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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의 맥주생활 (12)] 수제맥주의 시작, I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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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의 맥주생활 (12)] 수제맥주의 시작, IPA

2016.12.09 17:00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겨울 밤. 오렌지향이 톡 터지는 맥주 한잔을 앞에 놓고 앉아있자니 처음 그를 만난 순간이 아련히 떠오른다.


오늘처럼 초겨울의 찬바람이 불던 날이었지. 이태원 언저리를 걷다가 길게 줄 서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자석에 이끌리듯 따라간 그 곳에 운명처럼 네가 있었어. 처음 만난 내게 넌 ‘지리산’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 무슨 이름이 그렇느냐며 애써 관심 없는 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입술은 결국 네게로 다가가고 말았다.


그 때 네게 느낀 강렬함은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순간 이후로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세상은 너와 네가 아닌 것으로 나뉘었지.


어디에 가서도 난 너를 찾게 되었다. 집에서도, 마트에서도, 거리에서도, 심지어 여행을 떠나서도… 마치 세상의 중심이 너인 것처럼 나는 너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는 인디아페일에일(IPA). H를 수제맥주에 눈뜨게 하다.

 

pexel 제공
pexel 제공

기존 대기업 맥주의 맛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IPA의 과일이나 꽃의 향과 맛, 또 높은 도수는 너무나 강렬한 경험이다. IPA는 알코올 도수 5.5~7.5%의 에일 맥주로 홉 향이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IPA가 인생에 없던 맥주 맛을 보여줌으로써 수제맥주를 세상에 알리고, 미국을 발원지로 전세계적인 수제맥주 열풍을 몰고 왔다.

 


제국주의의 역사 IPA


IPA는 그 이름 때문에 인도 맥주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IPA 기원은 영국에 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19세기 초,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기 전이어서 식민지까지 물건을 보내려면 아프리카 대륙을 빙 돌아 적도를 두 번이나 지나야 했다. 고온의 긴 운송 과정에서 맥주가 상하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을 잔뜩 투입하고 도수를 높여 만든 맥주가 IPA다. 홉은 맥주를 변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과일, 꽃, 향을 불어넣고 씁쓸함까지 더해준다.


IPA가 제국주의에 의해 탄생했다는 이 이야기는 IPA를 널리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됐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영국에 이미 홉을 과하게 넣은 ‘옥토버(October)’라는 맥주가 있었고 이 맥주가 인기를 끌면서 여러 맥주들과 함께 인도로 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술꾼들이 하는 이야기가 다 그렇지 뭐… 주류의 역사에 유난히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 새삼 이상하진 않다.)


이후 냉장기술이 발달하면서 대형 맥주 회사들이 청량감을 강조한 라거 맥주를 대량 생산하고, 이 맥주들이 인기를 끌면서 IPA는 맥주 업계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미국에서 재탄생한 IPA

 

 

IPA에서는 감귤류 과일의 향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 - Splash 제공
IPA에서는 감귤류 과일의 향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 - Splash 제공

30년 전까지 미국에서도 ‘밀러’ ‘버드와이저’와 같은 ‘밍밍한’ 대기업 맥주가 시장을 점령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소 수제맥주 양조장들이 하나둘씩 생겨났고 1990년대 중후반부터 수제맥주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이제는 미국에만 5000여개의 양조장이 존재하고 수제맥주의 맥주 시장 점유율은 20%에 이른다.


이런 수제맥주 열풍의 중심에 미국식 IPA(American IPA)가 있다. IPA를 경험한 사람들이 수제맥주에 관심을 갖고 빠져들면서 수제맥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IPA가 수제맥주의 첫 관문인 셈이다.


미국식 IPA는 같은 IPA지만 영국에서 탄생한 IPA와는 완전히 다른 맥주다. 영국 IPA는 맥주 재료 중 몰트(싹튼 보리)에서 나오는 달달한 캐러멜 풍미가 중심이지만 미국은 다양한 홉으로 오렌지, 파인애플, 레몬, 망고, 리치 등과 같은 열대과일의 맛과 향, 또 소나무 송진의 향, 쌉쌀함 등을 만들어냈다.


미국에서도 샌디에고를 중심으로 한 서부 해안에 자리잡은 양조장들이 한낮의 햇살처럼 강렬한 홉의 향과 씁쓸한 마무리를 특징으로 하는 미국식 IPA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세계 2위 홉 산지(미국 워싱턴주 야키마밸리)가 있는 등 홉 농업이 발달한 점이 미국 IPA의 탄생 배경이 됐다.

 


IPA의 재해석

 

 

IPA로 유명한 미국 스톤 양조장의 여러 맥주들 - 스톤브루잉 제공
IPA로 유명한 미국 스톤 양조장의 여러 맥주들 - 스톤브루잉 제공

IPA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다양화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IPA의 색깔은 금색에서 붉은 구리색인데 블랙IPA, 화이트IPA 등이 양조됐다.


또 홉을 더 많이 넣고 도수도 더 높게 만든 더블(Double) IPA나 임페리얼(Imperial) IPA, 이보다 ‘더더더’ 강한 트리플(Triple) IPA도 있다. 반대로 강도를 낮춘 IPA는 세션(Session) IPA라고 불린다.


이와 함께 변종도 탄생했다. 미국의 브루클린브루어리와 독일의 슈나이더바이세 양조장이 힘을 합쳐 ‘반인반수’ 같은 ‘반IPA 반밀맥주’인 ‘슈나이더바이세 마이네 호펜바이세 탭5(Schneider Weisse Meine HopfenWeisse-Tap 5)’라는 긴 이름의 맥주를 만든 것이다. 또 ‘IPA의 명가’로 유명한 미국 스톤 양조장은 IPA와 벨기에 효모를 결합한 ‘스톤 캘리-벨지크(Cali-Belgique) IPA’를 만들었다. 


오늘은 오래 잊고 있었던 IPA에 손을 내밀어 본다. 날 설레게 했던 그날의 입맞춤을 떠올리게 하는 홉의 향이 코 끝을 간지럽힌다.

 


<’1일 1맥’ 추천맥주>
 

발라스트포인트 브루잉  제공
발라스트포인트 브루잉  제공

이름 : 스컬핀(Sculpin) IPA
도수 : 7%


미국 샌디에고의 발라스트포인트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맥주로 미국 로스트코스트 양조장의 ‘인디카’와 함께 국내에서 IPA를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오렌지, 복숭아, 살구 등 상큼한 과일향과 함께 씁쓸하고 깔끔한 끝맛으로 미국식 IPA를 제대로 보여준다.


양조장 창업자가 낚시광이어서 물고기 이름으로 맥주 이름을 짓는다. 스컬핀이라는 물고기는 지느러미에 독가시가 있는 무서운 종이라고 한다. 

 

 

※ 필자소개
황지혜. 비어포스트 에디터, 전 매일경제신문 기자. 폭탄주와 함께 청춘을 보내다 이제는 돌아와 수제 맥주 앞에 선 한량한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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