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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왜 이럴까?] 규율과 복종으로 스스로 옥죄는 삶...강박성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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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8월 19일 15:00 프린트하기

친구와의 즐거운 점심 약속을 한 남자. 하지만 짜증이 밀려옵니다. 친구가 무려 3분이나 늦었기 때문이죠. ‘남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그의 인생을 빼앗는 것’이라는 경구가 떠오릅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한 남자는 식당으로 향합니다. 그때 친구가 말합니다. 

 

“아, 지갑을 두고 왔네. 오늘은 네가 좀 사라.”

 

남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친구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친구 사이의 돈 거래는 우정을 깬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한번 친구에게 예외를 허락하면, 오히려 친구의 불성실한 태도를 조장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암. 친구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그래서는 안되는 일.

 

“아. 미안해. 먼저 식사를 할 테니, 너는 다시 지갑을 가져오는 것이 좋겠어.”
     

조금 망설이다 이렇게 대답한 남자는 혼자 식당에 들어갑니다. 식사비를 대신 내주기에는 너무 값비싼 레스토랑일까요? 아닙니다. 고작 5000원짜리 메뉴의 구내 식당입니다. 

 

GIB 제공
GIB 제공

 

강박과 양심
     
양심이란 참 역설적인 개념입니다. 국어 사전에는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양심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내적 판단을 통해서 옳은 일, 선한 일을 찾아서 할테니까요. 

 

하지만 옳은 행동이 모이면, 옳은 결과를 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양심이 과한 사람은 흔히 아주 비양심적인 행동을 저지르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엄격한 도덕 원칙과 업무 성과를 강요하기 때문이죠. 융통성도 없고, 관용도 없습니다. ‘옳지 않은 일’에 관용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에 타협하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주변 사람은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떠나갑니다. 선한 의도대로 선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적군과 싸운다든가 부정부패에 맞선다든가 하는 일이라면 양심적 행동이 크게 칭찬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강박적인 사람이 가진 내적 기준은 보통 그렇게 거대한 것도 아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친구에게 빌려준 500원을 영영 잊지 못하고, 실수로 두 번 찍힌 교통카드 때문에 전체 이용 내역을 뽑아 이의신청을 하고, 깡통을 넣는 분리수거통에 플라스틱 통을 집어 넣었다고 ‘지구의 파괴자’라도 된 듯 몰아세우거나, 다리가 아파서 임산부 배려석에 잠시 앉은 남성을 천하제일의 마초 무뢰한 정도로 취급하는 그런 부류입니다. 
  

로마군의 귀갑 방패진. 질서와 원칙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강박성이심해지면 수단이 목적으로 전락하고, 한번 뿐인 삶은 숨막히는 내적 질서와 규율에 대한 복종으로 가득 차 버린다. - wikipedia
로마군의 귀갑 방패진. 질서와 원칙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강박성이 심해지면 수단이 목적으로 전락하고, 한번 뿐인 삶은 숨막히는 내적 질서와 규율에 대한 복종으로 가득 차 버린다. - wikipedia

 


마음 속 게슈타포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모든 계획은 분 단위로 나뉘어지고, 각각의 목록과 순서, 규칙이 제정됩니다. 머리 속에 담을 수 없는 수준으로 계획이 방대해지면, 종이에 적기 시작합니다. 종이가 너무 많아지면, 종이를 분류하는 규칙을 만들고, 각각에 라벨을 붙여 보관합니다. 종이를 분류하는 규칙을 적은 종이가 많아지면, 그에 대한 메타 규칙을 제정합니다. 

 

화성 탐사를 진행하거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는 중이라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강박성이 심한 사람은 과도한 계획과 통제에 대한 집착을 삶의 전 영역에 투사합니다. 식사 준비나 청소, 책상 정리 같은 소소한 일도 아주 복잡한 규칙과 순서에 따라 진행해야 합니다. 심지어 아무렇게나 편안하게 앉아있으려는 거실 소파도 ‘아무렇게나’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렇게나’ 앉는 것도 일종의 규칙이 있는데, 만약 정해진 대로 ‘아무렇게나’ 앉지 않고 정말로(!) ‘아무렇게나’ 앉으면 마음이 아주 불편해집니다. 

 

도무지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게슈타포가 마음 속에 있는 것이죠. 삶의 자유는 말살되고, 자율적인 행동은 금지됩니다. 자신이 만든 법과 규정에 얽매여서 단 한번의 인생을 스스로 옥죄며 살아갑니다.

 

GIB 제공
GIB 제공

 

강박성의 진화
     
기본적으로 강박성은 소극적 생존 전략입니다. 이들은 쾌락을 추구하기보다는 고통을 회피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이익보다는 손해를 줄이는 것이 우선입니다. 물론 과도한 강박성은 오히려 비효율성을 악화시켜서 손해가 발생하게 됩니다만. 


