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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의 맥주생활 (22)] 라거도 아니고 에일도 아닌, 자연이 만든 맥주 ‘람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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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17일 17:00 프린트하기

“H씨, 삭힌 홍어 좋아하고 취두부도 잘 드신다며? 이거 이번에 새로 들어왔는데 한번 잡숴봐.”


출근 도장을 찍던 수제맥주 펍의 사장님이 모처럼 맥주를 추천하신다. 그렇지 않아도 살구, 자몽, 솔 등 홉 향기를 풀풀 풍기는 맥주들에 식상함을 느껴 남몰래 소맥을 다시 영접하고 있던 찰라였다.


750ml 큰 병에 코르크 마개로 밀봉돼 있는 모습은 화이트 와인의 자태. 코르크 마개가 뻥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잔에 퐁퐁 솟아오르는 작은 탄산을 보면 영락 없는 샴페인이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상큼한 사과향이 느껴지면서 시큼함이 확 다가온다. 나무의 향과 요거트나 블루치츠에서 날 법한 꼬리꼬리한 향까지…. 한 모금 마시다보니 곰팡이 향도 나는 것 같다. 단맛은 전혀 없이 드라이한 마무리….


사장님은 “헛간, 마구간, 말 안장, 먼지 쌓인 다락방, 오래된 가죽의 향을 맡아보시라”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신다.


새롭다…, 너무 새롭다…, 왜 홍어가 생각나는 거냐….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왼쪽부터 칸티용 괴즈, 오드 괴즈 분 블랙라벨 - 칸티용 브루어리, 분 브루어리 제공
왼쪽부터 칸티용 괴즈, 오드 괴즈 분 블랙라벨 - 칸티용 브루어리, 분 브루어리 제공

이 맥주의 정체는 ‘자연 발효 맥주’로 불리는 람빅(Lambic)이다. 람빅은 라거도 아니고 에일도 아닌 제3의 맥주다. 라거와 에일의 차이가 사용하는 효모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람빅은 그 둘과 다른 효모가 사용된다.


라거나 에일의 효모가 섬세하게 정제돼 맥주 발효용으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람빅의 효모는 우리가 숨쉬고 있는 대기에 떠다니는 야생의 효모와 박테리아다.


아무 데서나 채취한 효모로 람빅 맥주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람빅 효모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남서쪽 센느 밸리(senne valley) 주변에서만 얻을 수 있어 이 근방 몇몇 양조장에서만 람빅을 만들 수 있다. 이 지역 밖에서도 람빅과 같은 양조방식으로 맥주를 만들 수는 있지만 람빅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맥주를 만드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위적으로 첨가한 효모 외 다른 효모나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이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균에 오염이 되면 맥주가 상해 버리거나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맛이 나오기 때문. 그래서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발효통에 넣고 꼼꼼히 닫아줘야 한다.


그러나 람빅은 대기 중의 효모를 수집해야 하기 때문에 평상처럼 생긴 널따란 오픈 발효조(Cool ship)에 끓인 맥즙(맥아를 끓인 액체)을 펼쳐놓고 야생 효모와 박테리아가 내려 앉기를 기다린다. 충분히 미생물이 들어가도록 하고 나서 나무통으로 옮겨 담는다. 나무통에 서식하고 있는 효모와 박테리아도 함께 맥주의 발효를 돕게 된다.

 

오픈 발효조 - 앵커 브루잉 제공
오픈 발효조 - 앵커 브루잉 제공

일반적인 맥주가 한두 달 정도면 완성되는 것에 비해 람빅은 나무통 안에 짧게는 6개월에서 3년까지 보관하면서 발효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맥주가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 방부제로 홉을 사용한다. 라거나 에일 맥주에서 홉이 쓴맛, 과일맛, 솔잎향 등을 내는 데 주로 쓰여 신선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 반해 람빅 맥주 제조에서는 방부제 역할을 주로 하기 때문에 일부러 향이 죽은 묵은 홉을 사용한다.


