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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남극에 가다 ③] 남극의 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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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31일 16:02 프린트하기

※ 편집자주.

펭귄이 알을 품고 새끼를 노리는 새들과 사투를 벌이는 땅. 아문센을 비롯한 위대한 탐험가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개척한 곳. 범접할 수 없는 자연 속에서 소수의 선택받은 과학자들이 지구의 신비를 탐구하는 곳. 누구에게나 남극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당신에게 남극은 어떤 곳인가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구나 갈 수는 없는 곳이라는 거죠. 현지인도, 과학자도 아닌 사람의 눈으로 본 남극은 어떤 곳일까요? 극지연구소 남극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 전현정 어린이책 작가가 남극의 신비와 일상 이야기를 풀어줍니다.    

 

자연과 떨어져 도심 속에 살고 있어도 우리는 매일 꽃과 나무와 더불어 살고 있다.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서는 허브가 자라고, 가로수로 심어진 벚꽃 나무는 바람에 꽃잎을 떨어뜨리고, 학교  담벼락 아래엔 민들레 홀씨가 날리고, 야채 가게에선 싱싱한 채소들이 주인을 기다린다. 사람이 사는 곳엔 늘 꽃과 나무가 있다. 초록의 식물이 없는 세상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조디악 보트에서 바라본 남극 세종 기지. 이 곳에 온실이 있다 - KBS 김동정 PD 제공
조디악 보트에서 바라본 남극 세종 기지. 이 곳에 온실이 있다 - 김동정 PD 제공
 


지구 끝에서 찾은 색, 초록

지구상에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이 한 군데 있기는 하다. 바로 남극이다. 남극에는 나무가 없다. 하지만 남극에도 식물은 존재한다. 잔디를 닮은 생김새에 흰 꽃을 피우는 남극좀새풀과 남극개미자리는 여름 한 철 세종 기지 근처에서 볼 수 있는 헌화식물이다. 온통 눈과 빙하로 덮인 남극 땅에 색을 입히는 것 대부분은 이끼와 지의류다.

 

기지 근처로 산책을 나가니 연한 초록색, 갈색, 검은색을 띤 이끼와 지의류가 막 녹기 시작한 바위를 양탄자처럼 덮고 있었다. 까만 양탄자 사이로 진한 연두색의 실타래 같은 덩어리가 눈에 띄었다. 지의류의 한 종류인 우스네아(Usenea)였다. 


지의류는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 수는 없지만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균류와 광합성으로 양분을 만드는 조류가 만나 ‘공생’의 삶을 선택한 지혜로운 생물이다. 열대의 사막에서 극지방까지 지구 곳곳에 살지 않는 곳이 없는 지의류는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독특한 생존법을 개발했다. 그건 바로 ‘성장을 멈추고 무조건 견디기’다. 북극에 사는 지의류 중 치즈지의는 100년 동안 겨우 약 1센티미터가 자란다고 한다. 10센티미터 자라는데, 1000년이 걸리는 셈이다.

 

기지 근처의 우스네아. 온갖 남극 땅에 색을 입히는 것은 이끼와 지의류이다. - 전현정 제공
기지 근처의 우스네아. 온갖 남극 땅에 색을 입히는 것은 이끼와 지의류이다. - 전현정 제공
눈 사이에 자란 지의류 - 전현정 제공
눈 사이에 자란 지의류. - 전현정 제공
죽은 듯 겨우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평생을 한 자리에 머물러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지의류에게 인간의 십 년 세월은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지의류가 견뎌온 시간의 무게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나는 무심코 밟았던 지의류에서 얼른 발을 땠다.  

 

 

남극 식물 농장  

남극체험단으로 선정되고, 남극에 관한 자료를 찾다 마음을 빼앗긴 사진 한 장이 있었다. 그건 바로 푸릇푸릇한 채소들이 자라고 있는 세종 기지 온실 사진이었다. 주변에서 흔하게 보아온 녹색 채소일 뿐이었지만 남극 땅에서 직접 본 초록의 잎들은 마치 자연 속에 없는 빛깔을 발견한 것처럼 신선하게 다가왔다.

 

온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겨우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통로 한 쪽에 모판들이 줄지어 서 있는 선반이 있다. 급수 시설에선 하루 종일 충분한 양의 물이 공급됐고, 태양광을 대신해 LED 형광등이 하루 종일 연약한 식물에게 빛을 공급하고 있었다. 인공 배양토가 들어있는 달걀 꾸러미 모양의 모판에서는 청경채, 치커리, 새싹 채소, 상추처럼 다양한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막 싹이 튼 것부터 새싹이 난 것까지 생장 속도도 제각각 이었다.