그리고 보통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물론 타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요구가 선순위입니다. 그러면서도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다른 성격, 즉 연극성이나 자기애성, 반사회적 성격과 다른 점이죠. 후자는 스스럼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나쁘게 말하면 좀 뻔뻔하죠. 하지만 강박성이 심한 사람은 내적 갈등에 시달립니다. 고민을 거듭하지만, 결국 결론은 자신의 이익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요구와 자신의 내적 소망 사이의 긴장을 조절하기 위해 강박적 의례에 집착합니다. 예를 들어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말에 자녀들과 놀아주는 것도 역시 아버지의 의무죠. 그래서 ‘매달 첫째 주말은 자녀와 시간을 보낸다’는 식으로 규칙을 만듭니다. 그러면 나머지 석 주는 놀아주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이 편해집니다. 하지만 같이 놀아주는 단 한번의 주말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시간 낭비를 줄이려고 미리 철저한 계획을 세웁니다. 즐거운 산행이 아니라, 유격 훈련입니다. 신나는 공차기 놀이는 가혹한 축구 교습으로 돌변합니다. 그래야 주말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고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들은 생태적 환경을 능동적으로 유연하게 바꾸는 스타일이 아니라, 경직된 태도로 따르려는 스타일입니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철저하게 복종하고, 낮은 사람에게는 과도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이른바 바람직한 질서와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죠. 환경에 따른 유연한 타협이 보다 유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위 ‘올바른’ 방법만을 고집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기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물건에 손 대는 것은 극도로 싫어합니다. 새로운 물건을 사는 일은 드물지만, 옛 것을 버리는 일도 더욱 드뭅니다. 집은 점점 잡동사니로 가득 찹니다. 돈도 아끼고 지출도 줄입니다. 은행 잔고는 그득한데, 평생 고물이 가득한 낡은 집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타입입니다. 
     

미국의 대 재벌 하워드 휴즈는 심각한 수준의 강박증을 앓았는데, 아마 잦은 비행기 사고에 의한 뇌손상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그는 다양한 첨단 비행기를 직접 설계하고, 영화를 제작하고, 수많은 기업 집단을 운영하였으며, 지금의 라스베가스를 만든 인물이었다. 하지만 말년에는 강박증이 악화되어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호텔에 다른 사람이 묵는 것이 두려워 호텔을 통째로 사버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방 안에서 고립되어 지내다가 영양실조로와 약물남용으로 사망했다. -wikipedia
미국의 대 재벌 하워드 휴즈는 심각한 수준의 강박증을 앓았는데, 아마 잦은 비행기 사고에 의한 뇌손상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그는 다양한 첨단 비행기를 직접 설계하고, 영화를 제작하고, 수많은 기업 집단을 운영하였으며, 지금의 라스베가스를 만든 인물이었다. 하지만 말년에는 강박증이 악화되어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호텔에 다른 사람이 묵는 것이 두려워 호텔을 통째로 사버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방 안에서 고립되어 지내다가 영양실조로와 약물남용으로 사망했다. -wikipedia

 

건강한 강박
     

강박성은 별로 유리할 것이 없는 성격 같습니다. 하지만 강박이 종교나 문명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는 오랜 주장이 있습니다. 사실 종교적 의례는 ‘비실용적인’ 과정으로 가득합니다. 제사상을 차리고, 절을 하는 세세한 규칙과 규정부터, 예배와 미사, 예불의 다양한 절차와 관습. 이 모든 과정은 강박적으로 진행됩니다. 수천년이 지나도 잘 바뀌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입는 옷이나 먹는 음식, 다양한 통과 의례(성년, 결혼, 출산, 장례 등)는 문화에 따른 강박적인 전통과 절차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약속’이 깨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합니다. 마구 화를 내거나 싸우고, 심지어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기원에는 생태적 적응을 위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 본연의 적응적 이익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냥 그렇게 ‘강박적으로’ 굳어진 것이죠. 


그런데 원시 사회에서 강박성이 높은 사람들은, 혹시 집단의 전통과 관습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들은 다양한 규칙과 규율을 배우고, 지키고, 전수했을 것입니다. 과거부터 내려오던 것이라면 열심히 모으고 지키고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이 머릿속의 생각이든 사용하는 물건이든 상관없습니다. 문자 언어가 생긴 이후, 이들은 또다른 엄청난 일을 시작했습니다. 강박적으로 기록하고 또 기록했던 것이죠. 죽은 사람으로는 미라를 만들고, 무덤에는 부장품을 넣었습니다. 도저히 버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과도한 해석일까요? 강박성은 빈틈없이 전통적 의례를 고수하는 훌륭한 사제이자, 한 획의 틀림없이 역사를 기록해 나간 사관 (史官)에게 꼭 필요한 자질입니다.


조금의 강박성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멋대로 융통성을 부리려는 사람이 넘치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자신만의 원칙을 고집스레 지키려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 분이 너무 많으면 세상이 답답해지겠지만, 그래도 그런 ‘답답한’ 분들이 세상에 늘 같이 있어주면 좋겠습니다. 조변석개하는 변덕스러움이 유연한 태도로 미화되는 오늘날, 그래도 묵묵하게 자신만의 원칙을 강박적으로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옛날에는 숙지황을 사면 보통의 것은 얼마, 그보다 나은 것은 얼마의 값으로 구별했고, 구증구포(九蒸九暴)한 것은 3배 이상 비쌌다. 구증구포란, 찌고 말리기를 아홉 번 한 것이다.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이나 찔 리도 없고, 또 말만 믿고 3배나 값을 더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훌륭한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 윤오영, <방망이 깍던 노인>에서

     
강박성 성격을 가진 사람 중 상당수는 ‘강박’을 벗어나야 한다는, 역설적 ‘강박’에 시달리곤 합니다. 물론 과도한 강박성으로 자신과 주변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강박성은 그렇게 파괴적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신과 가족, 주변의 삶을 크게 훼방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강박성은 스스로에게 조금 ‘유연하게’ 허용해주는 것도 좋겠습니다. 


고집스럽게 전통과 관습을 고집하는 분이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세상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도대체 그렇게까지 해봐야, 과연 누가 알아주느냐고 잔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런 분들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반드시 아홉번을 찌고 말려야 내 속이 편안해진다는 마음, 즉 구증구포의 건강한 강박성을 가진 분 말이죠. 

     

※ 필자소개

박한선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 과정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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