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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주년 삼일절, 독립운동 참여한 과학자들을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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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01일 07:00 프린트하기

올해는 삼일 만세 운동이 일어난지 99년이 되는 해입니다. 삼일 운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항하는 민족의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의거였습니다.

 

삼일 운동은 민족 대표 33인의 주도로 일어났지만, 사실 각계 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의 자리에서 노력해 왔습니다. 삼일절을 맞아 독립운동에 참여한 과학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과학대중화 외친 김용관 (1897-1967)

 

“우리의 모든 생활방법을 과학으로 개선하자! 일체 문화운동의 기초를 과학으로 쌓아 올리자! 다같이 손잡고 과학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분기하자!”

 

1934년 과학지식보급회 창립 발기문의 한 구절입니다. 독립을 위해 민족의 과학 역량을 키워야 함을 역설한 내용입니다.

 

김용관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과학의 날을 제정하고 발명 운동을 이끌며 과학 대중화에 앞장선 과학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한 독립운동가 6인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김용관
김용관

그는 1918년 경성공전 요업과를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도 다녀왔습니다. 1924년 경성공전 동기 현득용, 박길용 등과 함께 발명학회를 설립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 없이는 근대화와 산업 발전을 이룰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었죠. 발명가를 양성하고 연구 기관을 설립하려 노력했습니다.

 

발명학회는 정치가 윤치호, 시인 주요한 등의 저명 인사를 끌어들이며 조직을 재정비했습니다. 1933년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잡지 과학조선을 창간하며 과학 대중화 운동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34년에는 찰스 다윈이 세상을 뜬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했습니다. 이날 서울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기념식이 열렸고, 과학 강연과 과학기설 견학 등의 행사가 이어졌습니다.

 

조선중앙일보사가 제작한 과학데이 포스터 - 네이버 한국잡지백년2
조선중앙일보사가 제작한 과학데이 포스터 - 네이버 한국잡지백년2

이는 조선중앙일보사장이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보성전문 (현 고려대) 교장 김성수(1891-1955) 등이 참여한 과학지식보급회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이들의 활동을 경계했고, 1938년 5회 과학데이를 추진하던 김용관을 체포했습니다. 결국 과학지식보급회도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대중화 운동은 전시 총동원 체제를 추진하던 일본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헤이그 밀사이자 수학자, 이상설 (1870-1917)

 

이상설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에도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을 오가며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그가 수학 연구와 보급에도 기여한 수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1900년 우에노 기요시의 근세산술을 번역편집한 산술신서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이상설이 간도에 세운 서전서숙에서 교재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를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 수학 교육의 아버지로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주목할만 합니다.

의학으로 독립운동 도운 서재필 (1864-1951), 김필순 (1878-1919)
 

 

독립신문 발행인 서재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이기도 합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한 그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고생하다 다행히 부유한 후원자를 만나 공부를 하게 됩니다. 대학 졸업 후 의대에 진학, 1893년 의사가 됩니다.

 

그는 1895년 귀국해 김홍집 내각에서 고문으로 일했고, 이듬해 독립신문을 발간했고 독립협회도 설립했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정부와의 갈등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김필순은 1899년 지금의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에서 통역으로 일했으며, 1908년 제중원을 졸업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해 독립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11년 중국 간도로 가 한인 마을을 개척하고 병원을 운영하며 독립 운동을 했습니다. 모든 수입을 독립군자금으로 썼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1919년 일본인 의사에 의해 독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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