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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왜 이럴까?] 생명, 급진적 격변 vs 점진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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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25일 13:00 프린트하기

1793년 프랑스 파리에 국립 자연사 박물관(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이 설립됩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가 처형된 바로 그 해입니다. 5년 간의 격변기를 끝낸 것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죠. 나폴레옹은 프랑스가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과학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는 유럽을 착착 정복해 나가면서, 과학계도 역시 정복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영국 박물학은 아직 아마추어 수준이었고, 독일은 어디 내놓기도 어려운 수준이었죠. 19세기 유럽 과학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국립 자연사 박물관.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 설립된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유럽 박물학의 중추 기관으로 기능했다. 급진적 격변설을 주장하던 퀴비에와 점진적 생물변이설을 주장하던 라마르크는 죽는 날까지 학문적 싸움을 벌였다. 과연 누가 승리했을까? - wikimedia(cc)
프랑스 파리의 국립 자연사 박물관.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 설립된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유럽 박물학의 중추 기관으로 기능했다. 급진적 격변설을 주장하던 퀴비에와 점진적 생물변이설을 주장하던 라마르크는 죽는 날까지 학문적 싸움을 벌였다. 과연 누가 승리했을까? - wikimedia(cc)

 

 

조르주 퀴비에          

 

갓 설립된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12명의 교수를 뽑습니다. 그 중 무려 네 명이 화석을 연구하던 박물학자였습니다. 지질학의 바르텔레미 포자 드 생퐁, 무척추동물학의 장바티스트 피에르 앙투안 드 모네 슈발리에 드 라마르크(장바티스트 라마르크), 척추동물학의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 해부학의 조르주 퀴비에 등입니다. 하나 같이 과학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죠. 특히 퀴비에는 25살의 나이에 교수 자리를 얻게 됩니다. 대혁명의 혼란기에 운 좋게 자리를 얻은 것이죠.      

 

당시 유럽은 끊임없이 발굴되는 화석의 정체에 대해서 학계의 논란이 분분했습니다. 그런데 퀴비에는 나폴레옹 정부의 입맛에 딱 맞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노아의 홍수와 같은 ‘격변’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생물체가 떼죽음을 당해 한꺼번에 땅에 묻혔다는 것이죠. 이는 구교와 신교 모두의 협력이 필요했던 나폴레옹 정부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격변을 통해 모든 것이 멸종하고, 새로운 역사가 다시 쓰여진다는 개념은, 끊임없는 혁명의 도가니였던 프랑스의 상황에도 걸맞았죠.                

 

조르주 퀴비에. 그는 25살의 나이에 운 좋게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자리를 얻는다. 그리고 종교계와 나폴레옹 정부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연구를 발표하면서, 요직을 골라 얻으며 출세 가도를 걷는다. - wikimedia(cc)
조르주 퀴비에. 그는 25살의 나이에 운 좋게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자리를 얻는다. 그리고 종교계와 나폴레옹 정부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연구를 발표하면서, 요직을 골라 얻으며 출세 가도를 걷는다. - wikimedia(cc)


퀴비에는 승승장구합니다. 자연사 박물관장의 자리에 오르고, 내무부 장관과 제국 의원으로 뽑히면서 정치에도 깊이 개입합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약탈해 온 미라를 조사하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미라는 수천 년이 지났지만 현대인과 전혀 다르지 않다. 즉 과거의 것은 모두 멸종하고, 이후 모든 생명체가 새로 나타난 것이다”      

 

 

장바티스트 라마르크          

 

흔히 진화론의 창시자로 찰스 다윈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사실 다윈 이전에 아주 비슷한 주장을 내세운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입니다. 아마 중고등학교 때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보통 잘못된 진화론을 제시한 학자 정도로 가볍게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는 라마르크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일입니다.      

 

라마르크는 종의 기원이 나오기 무려 70년 전에 진화론의 핵심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비록 그의 주장은 틀린 것이 많지만, 이는 사실 다윈도 마찬가지입니다. 라마르크는 화석(fossil)이나 생물학(biology)라는 용어를 사실상 만든 사람입니다. 터무니 없는 것으로 여겨진 그의 주장 중 일부는 훗날 재발견되죠. 그래서 프랑스에서 출판된 책에는 라마르크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마르크는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의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다가 생물학 연구로 방향을 틀었죠. 하지만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의 삶은 굴곡으로 가득했습니다. 세 명의 여성과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으로 끝을 맺었죠. 여러 명의 자식들이 요절했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쉰 살이 되어서야 자연사 박물관 교수가 되었지만, 늘 실세 과학자 퀴비에의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장님이 되어 비참하게 죽습니다. 지금은 무덤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일생 자체가 힘겨운 투쟁의 연속이었죠.    

