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강석기의 과학카페] 내 기억력의 품질, 관리하기 나름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밴드 구글플러스

2017년 12월 19일 17:40 프린트하기

망각은 대체로 좋은 일이다. 우리의 경험은 대부분 잊어도 좋은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매일의 경험을 평생토록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부정확한 기억, 실패한 망각은 인간에게 괴로움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 제임스 맥고


우리는 지난 30분, 어제 오후, 과거 10년, 또는 평생토록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대부분 돌이킬 수 없이 잊는다... 누군가 어린 시절 일 중 기억나는 걸 모두 말해보라고 하면, 아마 두 시간 안에 이야기를 마칠 수 있을 것이다.
- 이반 이스쿠이에르두, ‘망각의 기술’에서

 


‘12월 16일 토요일 5시 망년회를 합니다...’


이번 달 초 송년 모임을 알리는 메시지를 받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요즘 잘 안 쓰는 ‘망년회’란 단어 때문이다. 망년(忘年)은 다소 부정적인 표현으로 국어사전을 보면 ‘그해의 온갖 괴로움을 잊음’이라고 풀이가 돼 있다. 즉 연말에 모여 술을 진탕 마시며 한 해의 시름을 잊자는 말이다.


송년 모임 또는 송년회 대신 망년회란 말이 널리 쓰이던 필자가 젊었을 때는 정말 망년회 자리가 폭탄주가 끊임없이 돌고 2차, 3차가 이어지는 술판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필름이 끊길 정도로 과음을 한 결과 잊어버린 건 한 해 동안의 나쁜 기억이 아니라 망년회에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점이다. 아무튼 지난 토요일 망년회는 이름만 그랬지 다들 기분 좋을 정도로만 음주를 하고 일찌감치 마무리한 ‘송년 모임’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망년’이란 단어가 그렇게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현대인의 대사질환 대부분이 덜 먹어서가 아니라 너무 먹어서 유발되듯이 마음의 문제도 대부분 겪은 일들을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잊지 못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앞에 인용한 글을 쓴 제임스 맥고와 이반 이스쿠이에르두는 기억의 신경과학을 개척한 대가들인데 이들도 망각을 예찬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망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치매를 떠올리기 때문 아닐까. 가족의 얼굴도 못 알아보고 나중에는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치매는 정말 절망적인 질환으로 망각의 가장 어두운 면이다. 이는 뇌가 파괴된 결과 나타나는 병적인 망각으로 이 자리에서는 논외로 한다.

 

GIB 제공
GIB 제공

망각이 뇌의 디폴드 모드


학술지 ‘뉴런’ 8월 2일자에는 ‘망각(forgetting)의 생물학’이란 제목의 리뷰논문이 실렸는데 기억만큼이나 다채로운 망각의 면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 스크립스연구소의 로널드 데이비스 교수와 중국 칭화대의 죵이 교수는 동물이 살아가는데 기억의 습득과 공고화만큼이나 망각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동물이 겪는 숱한 경험 가운데 훗날을 위해 기억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건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 뇌에 들어온 방대한 데이터를 그때그때 선별해 남겨둘 것만 빼고 없애지 않으면 결국에는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스쿠이에르두는 그의 책 ‘망각의 기술’에서 “오늘 주차한 곳과 혼동하지 않으려면 이틀 전에 사무실 건물 주차장 어디에 차를 두었는지는 잊어버리는 편이 더 낫다”고 쓰고 있다.


논문의 저자들은 ‘항상성’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망각에 접근한다. 즉 경험을 통해 새로운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에서 뇌는 디폴트 모드로 망각 메커니즘을 작동시켜 새로 획득한 기억을 천천히 지워나가며 내일 또 겪게 될 정보의 홍수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경험의 데이터 더미 속에서 ‘남겨 두는 게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돼 뇌에서 별도의 작업을 한 결과가 (장기)기억이다. 


그런데 망각에 이 정도 ‘지위’를 부여하려면 그에 걸맞는 정교한 메커니즘이 갖춰져 있어야 할 것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런 것 같다. 기억이 여러 종류가 있듯이 망각도 여러 유형이 있고 여기에 관여하는 생체분자들도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


우리가 뭔가를 경험하면 뇌의 해마나 편도체, 대뇌피질에 있는 신경세포(뉴런)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 기억이 형성된다. 이처럼 특정 기억을 지니고 있는 뉴런의 무리를 엔그램(engram)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근 연구는 이런 엔그램세포의 대다수가 망각을 통해 기억을 지우고 다시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거나 고립돼 인출(회상)이 안 된다고 한다.

