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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 여우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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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6월 06일 12:00 프린트하기

“넌 누구니?” 어린 왕자가 말했다.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나는 여우야.” 여우가 말했다.
“이리 와서 나랑 놀래?” 어린 왕자가 제안했다. “나는 많이 슬프거든...”
“난 너와 놀 수 없단다.” 여우가 말했다. “나는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중략)
여우는 조용히 오랫동안 어린 왕자를 쳐다봤다.
“부탁인데... 나를 길들여 주겠니!” 그가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어린 왕자가 대답했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셰퍼드나 진돗개는 수긍이 가지만 말티즈나 토이푸들 같은 작고 귀여운 개들까지 늑대를 길들인 결과라는 건 과학이 그렇다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지난 4월 학술지 ‘셀 리포츠’에는 개 161가지 품종을 대상으로 게놈을 분석해 서로의 연관성을 밝힌 연구결과가 실리기도 했는데 아무튼 육종가란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늑대의 후예 가운데 뭘 고를지 고민해야할 정도로 품종이 다양하지만 언제인가부터 필자는 이들과는 전혀 계열이 다른 개를 키우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됐다. 바로 여우를 조상으로 하는 개다. 물론 지금 당장 ‘여우개’를 구할 수는 없지만 몇몇 책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조만간 국내에도 소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최근 읽은 ‘정상과 비정상의 과학’이란 책에서도 이 여우개 이야기가 나온다. 즉 1950년대 러시아(당시 소련)의 과학자들이 여우를 대상으로 늑대에서 개가 나온 과정을 압축 재현하는 실험을 시작했고 수십 세대가 지나 개처럼 사람을 따르는 여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덩치가 큰 늑대에서 소형견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겠지만 여우야 원래 크지 않은 동물이니 여우개는 아파트에서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수십 년 전 성공한 여우 가축화 연구가 실용화되지 않은 게, 즉 실제 분양으로 이어지지 않은 게 좀 의아하기는 하다. 소련 같은 전체주의관료국가에서는 상업화에 관심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말로는 개가 다 됐다지만 실제로는 반려동물로 키우기에 아직 문제가 있는 것일까.

 

지난 3월 필자의 이런 궁금증을 해결해줄 것 같은 책이 출간됐다. ‘How to tame a fox (and build a dog)(여우를 어떻게 길들일까(그리고 개로 만들까))’라는 제목으로 여우 가축화 프로젝트 초기부터 참여한 러시아 생물학자 류드밀라 트루트가 썼다(미국의 진화생물학자이자 과학사가인 리 앨런 듀거킨과 공저). 책은 무척이나 흥미로웠고 필자의 궁금증이 해결됐음은 물론 전체주의 소련의 철권통치 아래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혁신적인 연구를 수행한 과학자들의 삶이 깊은 감동을 줬다.

 

1952년 시작돼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의 ‘여우 가축화 프로젝트’를 소개한 책 ‘여우를 어떻게 길들일까(그리고 개로 만들까)’가 최근 출간됐다. - amazon.com 제공
1952년 시작돼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의 ‘여우 가축화 프로젝트’를 소개한 책 ‘여우를 어떻게 길들일까(그리고 개로 만들까)’가 최근 출간됐다. - amazon.com 제공

● 생물학 연구 암흑기에 비밀 프로젝트로 시작

 