 

말년의 장바티스트 라마르크. 그는 말년에 눈이 멀어 장님으로 생을 끝마쳤다. 무덤을 쓸 돈이 없어 인근의 임시 무덤에 묻혔는데, 5년 후에 다시 파헤쳐져서 사라졌다.  - wikimeda(cc)
말년의 장바티스트 라마르크. 그는 말년에 눈이 멀어 장님으로 생을 끝마쳤다. 무덤을 쓸 돈이 없어 인근의 임시 무덤에 묻혔는데, 5년 후에 다시 파헤쳐져서 사라졌다.  - wikimeda(cc)

 

대표작 <동물철학>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조직과 형태가 눈에 띄지 않게 변화하고 있다. 어떤 생물 종도 진정으로 사라졌거나 멸종했다고 볼 수 없다. 생물은 의지를 가지고 자연의 계단을 기어오른다”      

 

 

퀴비에와 라마르크            

 

왕정을 뒤엎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파리 시민, 가톨릭 교회의 반란, 혁명 전쟁과 9월 학살, 공화정 수립과 루이 16세 처형, 공포 정치, 테르미도르 쿠데타, 총재 정부와 또다른 반란, 나폴레옹 대통령 집권 등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대혁명. 이는 불과 5년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러한 혁명의 분위기가 퀴비에의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요? 가톨릭과 나폴레옹 정부의 입장에 맞춰 화석을 연구하면서, 모든 생물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생물이 모조리 죽고 다시 창조되는 일이 반복된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천변지이, 즉 격변과 멸종으로 요약됩니다.                

 

Isidore Stanislas Henri Helman (1794). 루이 16세 처형(판화). 단두대에서 처형된 국왕의 목을 높이 들고 있다.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목숨을 잃었다. 국왕 처형에 찬성한 사람들도 역시 보복을 당해 수없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상당기간 내전과 쿠데타, 공포 정치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주장이, 바로 퀴비에의 격변설과 멸종설이었다.-wikimedia(cc)      
Isidore Stanislas Henri Helman (1794). 루이 16세 처형(판화). 단두대에서 처형된 국왕의 목을 높이 들고 있다.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목숨을 잃었다. 국왕 처형에 찬성한 사람들도 역시 보복을 당해 수없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상당기간 내전과 쿠데타, 공포 정치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주장이, 바로 퀴비에의 격변설과 멸종설이었다.-wikimedia(cc)      

 

라마르크는 공화정을 지지했지만, 혁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물의 의지와 노력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모든 생물은 삶에 대한 의지를 통해서 조금씩 진보하고 발전한다고 믿었죠. 그는 이를 생물 변이설(transformism)이라고 불렀는데, 진화론과 비슷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은 대를 이어 다음 역사로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용불용설과 획득형질의 유전설입니다.      

 

퀴비에와 라마르크는 당시 프랑스 박물학을 대표하는 두 학자였지만, 그들의 삶은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퀴비에는 높은 지위에 올랐고, 프랑스 학계를 한 손에 쥐고 흔들었죠. 그는 라마르크를 평생 공격했습니다. 영향력있는 정치인이자 과학계의 거물, 퀴비에에 반대하여 라마르크의 편에 설 학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라마르크는 고국 프랑스에서 평생 제대로 된 학문적 인정을 얻지 못합니다. 라마르크는 늘 음지에서 가난하게 연구했습니다. 25살이나 젊은 퀴비에가 던지는 수모를 참아가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에필로그            

라마르크의 주장은 결국 프랑스가 아닌 영국의 찰스 다윈에게 전해집니다. 다윈의 저작에는 라마르크의 생각이 많이 녹아 있습니다. 사실 영국은 제대로 된 자연사 박물관도 없었는데, 심지어 다윈은 자신의 헛간을 개조하여 연구실을 차렸죠. 영국의 박물학은 프랑스처럼 국가의 지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상류층의 우아한 취미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영국이 프랑스를 제치고 진화생물학의 종주국이 된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라마르크의 삶은 불우했지만, 그의 연구는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있다. 그가 최초의 진화적 가설을 제시한 지 200년이 지난 2014년 네이처 지는 라마르크주의에 대한 특집호를 편성했다. -네이처 지
라마르크의 삶은 불우했지만, 그의 연구는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있다. 그가 최초의 진화적 가설을 제시한 지 200년이 지난 2014년 네이처 지는 라마르크주의에 대한 특집호를 편성했다. -네이처 지

최근 들어 라마르크의 주장은 볼드윈 가설이나 후생유전학 등으로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마치 라마르크의 삶처럼 꾸준하게 조금씩 나아가고 있죠. 비록 그의 무덤은 찾을 수 없지만, 그의 연구는 수백 년 째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평소 그의 주장대로 ‘절대 사라지지 않으며’, ‘의지를 가지고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퀴비에의 주장은 이제 언급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과학사를 다룬 책에서 잠깐 등장하고 말죠. 그의 수많은 연구들은 완전히 ‘멸종’하여 땅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평소 그의 주장대로 ‘격변’하여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필자소개_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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