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내 마음은 왜 이럴까?] 나는 너를 의심한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밴드 구글플러스

2018년 07월 29일 15:00 프린트하기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입니다. 힘을 합쳐 믿고 사는 신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지만, 신문 사회면을 들춰보면 이상과 현실은 태평양과 대서양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기에 가까운 상술, 노골적인 정치인의 거짓, 정부의 기만적인 대책 등이 그득합니다. 말 그대로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입니다. 의심을 안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면 아래에는 ‘믿을 만한 제품’, ‘신뢰의 기업’이라는 광고 카피가 보입니다.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광고 문구이지만, 효과는 꽤 확실합니다. 빈 말이라도 붙잡고 싶은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죠. 모두를 의심하면서도, 정작 사기꾼은 철썩 같이 믿는 사람의 속고 속이는 세상. 참 이상한 일입니다.

 

GIB 제공
GIB 제공

 

 

의처증, 의부증

 

의심의 나라를 지배하는 왕은 의처증, 여왕은 의부증입니다. 친족 살인 및 이혼의 상당수는 배우자의 정절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영아 학대도 불륜과 관련이 많습니다. 영아 살해의 상당수는 생물학적 부모가 아닌 경우, 즉 의붓가정에서 훨씬 많이 일어납니다. 친자식에 비해서 무려 100배에 달합니다. 애꿎게도 죄없는 아이에게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나 배우자에 대한 의심은 대개는 근거가 빈약합니다. 의처증, 의부증이 심한 사람은 정신의학적으로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본인이 가진 무의식적 욕망을 투사하는 경우도 있죠. 의심은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발전하곤 합니다. 왕년의 영화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의처증을 앓았는데, 아들인 마이클 더글라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엄마가 또 바람을 피우는구나. 내가 눈을 깜박거리는 찰나의 순간에 말이다’. 

 

 

행복해야 할 부부 관계는 지옥으로 변합니다. 이혼 신청을 하는 이유는 남녀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남성은 주로 배우자의 불륜을, 그리고 여성은 주로 배우자의 폭력성을 이혼 사유로 꼽습니다. 그런데 배우자의 폭력도 역시 정절에 대한 의심이 주된 원인입니다. 모두 상대를 의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적 결과죠. 


의처증과 의부증은 왜 일어날까요? 진화심리학에서는 배우자에 대한 의심의 경향이, 적응적 이익을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질투와 의심은 배우자의 부정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죠. 상대의 잘못된 행동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정절을 확고하게 하는 이익이죠.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서면 이익은 손해로 둔갑합니다. 가정을 지키려고 질투를 한다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되어버립니다. 

 

의처증과 의부증은 부부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지만, 진화적인 면에서는 적응적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 pixabay 제공
의처증과 의부증은 부부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지만, 진화적인 면에서는 적응적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 pixabay 제공

 

 

프로 의심꾼

 

의심의 대상은 무궁무진합니다. 프로 의심꾼의 편집성은 사실상 모든 세상을 향합니다.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작은 거래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어떤 말을 해도 나쁜 의도가 숨겨졌을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타인은 모두 자신을 해치거나 착취하려는 사람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친구나 동료도 믿지 못합니다. 타인에 대한 마음 속 신용도는 무조건 최하 등급에서 시작하고, 좀처럼 올려 주지 않습니다. 조금만 수상해도 바로 최하등급으로 떨어뜨리죠. 


의심이 심해지면 말수도 적어집니다. 자신의 말이 악의적으로 이용될 것이라고 걱정하기 때문이죠. 주변 사람이 따뜻한 이야기를 해주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으니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어쩌다 피해라도 입으면 절대 툭툭 털어버리지 못합니다. 원한은 하늘을 찌릅니다. 평생토록 오랫동안 앙심을 품습니다. 


협력적 관계를 맺기 어렵고, 친구도 없어집니다. 높은 보복성과 잦은 위협 시도로 인해 역공을 당하기도 합니다. 의심은 의심을 낳고, 삶은 점점 지옥으로 바뀝니다. 안으로만 움츠러들다가, 어떤 계기가 있으면 크게 폭발하죠. 과도한 의심이 낳는 불행한 삶입니다.  

 

GIB 제공
GIB 제공

 

 

의심 권하는 사회

 

과도한 의심 경향은 타고난 성향에 의해 좌우되지만, 환경에 따라 바뀌기도 합니다.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하거나 새로운 마을로 이사를 가는 경우 의심이 좀 많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실제로 낯선 문화나 언어를 가진 나라로 이민 가는 경우, 종종 의심병이 크게 악화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DNA에 새겨진 본능은 새롭고 낯선 상황이라는 환경을 만나면 의심의 불을 당깁니다.  