 

우리의 경험은 뇌의 뉴런(엔그램세포)의 구조변화를 통해 기억으로 저장되는데 이를 엔그램(기억흔적)이라고 부른다. 망각은 엔그램이 소멸되거나 인출이 차단되는 현상으로 수동적(passive) 과정과 능동적(active) 과정으로 나뉜다. 최근 신경과학자들은 능동적 망각인 고유망각 개념을 제안했는데, 이에 따르면 망각세포도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 - 뉴런 제공
우리의 경험은 뇌의 뉴런(엔그램세포)의 구조변화를 통해 기억으로 저장되는데 이를 엔그램(기억흔적)이라고 부른다. 망각은 엔그램이 소멸되거나 인출이 차단되는 현상으로 수동적(passive) 과정과 능동적(active) 과정으로 나뉜다. 최근 신경과학자들은 능동적 망각인 고유망각 개념을 제안했는데, 이에 따르면 망각세포도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 - 뉴런 제공

수면이 망각 과정 억제해


망각은 작용 양상에 따라 수동적 망각과 능동적 망각으로 나뉠 수 있다. 먼저 수동적 망각은 기억을 담고 있는 뉴런이 죽거나 손상돼 해당 기억의 엔그램이 소멸되거나 오랜 기간 회상을 하지 않아 맥락을 잃어버렸거나 후에 겪은 비슷한 기억으로 회상이 방해를 받아(즉 전선이 끊기거나 엉켜) 기억이 떠오르지 않게 된 경우다. 이는 정교히 조절되는 메커니즘 없이 일어나는 망각으로 예전에는 이게 망각의 대부분이라고 생각됐다.


이런 수동적 망각 외에도 능동적 망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다양한 심리학 실험을 통해 드러났다. 먼저 동기화된 망각으로,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정서적인 타격이 큰, 잊고 싶은 기억을 억압해 망각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스쿠이에르두는 ‘망각의 기술’에서 “여성이 출산하며 겪은 고통스런 기억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둘째아이를 갖는 여성의 수는 아주 적을 것이다”라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인출유도망각으로 비슷한 범주의 여러 기억이 있을 경우 하나를 떠올리는 게 다른 것의 기억을 지우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과일-오렌지, 레몬’을 본 뒤 과일-오렌지만 회상연습(‘Fruit Or_’에 답하는 식으로)을 할 경우 나중에 ‘과일’ 범주에서 오렌지를 기억해낼 비율은 회상연습이 없을 때에 비해 높은 반면 레몬은 오히려 낮아진다. 이 경우 레몬의 엔그램이 없어진 게 아니라 인출하는 경로가 끊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간섭기반망각은 어떤 정보를 학습할 때 앞 또는 뒤에 다른 정보를 학습하게 할 경우 그 정보에 대한 기억형성이 방해를 받는 현상이다.


‘뉴런’의 리뷰논문은 심리학 연구결과인 위의 능동적 망각들을 짧게 설명한 뒤 최근의 신경과학 연구결과인 ‘고유망각(intrinsic forgetting)’이라는 개념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즉 뇌에는 ‘망각세포(forgetting cell)’가 있어서 디폴트 모드로 수시로 망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고유망각에 대한 첫 보고는 2010년 초파리의 냄새기억 연구에서 나왔다. 즉 초파리의 Rac1이라는 단백질이 여러 망각 메커니즘에 관여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고유망각이라는 것이다. 초파리의 뇌에는 도파민 뉴런의 한 종류인 망각세포가 있는데, 후각기억에 관여하는 버섯체뉴런(엔그램세포)과 시냅스로 연결돼 있다. 망각세포가 도파민을 분비하면 버섯체뉴런에서 Rac1이 발현돼 일련의 신호전달이 일어나고 그 결과 세포골격단백질인 액틴(actin)의 구조가 바뀌면서 저장된 기억이 사라지는 게 바로 고유망각이다.