 

흙을 들여와 좀 더 규모가 큰 텃밭을 가꾸면 좋겠다는 말에 월동대원이 손사래를 쳤다. 외래종 유입을 막기 위해 남극엔 토양의 반입이 금지돼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남극에 오기 전 환경 교육을 받으면서 남극에 들어올 때 새 신발과 의복을 착용하라던 규정이 기억났다. 무심코 옷과 신발에 묻혀온 흙 속에 숨어있던 씨앗 한 개가 남극 땅 어딘가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는 상상을 하며 혼자 멋쩍게 웃었다.

 

남극의 온실에서 자라난 새싹. 자라나는 속도가 제각각이다. - 공승규 제공
남극의 온실에서 자라난 새싹. 자라나는 속도가 제각각이다. - 공승규 제공

남극의 고추

잎을 먹는 채소들 틈에 눈처럼 하얀 꽃을 피운 식물이 자태를 뽐냈다. 무성하게 자란 그 식물의 정체는 바로 고추였다. 하얀 꽃 밑으로 새끼손가락 굵기의 고추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중 한 개를 따서 베어 무니 금방 혀끝이 얼얼해졌다. 매운 맛이 제대로인 진짜 고추였다. 남극까지 와서 고추 맛을 보다니 왠지 감격스러웠다. 그런데 고추를 먹으면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비도 벌도 벌레도 없는 이 곳에서 어떻게 열매가 맺혔을까?’


월동대원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손’이었다. 곤충이 없는 남극에선 사람 손이 나비의 날개가 되고 벌의 다리가 된다. 인간의 눈에 비친 벌은 꿀을 찾아 아무 꽃에나 앉았다 일어나 몸에 꽃가루를 묻히고 날아다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벌은 백발백중 열매의 소식을 전해주는 타고난 중매쟁이다. 그에 반해 사람의 손은 벌처럼 정교하지도 않고, 짝을 맺어주는 감각도 떨어져서 소개팅은 성공보다 실패율이 훨씬 높다.

 

세종 온실에서 수확 중인 필자 - 전현정 제공
세종 온실에서 수확 중인 필자 - 전현정 제공

 

인간 배달부, 고추를 탄생시키다

세종 온실에서 직접 고추의 중매쟁이로 나선 한 월동대원에게서 고추 탄생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종 온실에서 고추는 수분의 과정이 필요 없는 다른 엽채류와 달리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했다. 고추를 위한 별도의 방이 마련되고, 온도까지 맞춰가며 세심한 관리가 시작됐다. 그 사이 꽃이 피고 수분시기가 다가오자, 월동대원은 꽃가루가 날리도록 꽃을 살짝 흔드는 방법으로 고추의 소개팅을 주선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다음은 면봉에 직접 꽃가루를 찍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꽃가루를 나르는 좀 더 적극적인 일대일 만남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또 실패였다. 이제 남은 단 하나의 방법은 수분에 성공할 때까지 인간 배달부들이 꽃가루 배달을 ‘무한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세종 온실에서 고추는 별도의 방에 온도까지 맞춰가며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다 - 전현정 제공
세종 온실에서 고추는 별도의 방에 온도까지 맞춰가며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다 - 김정민 제공

한 꽃에 한 번만 꽃가루를 찍어 나르던 것을 한 꽃에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나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고추가 한 그루가 아니라 여러 그루인데다 고추 꽃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는 상황이어서 그 많은 꽃들에 일일이 꽃가루를 배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 배달부들은 벌과 나비가 되어 꽃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여야 했다고 한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소개팅은 성공했고, 고추는 여기저기서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고 했다. 그 날 점심시간엔 체험단을 위해 온실에서 딴 채소와 고추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왠지 고추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시장에서 보던 갖가지 야채와 과일들이 자연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수확되고, 우리 식탁까지 오게 되었는지 평소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지구 곳곳에 살고 있는 꿀벌들이 이유 없이 사라지고, 소나무가 재선충으로 죽어가고, 철새들이 쉼터를 잃어가고 있다는 뉴스를 들어도 무감각했다. 자연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그물로 연결돼 있다. 하나의 종이 사라지면 그 종을 먹고 사는 또 다른 종이 사라지고, 그 그물의 끝엔 인간이 있다. 우리는 무엇이든 잃고 난 뒤에야 그 존재의 가치를 깨닫는다. 지구의 땅 끝에서 고추의 맛을 음미해 본다.

 

 

GIB 제공
GIB 제공

[동화작가, 남극에 가다]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 필자소개

전현정. 대학에서는 집 짓는 법을 배웠고, 엄마가 돼서는 동화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글 짓는 법을 배우고 있다. <으랏차차 뚱보클럽>으로 19회 황금도깨비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헬로 오지니>, <니체 아저씨네 발레교실>, <퓰리처 선생님네 방송반>이 있다. 세종과학기지 준공 30주년 기념 남극체험단으로 선정되어 2017년 12월 킹조지섬 남극세종기지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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