1922년 레닌이 뇌졸중을 일으켜 일선에서 물러난 뒤 권력의 핵심부에 오른 스탈린은 독재적인 성향을 억누르기 어려웠고 결국 2년 뒤 레닌이 죽자 본격적으로 권력투쟁을 시작해 1927년 모든 반대파를 숙청하고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1953년 스탈린이 74세로 죽을 때까지 소련 사람들 대다수는 개고생을 했는데 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학에 대한 소양이 없었던 스탈린은 멘델의 유전학과 다윈의 진화론은 사기라고 주장하는 작물육종학자 트로핌 리센코에게 소련 과학을 맡겼다. 대학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리센코는 지식인에게 반감이 컸고 권력을 잡자 무자비한 숙청을 자행해 저명한 생물학자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거나 심지어 처형되기도 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적 수준이었던 러시아 유전학은 리센코를 만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1917년 러시아 프로타소보에서 태어난 드미트리 벨랴예프 역시 열여덟 살 위인 형 니콜라이를 이렇게 잃었다. 뛰어난 생물학자였던 니콜라이는 중앙아시아비단연구소에서 누에의 유전학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1937년 아내, 아들과 함께 행방불명됐고 훗날 가족들이 수소문한 결과 이해 11월 처형된 것으로 밝혀졌다. 아내는 감옥에 보내졌지만 끝내 면회가 안 됐고 실종 당시 열두 살이던 아들 역시 다시는 보지 못했다.

 

스무 살 때 이런 비극을 겪은 벨랴예프였지만 형의 영향으로 생물학을 공부하며 리센코의 무식한 광기에 대한 혐오감은 점점 더 커졌기 때문에 늘 위험이 따라다녔다. 벨랴예프는 동물육종을 연구했고(기초연구는 원천적으로 봉쇄된 상태였다) 은여우 품종개발에서 탁월한 성과를 올렸다.

 

19세기 들어 붉은여우의 변종인 은여우의 은회색 털에 대한 모피업계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당시 캐나다와 소련에서는 은여우 농장이 번창하고 있었다. 벨랴예프는 다양한 색조와 감촉의 털을 지닌 신품종을 개발해 소련 정부에 외화를 벌어줬다.

 

붉은여우는 다양한 털색을 지닌 변종이 있는데 이 가운데 은여우의 모피가 인기를 얻으면서 널리 사육되고 있다. - 위키피디아 제공
붉은여우는 다양한 털색을 지닌 변종이 있는데 이 가운데 은여우의 모피가 인기를 얻으면서 널리 사육되고 있다. - 위키피디아 제공

 

1948년 8월 열린 농업과학학회에서 리센코가 현대 서구유전학을 사기라며 맹비난하는 연설을 하자 격분한 벨랴예프는 동료들에게 이를 공공연히 비판하고 다녔는데 결국 직장인 모피동물육종중앙연구소에서 좌천되고 연봉도 절반으로 깎였다. 그가 하던 연구가 큰돈이 되는 게 아니었다면 이때 숙청됐을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살아남은 벨랴예프는 되지도 않는 리센코 공격 대신 제대로 된 연구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여우 육종을 하며 벨랴예프는 야생동물의 가축화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늑대에서 개가 나온 메커니즘이 늘 궁금했다. 그는 가축화 과정에서 분자 차원의 유전적 변이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물론 서구에서도 분자유전학은 아직 태동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벨랴예프는 늑대와 여우가 가까운 사이라는데 착안해 여우를 가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만일 성공한다면 늑대의 가축화 과정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훗날 분자유전학 기술이 발전하면 자신의 가설을 검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은여우는 굉장히 사나워 농장의 일꾼들이 애를 먹었는데 부주의로 물리기라도 하면 큰 상처를 입었다. 따라서 작업자들은 두께가 5센티미터에 이르는 장갑을 껴야했다. 벨랴예프는 작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은여우의 생리학을 연구해 성격이 온순한 쪽으로 품종개량을 한다는 명분으로 1952년 비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당시 35세였던 벨랴예프는 오늘날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에 있는 은여우 농장 책임자인 옛 동료 니나 소로키나를 방문해 프로젝트의 개요를 설명하고(진짜 목적은 밝히지 않았다) 실험 방법을 알려줬다. 즉 사육하는 여우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해 그나마 공격성이 덜한 녀석들을 골라 교배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이때 근친교배가 되지 않게 짝을 지어줘야 한다). 참고로 여우는 일 년에 한 번 1월 경 발정해 짝짓기를 하고 4월에 태어난 새끼는 반년이면 다 자라므로 한 세대가 1년이다.