람빅은 대기에 부유하는 미생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같은 양조장에서 같은 사람이 만들더라도 어떤 미생물이 맥즙에 침투하느냐에 따라 제각각 다른 맛이 날 수 있다. 상업 양조장이 일정한 맥주 맛과 품질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정적인 약점이지만, 람빅만은 만들 때마다 다른 맛이 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와인 맛이 포도 작황에 따라 빈티지별로 다른 것과 비슷하달까.


람빅 양조장에서는 최대한 같은 맥주 맛을 유지하기 위해 천정의 거미줄 하나도, 벽에 부서진 타일 조각 하나도 쉽게 손대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야생 효모가 장시간 발효를 시키면서 특유의 치즈 같기도 하고 곰팡이 같기도 한 쿰쿰한 향이 만들어진다.


람빅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가장 잘 알려진 스타일은 괴즈(Gueuze). 위스키 장인들이 여러 오크통의 위스키를 섞어 블렌디드 위스키를 만드는 것처럼 괴즈도 1~3년 숙성 기간이 다른 여러 람빅을 섞어 병에 담은 후 병 속에서 다시 발효를 시킨다. 람빅이 만들어지면 탄산이 거의 없는 데 반해 괴즈는 병 속 발효를 통해 탄산이 생겨 ‘브뤼셀의 샴페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쿰쿰한 풍미와 포도나 사과주스의 새콤함 등을 느낄 수 있다.


람빅 중 가장 마시기 쉬운 스타일은 바로 크릭(Kriek)이다. 크릭은 ‘시큼한 체리’라는 뜻으로 람빅에 체리를 넣어 발효시킨 것이다. 체리향이 배어있는 시큼한 주스 같은 맛이다. 일부 크릭은 과일만 넣어서 발효시키는 것이 아니라 설탕이 들어간 과일 주스나 설탕 자체를 넣기도 한다. 가당 람빅은 단맛이 더 강하다.


체리뿐 아니라 라즈베리, 복숭아, 블랙커런트, 사과 등을 넣은 것들도 있다.

 

오드 크릭 분 - 분 브루어리 제공
오드 크릭 분 - 분 브루어리 제공

발효 기간이 서로 다른 람빅을 섞거나 과일을 넣지 않은 것은 스트레이트 람빅(Straight Lambic)이라고 부른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된 스트레이트 람빅은 짜릿한 신맛을 보이고, 그보다 더 오래 묵은 람빅은 고소함, 스모키, 텁텁함 등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병에 들어있는 제품이 많지 않아 직접 벨기에를 찾아야 먹어볼 수 있다 하니…. 마셔보고 싶다.


람빅으로 유명한 양조장으로는 칸티용(Cantillon), 분(Boon), 린데만스(Lindemans), 3 폰테이넨(3 Fonteinen), 우드 비어셀(Oud Beersel) 등이 있다. 물론 죄다 벨기에 양조장이다.


괴즈 같은 람빅의 상미기한(맛이 최상으로 유지되는 기한)은 보통 20~30년에 이르기 때문에 서늘한 곳에 보관해뒀다가 특별한 날 마시면 좋다. 시간이 가면서 맛이 달라지고 깊어진다. 생일날,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크리스마스 같은 날 함께 보낼 사람이 없어도 노여워 말고 괴즈를 따자. 괜찮아, 맥주가 있어.

 


<’1일 1맥’ 추천맥주>

 

반 혼스브룩 양조장 제공
반 혼스브룩 양조장 제공

이름 : 세인트 루이스 프리미엄 크릭(St. Louis Premium Kriek)
도수 : 3.2%


야생 효모로 만든 람빅 맥주에 체리를 넣어 6개월 이상 발효시킨 맥주. 잔에 따르면 달콤한 체리향이 올라오고 새콤함이 느껴진다. 과일 소주, 맥주 칵테일처럼 인위적인 조합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새콤달콤함을 즐길 수 있다. 알코올 도수도 낮아 편하게 마시기 좋다. 입맛을 돋우는 식전주로 추천.

 

 

※ 필자소개
황지혜. 비어포스트 에디터, 전 매일경제신문 기자. 폭탄주와 함께 청춘을 보내다 이제는 돌아와 수제 맥주 앞에 선 한량한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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