표범에서 얻은 근육이다. 그리고 추가로 야생 아무르표범(한반도 북쪽 러시아 땅에서 잡은 거다) 두 개체의 게놈을 분석해 데이터를 보완했다고 한다. 그 뒤 추가로 두 개체의 게놈을 더 분석했다. 국내 매체에서는 주로 한국표범 복원에 초점을 맞췄지만 막상 논문은 표범 게놈 해독을 계기로 식성이 동물의 진화에 미치는 영향을 게놈의 차원에서 분석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논문 제목도 ‘새로운 표범 게놈을 기준으로 한 육식동물과 잡식동물, 초식동물 포유류 게놈 비교’다.


즉 이번에 얻은, 고양잇과 동물 게놈 가운데 완성도가 가장 높은 아무르표범의 게놈을 표준으로 해서 육식동물 8종, 잡식동물 5종, 초식동물 5종 도합 18종의 포유류 게놈을 비교분석했다. 육식동물 8종 가운데 고양잇과는 표범, 고양이, 호랑이, 치타, 사자 이렇게 5종이다.

 

아무르표범의 분포지역. 과거 한반도를 중임으로 동북아시아에 분포했지만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흔적만 있을 뿐 목격되지 않고 있다. 현재 한반도 북쪽에 남아 있는 개체가 100마리도 안 되는 멸종위급종이다.  - 위키피디아 제공
아무르표범의 분포지역. 과거 한반도를 중임으로 동북아시아에 분포했지만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흔적만 있을 뿐 목격되지 않고 있다. 현재 한반도 북쪽에 남아 있는 개체가 100마리도 안 되는 멸종위급종이다.  - 위키피디아 제공

육식 올인해 얻은 것과 잃은 것


논문의 서론(Background)을 보면서 흥미로운 사실들을 여럿 알게 됐다. 먼저 포유류 역사에서 육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방향으로 진화가 여러 차례 독립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육식동물들은 상대적으로 종의 존속기간이 짧았다. 즉 먹이사슬의 위에 있다 보니 개체수가 적어 게놈 다양성이 떨어져 멸종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람까지 가세하다보니 오늘날 대형 고양잇과 동물은 다들 멸종위기에 몰려있는 신세다.


그렇다면 왜 고양잇과 동물들은 곰처럼 잡식성을 유지하지 않고 육식에 올인하게 된 걸까. 논문은 이에 대해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는 인생의 교훈이 여기서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다. 즉 육식을 함으로써 고양잇과 동물 특유의 민첩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칼로리가 고밀도인 육식을 하면 소화기관이 크게 줄어들므로 복부가 작아지고 따라서 재빨리 움직일 수 있어 사냥 성공률이 높아진다.


이번에 분석된 아무르표범의 게놈은 크기가 25억8000만 염기로 30억인 사람보다 작고 유전자도 1만9043개로 추정돼 역시 천여 개 더 적다. 논문을 보면 포유류의 계통도와 함께 진화과정에서 유전자군의 변화가 나와 있다. 유전자군(gene family)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유전자의 무리를 뜻하는데, 어떤 기능의 중요도 변화에 따라 유전자군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쪽으로 진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고양잇과 공통조상에서 유전자군이 커진 건 52개인 반면 작아진 건 무려 567개다. 즉 육식만 하게 되면서 불필요하거나 중요성이 떨어진 기능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고양잇과 동물에서 커진 유전자군은 근육과 관련된 경우가 많았다. 힘과 순발력이 향상돼야 사냥을 더 잘 하기 때문이다. 반면 위축된 유전자군은 탄수화물 대사 경로에 관여하거나 해독작용을 하는 종류들이다. 식물을 먹지 않으니 별 필요가 없게 된 것들이다. 그 결과 고양잇과 동물의 침에는 아밀라아제(녹말분해효소)의 농도가 매우 낮다.

 

고양잇과, 사람과, 소과의 게놈에서 보존도가 높은 유전자를 나타낸 벤다이어그램. 육식동물인 고양잇과에 특이적으로 보존도가 높은 유전자 1436개 가운데 다수는 시각과 신경 등 사냥에 필요한 기능에 관여한다. - 게놈 연구 제공
고양잇과, 사람과, 소과의 게놈에서 보존도가 높은 유전자를 나타낸 벤다이어그램. 육식동물인 고양잇과에 특이적으로 보존도가 높은 유전자 1436개 가운데 다수는 시각과 신경 등 사냥에 필요한 기능에 관여한다. - 게놈 연구 제공

표범과 사람, 육식으로 인한 암 위험성 차이나는 이유


최근 유행인 ‘고지방 저탄수화물 다이어트’에 시사점을 던지는 결과도 있다. 고양잇과 동물들은 DNA의 손상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났다. 고기를 소화하는 과정에서 활성산소가 많이 나와 DNA를 손상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단백질 소화와 흡수에 관여하는 유전자 세 개도 바뀌었다. 다들 육식에 적응한 결과다.


바꿔 말하면 유전자에서 이런 변이가 일어나지 않은 사람이 지나치게 육식을 하면 암에 걸릴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실제 지난해 국제암연구소는 육류를 발암물질로 분류해 파문을 일으킨바 있다. 한편 꼭 육식이 아니라도 지나친 고단백 식단은 사람에게 위험하다(단백질 소화의 산물인 질소화합물의 독성 때문에)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식성에 따라 게놈에서 보존도가 높은 영역의 면면도 달랐다. 보존도가 높다는 건 그 유전자의 기능이 꼭 필요해 변이가 일어날 경우 바로 솎아진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고양잇과 7종, 사람과 5종, 소과 5종을 대상으로 보존도를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세 과 공통으로 보존도가 높은 유전자가 4342개로 나왔다. 주로 생명체의 기본적인 기능을 하는데 관여하는 유전자들이다.


고양잇과에서만 보존도가 높은 유전자는 1436개로, 사람과에서만은 2477개, 소과에서만은 1561개였다. 고양잇과의 경우 빛을 지각하고 신경신호를 전달하는 유전자들이 많이 속해 있어서 역시 사냥에 필수적인 빠른 반사반응이 생존에 결정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반면 소과에서 냄새를 맡거나 인지기능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이 잘 보존돼 있어 식물의 독에 대한 방어메커니즘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한편 고양잇과에 속하는 종들은 인간과나 소과에 속한 종들에 비해 유전적 다양성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표범과 눈표범, 치타가 그런데 작은 무리가 고립돼 살아가며 동계교배가 자주 일어난 결과로 보인다. 앞으로 이들 종의 멸종을 막는데 서식지 보호와 함께 무리의 다양성 확보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얘기다.


논문을 읽다가 우리나라의 ‘wild leopard cat’의 게놈도 해독했다는 구절을 읽고 순간 우리나라에서 표범을 발견한 건가 해서 깜짝 놀랐다. 그런데 뒤에 ‘cat’이 눈에 들어오면서 혹시 leopard cat이 살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을 보니 역시 살쾡이였다.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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