 

● 1963년 꼬리 흔드는 여우 태어나

 

소로키나는 벨랴예프가 말한대로 작업을 진행했고 1953년 1월 이렇게 선별된 여우들을 대상으로 첫 번째 교배가 이뤄졌다. 한편 이해 스탈린이 죽었고 영국에선 왓슨과 크릭이 DNA이중나선구조를 규명했다. 리센코도 좋은 시절이 다 지난 것이다.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한 소련의 새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300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 인근에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독을 조성했다. 이곳에 지어질 세포학․유전학연구소의 소장으로 1957년 부임한 니콜라이 두비닌은 벨랴예프를 부소장 겸 진화유전학 책임자로 영입한다.

 

새 시대를 맞은 벨랴예프는 여우 가축화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담당자를 뽑았는데 바로 책의 저자인 류드밀라 트루트다. 1958년 초 모스크바주립대 대학원생이던 스물다섯 살의 트루트는 입사면접 자리에서 벨랴예프에게 이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를 듣자마자 매료돼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다. 모스크바 토박이인 그녀가 어릴 때 개를 애지중지 키운 경험이 없었다면 아직 허허벌판인 시베리아의 도시로 떠날 결심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83년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오브리 매닝이 소련 아카뎀고로독의 세포학․유전학연구소를 방문했다. 왼쪽부터 류드밀라 투르트, 매닝, 드미트리 벨랴예프, 갈리나 키셀레바. - 오브리 매닝 제공
1983년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오브리 매닝이 소련 아카뎀고로독의 세포학․유전학연구소를 방문했다. 왼쪽부터 류드밀라 투르트, 매닝, 드미트리 벨랴예프, 갈리나 키셀레바. - 오브리 매닝 제공

 

1959년 트루트는 노보시비르스크 주변의 여우 농장들을 방문하며 최적의 실험 장소를 찾았고 마침내 남서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대규모 농장 레스노이로 낙점했다. 이곳에는 다 자란 암컷 수천 마리와 새끼 수만 마리가 있었다. 여기에 가축화 실험용 사육장을 짓고 이해 가을부터 여우 선별 작업에 들어갔다.

 

트루트는 여우의 우리에 들어갔을 때 여우가 보이는 행동을 관찰해 1점에서 4점까지 점수를 매겼는데 공격성이 낮을수록 점수가 높다. 매년 가을 이렇게 상위 10%의 여우를 선별하고 이듬해 1월 이들을 교배시키는 반복작업이 이어졌다. 트루트는 이렇게 태어난 여우들의 행동과 형태를 면밀히 관찰했다.

 

한편 1960년 가을 여우를 선별할 때 탈린의 농장에서 선별한 여우 수십 마리도 합류시켰다. 당시 8세대까지 선별교배가 진행된 상태였지만 레스노이 모피농장의 여우들보다 약간 덜 난폭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두 마리는 눈에 띠게 얌전해 심지어 손으로 들어 올려도 저항하지 않았다. 트루트는 이들에게 각각 라스카(상냥이)와 키사(야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63년 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4세대 새끼들을 둘러보다 트루트는 놀라운 발견을 한다. 그녀를 본 수컷 새끼 한 마리(엠버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가 작은 꼬리를 격렬하게 흔들기 시작했던 것. 사람을 보고 꼬리를 흔드는 동물은 당시까지 개가 유일했다. 여우농장에서 그 많은 여우를 키웠지만 이런 행동을 보이는 예는 없었다. 꼬리를 흔드는 건 여우가 개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 첫 증거였다. 이해에 소장이 된 벨랴예프는 트루트의 보고를 받은 무척 기뻐했다.

