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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범도 용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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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7월 08일 08:00 프린트하기

[지뇽뇽의 사회심리학 블로그]

 

2015년 백인우월주의자 딜런 루프(Dylann Roof)가 미국의 한 흑인 교회에 난입해서 33 명의 사상자를 낸 끔찍한 혐오 범죄가 있었다. 이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건 후 희생자의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가해자를 용서하겠다고 이야기했던 장면이 더 충격적이었다. (링크: https://www.nytimes.com/video/us/100000003752109/victims-families-address-dylann-roof.html)

 

GIB 제공
GIB 제공

‘나는 당신으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고 내 삶은 다시는 전과 같진 않겠지만 당신을 용서한다. 당신이 이 기회를 통해 속죄하고 회개하길 바라며 당신의 영혼이 구원받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끔찍한 범행 사실보다도 그를 용서하겠다고, 그의 영혼이 구원받길 바란다는 피해자 가족들의 넓은 아량이 놀라웠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지만, 보통 인간에게는 불가능할 거 같은 그런 초월적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한편, 이런 의문도 들곤 한다. 저런 흉악범을 용서한다는 건 정의 구현에 어긋나는 일은 아닐까?


심리학자 톰슨(Thompson)에 의하면 용서(forgiveness)는 화해(reconciliation)와 다르다(Thompson et al., 2005). 용서는 개인 내적(intrapersonal) 과정이지만 화해는 관계적(interpersonal) 과정이다. 내가 나에게 해를 입힌 상대를 미워하고 그를 떠올리기만 하면 혈압이 솟구치고 심장이 쾅쾅 뛰는 내적 반응을 가라앉힌다는 게 꼭 그와 다시 화목하게 잘 지내보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용서는 봐주기나 책임을 면제하는 것과 다르며 따라서 정의 집행과 별개이다. 연구에 의하면 위의 경우에서처럼 범죄의 피해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용서는 보통 ‘당신을 용서한다. 당신이 이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고 겸허히 죄값을 치르고 회개해서 새 사람이 되길 바란다’ 같은 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즉 피해자 본인이 상대에 대한 개인적인 울분이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이로부터 해방될 뿐 죄를 진 사람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그 전에 죄를 시인하지도,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행동도 전혀 보이지 않는 상대에 대해 진심어린 용서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연구에 의하면 용서를 받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Exline, 2017). 1) 사건의 중요성이나 피해의 정도를 평가절하하지 말고 그 일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있어 얼마나 충격적이었고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피해자의 경험과 관점에서 이야기 할 것, 2)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처럼 본인을 사건과 상관 없는 제 3자 처럼 포지셔닝하고 또한 마치 피해자가 예민한 탓인 양 하지 말 것, 3) 그 일은 분명 자신의 잘못과 책임임을 명시할 것 등이다. 보통 진심어린 사과와 책임지는 행동이 있을 때 진심어린 용서가 나오는 법이다.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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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보통 용서는 ‘타인(other)’에 대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self), 또 운명, 불운같이 자신이 어떻게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situation)에 대한 용서도 존재하며, 이 셋은 보통 함께 나타난다고 한다. 실제로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사실 내 탓도 있지 않을까?’, ‘내가 조심했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 같이 미묘한 죄책감을 느끼며 자기 탓을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너가 뭔가 했겠지’라거나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같은 주변 사람들의 코멘트도 피해자들의 죄책감을 부추긴다. 이런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는 불안이나 우울증상을 줄여주는 등 정신건강과 긴밀한 관련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타인, 자기 자신,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용서는 곱씹기(rumination), 후회, 복수심과 공격성, 화, 불안, 우울을 줄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 지속된 ‘화’는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점에서 용서는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톰슨은 용서는 결국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기존의 가정과 기대, 세계관이 무너졌을 때 나와 상대방,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정립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불의한 사건과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으로부터 감정적으로 독립하는 것, 저들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의연함을 되찾고 자신의 삶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이야기 한다.


딜란 루프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역시 사건이 정리되고 그를 용서하고 나서 자신의 삶은 다신 이전 같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걸로 지난간 일은 뒤로 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결국 용서란 부서졌던 내 삶과 감정을 동여매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아닐까 싶은 대목이다.


경험상 누구를 오랫동안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나 역시 증오할 상대가 생겼을 때 가급적 빨리 평정심을 찾고 하지만 차분히 잘잘못을 따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 참고문헌
Thompson, L. Y., Snyder, C. R., Hoffman, L., Michael, S. T., Rasmussen, H. N., Billings, L. S., ... & Roberts, D. E. (2005). Dispositional forgiveness of self, others, and situations. Journal of Personality, 73, 313-360.
Exline, J. J. (2017). Forgiveness and the ego: Why hypo-egoic states foster forgiveness and prosocial responses. In S. A. David, I. Boniwell, & A. Conley Ayers (Eds.), The Oxford handbook of happiness (pp. 257–269).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 필자소개
지뇽뇽. 연세대에서 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적인 심리학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지뇽뇽의 사회심리학 블로그’ (jinpark.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과학동아에 인기리 연재했던 심리학 이야기를 동아사이언스에 새롭게 연재할 계획이다. 최근에는 한 주를 건강하게 보내는 심리학을 다룬 <심리학 일주일>을 썼다.


지뇽뇽 심리학 칼럼니스트

imaum02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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