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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남극에 가다 ②] 남극을 산책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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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24일 16:50 프린트하기

※ 편집자주 펭귄이 알을 품고 새끼를 노리는 새들과 사투를 벌이는 땅. 아문센을 비롯한 위대한 탐험가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개척한 곳. 범접할 수 없는 자연 속에서 소수의 선택받은 과학자들이 지구의 신비를 탐구하는 곳. 누구에게나 남극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당신에게 남극은 어떤 곳인가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구나 갈 수는 없는 곳이라는 거죠. 현지인도, 과학자도 아닌 사람의 눈으로 본 남극은 어떤 곳일까요? 극지연구소 남극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 전현정 어린이책 작가가 남극의 신비와 일상 이야기를 풀어줍니다.    

 

 

 

남극의 첫 인상, 무참히 깨지다 

 

세종 과학기지까지는 칠레 기지가 있는 킹 조지섬에서 조디악이라는 고무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 30분 쯤 더 가야 한다.

 

우리 일행은 보트를 타기 전 입고 온 외투 위에 위아래가 붙은 우주복처럼 생긴 구명복을 껴입고, 벨트를 바짝 조였다. 부푼 풍선처럼 둔해진 몸으로 보트에 대충 걸터앉으니 모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하얀 빙하가 점점이 떠 있는 에메랄드빛 호수 같은 바다를 기대했지만, 정작 잔뜩 찌푸린 하늘에선 비가 섞인 눈이 내렸고 회색빛 바다는 을씨년스러웠다.

 

조디악에서 본 남극 - 전현정 제공
조디악에서 본 남극 - 전현정 제공

그 사이 보트는 속도가 빨라져 몸을 가누기 힘들만큼 요동쳤고, 남극의 바다는 자꾸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보트 밖으로 튕겨 나갈까 손잡이를 꽉 잡은 손이 얼얼해질 무렵 눈앞에 하얗다 못해 푸른 기가 도는 얼음벽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위버 반도와 세종 기지가 위치한 바톤 반도 사이에 있는 마리안소만 빙벽이다.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스탠드 불빛처럼 빙벽은 온통 회색이던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매끈하게만 보이던 빙벽은 가까이 다가가니 여기저기 깎이고 패여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남극에서 처음으로 목격한 온난화의 현장이었다.

 

 

 

일년 중 세종기지가 가장 붐비는 날    

 

한참을 넋을 잃고 주변을 바라보는데 하얀 빙하와 회색의 바다 사이로 선명한 빨간색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바라 본 세종 기지는 하얀 눈밭위에 빨간색 레고 블록을 쌓아 놓은 것 같았다. 기지에 도착한 우리 일행을 제일 먼저 맞이한 건 망치질 소리와 중장비 차량의 엔진 소리,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이었다. 지어진 지 30년 된 세종기지는 숙소동과 연구동 건물을 새로 짓고 마무리 공사중이었다. 


남극 세종기지 전경 - 전현정 제공
남극 세종기지 전경 - 전현정 제공
세종 기지의 숙소동은 마무리 공사 중. 멀리서 본 빨간색 레고블록의 정체들 - 전현정 제공
세종 기지의 숙소동은 마무리 공사 중. 멀리서 본 빨간색 레고블록의 정체들 - 전현정 제공

12월이면 한국은 겨울이지만 반대로 남극은 여름이다. 외부 활동이 가능한 11월부터 2월까지는 일 년 동안 남극에 머무르는 월동대원 말고도 연구를 위해 찾아오는 연구자까지 함께 생활해 일 년 중 기지가 가장 술렁거리는 시기다. 게다가 이번 여름은 공사 인원까지 더해져 기지 안은 80명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풀 한포기 나지 않는 환경인데다 수렵과 채집이 엄격하게 금지된 남극에서 지내려면 식료품부터 연료와 휴지 치약 한 개까지 모두 외부에서 들여와야 한다. 1년 동안 기지에서 쓸 보급품 하역도 이맘때 이뤄지는데, 올해는 기상 때문에 선박 운항이 지연돼 보급품 지급이 한 달 가량 늦어졌다고 했다. 화장실엔 휴지가 귀했고, 샤워용품마다 절약이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식당엔 반찬 가짓수가 줄면서 빨간 김치대신 백김치와 인스턴트 반찬이 자주 나왔고 휴게실에 쌓아둔 간식도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었다.

 

이대로 보급이 계속 늦어지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한 월동대원이 웃으며 말한다.

 

“아직 라면은 남아 있으니까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여긴 남극이니까.”

 

듣고 보니 그렇다. 시장도 마트도 편의점도 없는 남극에선 기다리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세종 약국. 마트는 없지만 약국과 치료실은 언제나 대기 중 - 전현정 제공
세종 약국. 마트는 없지만 약국과 진료실은 언제나 대기 중 - 전현정 제공

 

남극 대원들은 어떻게 여가시간을 보낼까?

 

집을 떠나온 지 나흘 만에 남극에 잘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남극에서도 메신저 서비스로 간단한 문자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고, 인터넷 전화기로 통화도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과 시차가 12시간인데다 통화가 자주 끊기는 편이고 인터넷도 연결이 안 될 때가 더 많다.