 

초파리의 뇌에서 고유망각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도식화한 그림이다. 도파민뉴런 가운데 한 종류가 망각세포로 특정 냄새의 기억이 저장된 버섯체뉴런(엔그램세포)과 시냅스로 연결돼 있다. 망각세포가 시냅스로 도파민을 분비하면 엔그램세포에서 Rac1이 발현되면서 일련의 신호전달이 일어나 세포골격단백질인 액틴의 구조가 바뀌며 기억이 사라진다. - 뉴런 제공
초파리의 뇌에서 고유망각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도식화한 그림이다. 도파민뉴런 가운데 한 종류가 망각세포로 특정 냄새의 기억이 저장된 버섯체뉴런(엔그램세포)과 시냅스로 연결돼 있다. 망각세포가 시냅스로 도파민을 분비하면 엔그램세포에서 Rac1이 발현되면서 일련의 신호전달이 일어나 세포골격단백질인 액틴의 구조가 바뀌며 기억이 사라진다. - 뉴런 제공

흥미롭게도 망각세포의 활성은 초파리가 다른 감각자극을 경험할 때는 촉진되는 반면 잠을 자거나 쉴 때는 억제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경험으로 새로운 데이터가 쌓일 때는 기존 기억을 부지런히 지우고 그렇지 않을 때는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을 형성할 때만큼 지울 때도 생체분자가 동원되는, 즉 에너지가 들어가는 작업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럴듯한 현상이다.


한편 Rac1은 사람을 포함한 척추동물에도 있는 단백질이다. 그렇다면 사람에서도 비슷한 망각 메커니즘이 작동할까? 이에 대해서는 아직 실험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았지만 게놈분석연구결과 Rac1 유전자가 자폐 관련 질환과 연관돼 있다는 증거가 나왔다. 즉 Rac1 또는 그 신호전달 경로에 있는 유전자에 변이가 있을 경우 능동적인 망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사회성(융통성)이나 학습능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 품질 관리는 자기 하기 나름


이처럼 고유망각을 비롯한 다양한 능동적 망각에 더해 수동적 망각까지 갖추고 있음에도 연말에 ‘망년회’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쿠이에르두에 따르면 “모는 기억은 감정을 동반하고 감정적으로 가장 자극적인 기억이 대개 가장 잘 기억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고 싶은 기억, 즉 좀처럼 잊히지 않는 기억은 분명 꽤나 부정적인 감정과 연관돼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수반되는 감정의 강도가 약한 경험은 좀처럼 기억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가 공부다. 지적 호기심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학생도 없진 않겠지만 대부분은 매일 반복되는 수업에 무관심해지고 따라서 공부가 잘 안 되기 마련이다. 즉 배운 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이스쿠이에르두에 따르면 이는 당연한 현상으로 책에서 이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아래를 읽기 바란다.


이스쿠이에르두는 “대부분의 기억을 망각하는 이유는 조기에 인출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반복이 기억을 지속시키는 유서 깊은 방법이라는 건 오랜 상식이었다. 시, 노래, 악기, 구구단을 배우는 데 비교적 짧은 간격을 두고 반복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고 쓰고 있다. 즉 꾸준한 복습만이 공부를 잘 하는 길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잠을 충분히 자는 것이다. 잠이 기억을 공고히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와 더불어 고유망각 과정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이스쿠이에르두는 “진짜 망각은 뉴런이나 시냅스의 폐기 또는 소멸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는 시냅스나 뉴런, 세포의 죽음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라며(즉 자신의 책 제목 ‘망각의 기술’은 과장된 표현이라는 말이다) “반대로 기억을 유지하려면 정기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를 요구하고, 그래서 기술이다”라고 쓰고 있다.


설사 지금 머릿속이 좋지 않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떠올리려는 충동을 자제하고(이를 망각하기 위한 심리치료 행위가 아니라면) 대신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기억을 습득하고 유지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기억은 고유망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서서히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밴드 구글플러스

2017년 12월 19일 17:40 프린트하기

 

혼자보기 아까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해 보세요

네이버밴드 구글플러스

이 기사가 괜찮으셨나요?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14 + 10 = 새로고침
###
과학기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소개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고발 소재 등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제보하기

관련 태그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