 

이들은 이듬해 봄 태어난 엠버의 새끼들(5세대)도 꼬리를 흔들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망스럽게도 한 마리도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1965년 태어난 엠버의 새끼들에서도 그런 행동은 관찰되지 않았지만 1966년 태어난 새끼들(7세대)에서 여러 마리가 꼬리를 흔들었다. 이런 행동이 유전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8세대 새끼들에서는 개처럼 꼬리가 위로 말리는 개체가 나타났다(야생여우는 꼬리가 아래로 처진다). 1969년 태어난 10세대 가운데는 개처럼 귀가 펄럭거리는 새끼가 등장했다. 또 얼룩무늬 털을 지닌 새끼도 나왔다.

 

사람을 잘 따르는 특성을 기준으로 선별해 육종했음에도 여우에서도 개에서 나타난 것과 비슷한 방향으로 체형이 바뀌었다. 예를 들어 야생여우는 꼬리가 꽤 긴데 사진 속 여우개 새끼를 보면 꼬리가 꽤 짧아졌음을 알 수 있다. - Irena Muchamedshina 제공
사람을 잘 따르는 특성을 기준으로 선별해 육종했음에도 여우에서도 개에서 나타난 것과 비슷한 방향으로 체형이 바뀌었다. 예를 들어 야생여우는 꼬리가 꽤 긴데 사진 속 여우개 새끼를 보면 꼬리가 꽤 짧아졌음을 알 수 있다. - Irena Muchamedshina 제공

 

벨랴예프는 여우에서 일어나는 성격과 행동, 신체적 특징의 변화가 호르몬 분비와 관련된 유전적 변이의 결과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이를 ‘불안정 선택(destabilizing selection)’이라고 불렀다. 즉 호르몬 분비 패턴이 달라지면 성격과 형태 등 많은 측면이 동시에 변하는데 여우는 늑대와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가축화 과정에서도 비슷한 길을 간다는 것이다.

 

여우 가축화 실험의 성공을 확신한 벨랴예프는 1970년부터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이번엔 거꾸로 사나운 여우들을 선별해 교배를 해 점점 더 사나운 여우를 만드는 프로젝트다. 실제 몇 세대가 지나자 엄청나게 사나운 여우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작업자들은 일하는 내내 스트레스로 탈진할 정도였다.

 

훗날 연구자들은 온순한 여우와 난폭한 여우, 그리고 대조군(역시 꽤 사나운 편이다) 여우를 대상으로 다양한 호르몬 수치를 조사했는데 스트레스호르몬의 경우 온순한 성격은 대조군의 절반 수준이었다. 반면 세로토닌 수치는 훨씬 더 높았다.

 

여우 가축화 프로젝트는 워낙 기발한 것이었기 때문에 서구 과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고 브리테니카백과사전은 벨랴예프에게 1974년 출간 예정인 15판에 가축화와 작물화 항목 집필을 부탁했다.

 

● 낯선 사람을 보면 짖는 여우

 

어느 정도 여우개가 만들어졌다고 판단한 벨랴예프와 트루트는 이들이 정말 반려동물로 사람과 살아갈 수 있을지 확인하는 실험을 계획했다. 트루트는 1973년 태어난 새끼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암컷 푸신카를 이듬해 초 교배시킨 뒤 푸신카가 임신한 상태인 3월 연구소 내 건물로 입주해 함께 살기 시작했다. 푸신카는 4월 새끼 여섯 마리를 낳았고 사람들과 별 어려움 없이 지냈다.

 

 

털이 하얗고 반점이 있는 여우개(왼쪽)와 애지중지하는 여우개를 안고 있는 류드밀라 투르트(오른쪽). - 세포학·유전학연구소, Vasily Kovaly 제공
털이 하얗고 반점이 있는 여우개(왼쪽)와 애지중지하는 여우개를 안고 있는 류드밀라 투르트(오른쪽). - 세포학·유전학연구소, Vasily Kovaly 제공

 

이해 7월 15일은 트루트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인데 이날 밤 푸신카가 처음으로 ‘짖었기’ 때문이다. 즉 밤에 건물 밖에서 인기척을 느낀 푸신카가 갑자기 짖기 시작했는데 이는 개에서만 보이는 행동이다. 연구소 우리에서 사는 얌전한 여우들은 모든 사람에게 호의적이지만 이처럼 특정인과 밀접한 유대를 갖게 되면서 개처럼 낯선 사람에 대해서 경계를 하는 행동이 나타난 것이다.