 

체력단련실 풍경.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 각기 놀거리를 찾아냈다! - 전현정 제공
체력단련실 풍경.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 각기 놀거리를 찾아냈다! - 전현정 제공

사정이 이렇다보니 도시 사람들이 몸의 일부인양 들고 다니는 휴대폰을 남극에서는 종종 책상 위에 던져놓고 다닌다. 디지털 놀이기구가 사라진 남극에서 사람들은 아날로그 놀 거리를 찾아냈다. 낮에 업무를 마친 기지 대원들은 여가시간에 당구를 치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눈썰매를 타고, 책을 보거나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지만 말없이 각자 휴대폰만 쳐다보는 도시의 익숙한 풍경과 달리 서로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고 소리 내어 웃는 남극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인터넷과 휴대폰 없이 지낸다면 사람 사이 관계의 온도가 몇 도는 올라갈 지도 모르겠다. 

 

트래킹 중인 대원들,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휴대폰없이 지낸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 전현정 제공
트래킹 중인 대원들,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휴대폰없이 지낸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 전현정 제공



남극을 산책하다    

 

야외 활동을 하고 땀을 많이 흘리고 기지로 돌아온 어느 날, 샤워실로 달려갔더니 문 앞에 메모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물 부족으로 샤워와 빨래 자제 바람’

 

세종 기지에서 식수를 얻는 방법은 현대호라고 이름 지은 인공 호수 바닥에 방수포를 깔고 비와 눈이 녹은 물을 정수해서 쓰거나 바닷물을 담수화해서 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올 여름엔 눈이 적게 내려 가뭄이 심해진데다 기지 인원이 갑자기 늘어난 탓에 물이 부족한 것은 당연했다.

 

도시에서는 물건이 부족하면 공급량을 늘리지만 남극에서는 무언가 부족하면 당장 사용량부터 줄이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없는 대로 견디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는 아쉽지만 세면기에서 세수만 대충 하고 발길을 돌렸다. 

 

저녁을 먹고 해안가 근처를 산책하다보면 종종 펭귄들과 마주쳤다. 기지 근처에는 턱에 끈을 그려 놓은 것 같은 턱끈 펭귄과 젠투 펭귄이 주로 살고 있는데,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별로 없어서 가까이 지나가도 태연하게 털을 고르고, 소리를 내며 서로 몰려다니고, 얼음에 배를 깔고 누워 휴식을 즐겼다.

 

산책길에 만난 젠투펭귄. 남극을 산책하면 흔히 만날 수 있다 - 전현정 제공
산책길에 만난 젠투펭귄. 남극을 산책하면 흔히 만날 수 있다 - 전현정 제공

 

그 모습이 재미있고 신기해 구경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펭귄은 내가 서 있는 코앞까지 왔다가 돌아가곤 했다. 어쩌면 펭귄들도 내가 궁금했을 지도 모르겠다.

 

 

 

남극이니까


한 해 월동을 마친 대원들의 환송식이 있었다. 환송식이 끝나면 체험단과 함께 이틀 뒤 남극을 떠나기로 예정돼 있었지만 칠레 기지의 기상 상황 때문에 결국 비행이 취소됐다. 일 년의 남극 생활을 끝내고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적잖이 실망했을 텐데 대원들은 서로 마주보고 “남극이니까.”라고 합창을 하며 씩 웃고 만다.

 

그 후로도 짐을 쌌다 풀었다를 몇 번씩이나 반복해야했다. 이틀 뒤 새벽 두 시, 드디어 칠레 기지에서 비행 허가가 났다. 고무보트에 짐을 싣기 위해 장갑과 털모자로 중무장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신발을 신고 문밖을 나서려는데, 휴대폰을 보던 월동대장의 표정이 심각하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다.

 

“방금 비행 취소됐답니다.”

 

월동대장의 말에 나는 설마하며 “농담이시죠? 몰래 카메라죠?”하며 거듭 물었지만 월동대장은 고개를 젓는다. 순간 분위기가 착 가라앉는다. 그 때 누군가 헛웃음을 지으며 “할 수 없지. 남극이니까.”라고 한마디 하자 사람들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 날 새벽 사람들은 헛헛한 마음을 라면으로 달래고 다음 출발을 기다렸다.

 

남극에서는 계획한대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사람들은 지구의 끝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밤이 되어도 백야 현상 때문에 남극의 여름은 환하다. 열두시쯤 되면 일몰 때처럼 어스름해졌다가 새벽 한 두 시면 다시 밝아진다. 덕분에 남극에 있는 내내 시간 감각이 마비되어 불면증에 시달렸다.

  


밤 10시 30분 경의 모습. 백야 현상으로 환하다. 불면증은 덤...
밤 10시 30분 경의 모습. 백야 현상으로 환하다.


 

[동화작가, 남극에 가다] 다음 편은 '남극의 온실' 편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GIB 제공
GIB 제공

 

 

※ 필자소개

전현정. 대학에서는 집 짓는 법을 배웠고, 엄마가 돼서는 동화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글 짓는 법을 배우고 있다. <으랏차차 뚱보클럽>으로 19회 황금도깨비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헬로 오지니>, <니체 아저씨네 발레교실>, <퓰리처 선생님네 방송반>이 있다. 세종과학기지 준공 30주년 기념 남극체험단으로 선정되어 2017년 12월 킹조지섬 남극세종기지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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