과거의 인류는 거의 한 부락에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낯선 언어와 문화를 가진 사람은 ‘외적’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어쨌든 낯선 사람에 대해서는 일단 보수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안전할 지도 모릅니다. 비슷한 옷차림과 언어 습관, 예절 등은 서로가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낯선 외국에서 한국인을 보면 반가운 이유죠. 심지어 일본이나 중국인을 만나 목례만 나누어도 마음이 조금 놓입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현대인은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도 반갑게 인사하고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과거처럼 작은 부락에서 모두가 잘 아는 사이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세계화 시대에는 인종과 언어가 다른 사람도 만나서 같이 어울려 지내야 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과 반갑게 교류하고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인류가 가진 의심의 오랜 본성을 거스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오랜 전통과 관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다른 문화와도 걸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는 것이 훨씬 힘들어졌습니다. 과거에는 평생 볼 사람과 어울리면서, 모두가 공유하는 전통과 관습에 따라 행동하면 큰 무리가 없었죠. 그런데 이제는 하나하나 따져보아야 합니다. 의심을 위한 인지적 부하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납니다. 

 

의심은 분명 적응적 이익이 있는 심리적 모듈이지만, 다양한 사람과 수많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도한 의심은오히려 부적응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 pixabay 제공
의심은 분명 적응적 이익이 있는 심리적 모듈이지만, 다양한 사람과 수많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도한 의심은오히려 부적응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 pixabay 제공

 

 

사회적 신뢰와 믿음이라는 자산

 

사회적 믿음은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자산입니다. 신용 사회에서는 과도한 의심에서 오는 비용이 절약됩니다. 그 이익은 모두가 향유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신뢰 학교와 의심 학교가 있다고 해보죠. 신뢰 학교에는 모두 정해진 날에 모두 모여 시험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시험 감독도 필요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채점도 필요 없습니다. 각자 원할 때 시험을 치르고, 스스로 채점하여 결과를 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의심 학교는 다릅니다. 시험지의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경찰이 밤샘을 하며 지켜야 합니다. 시험 문제를 낸 선생님은 가두어 두고, 시험 날에는 신원을 몇 번이고 확인합니다. 출제자와 경찰을 감시하는 2차 감시자를 두어야 하고, 2차 감시자를 감시하는 3차 감시자도 필요합니다. 시험의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 단지 공정성을 위해서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오랜 전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마땅히’ 다들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공유된 믿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법과 규칙으로 이를 메우려고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신뢰라는 공유지를 낭비해버린 대가입니다. 우리는 모두를 의심하고, 그 의심의 비용을 대느라 허덕이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의심 권하는 사회입니다. 


물론 진화적 소수 전략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양심적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부의 무임승차를 막는 것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무임 승차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주 많아서 무려 백 명에 한 명은 무임승차자라고 해보죠. 공정성을 위해서라면 모든 사람의 신원과 승차권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합니다. 아마 기차역마다 긴 줄이 늘어서고, 열차는 제 시간에 출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차장의 의심이 과도하면, 모든 승객은 ‘공정하게’ 열차를 타지 못합니다. 

 

 

에필로그

 

한 의처증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의심이 너무 심해서 아내를 집에 거의 가두다시피 했습니다. 바람을 피울 가능성은 원천 봉쇄되었겠지만, 과연 무슨 행복이 있을까요? 무임승차자의 비유는 인간의 직관적 믿음에 반합니다. ‘그렇다면 무임승차자를 그냥 눈감아 주라는 말인가’라는 반박을 받기 십상이죠. 그러나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무임승차자도 어느 사회, 어느 집단에나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들을 막기 위해서 과도한 자원을 투입하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입니다. 무임승차자가 예뻐서 그러자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양심으로 가득한 시민이 된다면, 그때는 차표 검사를 중단하겠다는 목표는 영원히 달성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몇 명의 무임승차자는 어쩔 수 없이 용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차가 출발할 수 있습니다. 신뢰를 통해 얻는 모두의 이익을 경험하려면, 일단 상대를 믿고 보아야 합니다. 의심은 의심을 낳습니다. 100% 신뢰할 사람만 찾는다면, 그 누구도 당신의 연인, 친구, 동료가 될 수 없습니다.  

 

 

 

※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 과정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등을 썼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밴드 구글플러스

2018년 07월 29일 15:00 프린트하기

 

혼자보기 아까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해 보세요

네이버밴드 구글플러스

이 기사가 괜찮으셨나요?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20 + 8 = 새로고침
###
과학기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소개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고발 소재 등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제보하기

관련 태그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