 

한편 벨라예프와 투르트는 여우개의 행동이 유전의 결과임을 입증하기 위한 기발한 실험에 착수했다. 즉 임신한 온순한 암컷의 태아와 임신한 사나운 암컷의 태아를 바꿔치기해(정교한 수술이다) 태어난 새끼가 유전적 어미의 성격을 보일지 대리모의 성격을 보일지 알아보는 것이다. 실험 결과 대리모가 낳고 키웠음에도 새끼의 성격은 친모를 따라갔다. 즉 성격이나 행동은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말이다.

 

1985년 초 폐렴에 걸린 벨라예프는 상태가 나빠져 모스크바의 큰 병원을 찾았는데 폐암 말기로 밝혀졌다. 평생 줄담배를 피운 결과다. 벨라예프는 이해 11월 14일 68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여우 가축화 프로젝트에 관한 교양과학서를 쓰지 못한 걸 크게 아쉬워했다고 한다. 평소 투르트에게 함께 책을 쓰자고 말했지만 소장 직무로 너무 바빠 차일피일 미뤘다. 투르트는 30여년 만에 책을 냄으로써 벨라예프의 꿈을 대신 이룬 셈이다.

 

한편 이해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르며 개혁과 개방 정책을 폈지만 결국은 소련의 붕괴로 이어지면서 경제도 파탄 났다. 연구소에도 여파가 미쳐 연구비가 끊기면서 직원을 내보내는 건 물론이고 나중에는 여우 사료도 다 떨어져 여우가 굶어죽는 사태에 이른다. 700마리 수준을 유지하던 개체수는 1999년 초 암컷 100마리, 수컷 30마리까지 떨어졌다.

 

50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던 프로젝트가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투르트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미국의 과학격월간지 ‘아메리칸 사이언티스트’에 여우 가축화 프로젝트와 현 상황을 소개한 글을 기고했다. 다행히 3/4월호에 글이 실렸고 전 세계에서 기부금이 들어오면서 극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2000년대 들어 투르트는 미국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여우개의 유전자 변이와 형태 변이, 행동 변이 등 다각도에서 연구를 진행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를 들어 정밀한 신체측정 결과 여우개는 개처럼 두개골이 작아지고 주둥이가 짧아지고 다리가 짧아지는 방향으로 체형이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올 봄에 태어난 새끼들은 58번째 세대다. 

 

● 선택 안 된 여우 분양해

 

2000년대 들어 연구소에서 태어나는 여우들은 초기 기준에 따르면 대부분이 합격점을 줄 수 있을 정도다. 따라서 이 가운데 교배할 개체를 선택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탈락한 여우들은 농장으로 보내져 ‘죽어서 모피를 남길’ 운명이 되는 걸 뻔히 아는 투르트로서는 ‘소피의 선택’인 셈이다. 결국 투르트는 언제부터인가 선별작업에서 손을 뗐다.

 

여우개 강아지들. 수년 전부터 육종 선별에 탈락한 여우개들을 일반인에게 분양하고 있다. - Irena Pivovarova 제공
여우개 강아지들. 수년 전부터 육종 선별에 탈락한 여우개들을 일반인에게 분양하고 있다. - Irena Pivovarova 제공

 

수년 전부터는 탈락한 여우들을 반려동물로 분양하고 있는데 러시아는 물론 유럽과 북미로도 보내진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동물 반입 관련 법률을 잘 몰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투르트에게 여우개를 입양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투르트는 책 말미에 “언젠가 난 죽겠지만 내 여우들은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며 그녀가 좋아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한 구절을 들려줬다.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고 있어.”

여우가 말했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은 영원히 네 책임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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