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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 곳 7] 횡단보도: 찻길을 건너는 유일한 보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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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5월 27일 18:00 프린트하기

그날도 지하철역 1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방 100미터쯤에 있는 왕복 8차로의 교차로 신호등 불빛을 확인했다. 붉은색이었다. 3시 방향에서 9시 방향으로 자동차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번 신호는 내가 건너갈 방향의 신호등에 초록 불빛이 켜질 것이었다. 평일이면 매일 아침마다 반복해서 지나가는 길이기에 그 교차로의 신호 순서를 외우게 되었다. 나는 그 신호 순서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이번 신호에 건너기엔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나는 여유 있게 걷고 있었다. 그 순간 한 여성이 갑자기 나를 앞질러 그 교차로를 향해 인도를 뛰기 시작했다. 육상선수라면 모를까 이번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그럼에도 그 여성은 크로스백을 어깨에 걸고 열심히 달렸다. 그사이 신호는 바뀌고 내 예상대로 그녀는 초록 불빛이 꺼질 때까지 교차로에 닿지 못했다.

 

GIB 제공
GIB 제공

직장인으로 보였던 그 여성은 결국 나와 함께 다음번 신호를 받아 횡단보도를 건넜지만 나는 걸었고 그녀는 다시 전력 질주했다. 시간을 보니 8:58. 아마도 약간 지각을 하지 않았을까. 만약 직전 신호를 받아 횡단보도를 건넜다면 간신히 늦지는 않았을까. 그날 이후에도 그 시간이 되면 그 횡단보도에는 늘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신호등에 초록 불빛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서 있다. 그러고는 신호가 바뀌면 그중 서너 명은 갑자기 육상선수가 된다. 그렇게 길을 건너는 각각의 보행 속도는 각자의 규율 의식 내지 소속된 직장 문화 때문이리라. 그러니 출근길의 직장 근처 횡단보도를 어느 시간에 건너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직장에서 눈총을 받기도 할 테다.


횡단보도는 보행자가 차도를 횡단할 수 있도록 흰색 페인트를 도로에 칠해 안전 표시를 한 부분을 말한다. 자동차들이 내달리는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에는 신호 순서에 맞춰 보행할 수 있도록 설치한 신호등이 있기도 하고, 교통량과 보행자 수를 감안해 별도의 신호등을 설치하지 않은 곳도 있다. 그러기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가 있을 때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도로교통법상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다 건널 때까지 그곳을 지나는 모든 차량은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적 약속이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하면 법적인 책임과 처벌과 보상에 앞서 당장 신체적인 피해가 보행자가 훨씬 크기 때문인지 그 법규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보행자는 보통 횡단보도 앞에서 커다란 쇠옷을 입은 기계를 만나면 주춤거리기 마련이고 그사이 그 기계를 조종하는 많은 운전자는 사고가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하면 그 지점을 먼저 통과하려고 가속페달을 밟곤 한다.


또는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운전자를 믿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를 운전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해 불행한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상호간의 부주의로 인해 그런 사고가 발생하는 시간대는 주로 어두운 밤이나 날이 채 밝기 전의 새벽이다. 그래서 광주를 비롯해 일부 지방에서는 LED 조명 시설을 갖춘 횡단보도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이 시설은 사고율이 높은 횡단보도 양쪽 네 귀퉁이에서 직사각형의 횡단보도를 향해 레이저 광선처럼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초록빛 LED 조명을 비춤으로써 어두울 때 그곳을 통과하는 운전자에게 미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이 좋은 아이디어는 7년 전 전남 광주의 한 공무원이 제안했단다. 박수 받을 일이다.

 

광주광역시 남구 농성초등학교 앞 횡단보도 - 세오LED 제공
광주광역시 남구 농성초등학교 앞 횡단보도 - 세오LED 제공

최근 우리 동네에 있는 횡단보도 중 몇 곳의 교통 신호 체계가 바뀌었다. 시계 방향 순서로 한 군데씩 켜졌던 횡단보도의 초록 신호등이 보행자 신호 순서가 되면 한꺼번에 사방에서 일제히 켜지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대각선으로도 도로를 횡단할 수 있게 되자 보행자들은 한 번 만에 편리하게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말 그대로 차도(車道)는 자동차들의 길이지만 그중 횡단보도만큼은 보행자를 위한 길이기에 그 목적에 맞게 안전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게 우선이라는 점에서 왕복 4차선 정도의 교차로 횡단보도에는 한자로 囟(정수리 신) 자를 닮은 육방형 신호 체계로 운영하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효율성 말고도, 그 신호에서는 그 교차로에 다가온 사방의 차량이 모두 멈춰 서기에 보행자든 운전자든 심리적으로도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래전 도쿄대학 입학시험에서 ‘얼룩말의 줄무늬가 흰색 바탕의 검은색 줄무늬인지, 검은색 바탕의 흰색 줄무늬인지’를 묻는 논술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바탕색을 무엇으로 설정할 건지가 관점인 셈이었다.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의 바탕색은 검은색이다. 사고가 나면 치명적인, 그래서 결코 넘어서면 안 되는 중앙선은 그 보색인 노란색으로 두 줄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횡단보도에는 검은색과 대비되는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그 무늬는 마치 얼룩말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오늘도 수많은 그곳을 우리의 천진한 아이들이 초원의 얼룩말처럼 뛰어다닌다. 그곳이 삶의 불행한 현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얼룩말 줄무늬 같은 횡단보도를 통과할 때는 운전자는 보행자와 자신과 그 가족 모두를 위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느닷없는 불행은 얼마나 안타깝고 고통스러운가.

 

 

※ 편집자 주

[마음을 치는 시(詩)]와 [생활의 시선]에 연이어 윤병무 시인의 [때와 곳]을 연재합니다. 연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과 장소’에 초점을 맞춘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시간’은 오래되어 역사의 범주일 수도 있고, 개인 과거의 추억일 수도 있고, 당장 오늘일 수도 있고, 훗날의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는 우리가 생활하는 바로 ‘이곳’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늘 일상의 공간에서 발 딛고 서 있는 희로애락이 출렁이는 삶의 현장입니다. 너무 익숙하거나 바빠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그 ‘곳’을 시인의 눈길과 마음의 손을 잡고 함께 가만히 동행해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의 구체적인 현지와 생생한 감수성을 잠시나마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으로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생활의 시선]을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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