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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왜 이럴까?] 아쉽지만, 안녕이라고 해야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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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9월 16일 13:00 프린트하기

정말 아쉽지만 작별인사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직 충분한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했지만, 그런 아쉬움을 뒤로 두고 떠나 보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도 헤어집니다. 피를 나눈 가족도 떠나갑니다. 그렇게 삶은 헤어짐의 연속입니다. 분리의 경험은 아주 고통스럽지만, 또한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과 헤어질 뿐 아니라, 과거의 나 자신과도 헤어져야만 합니다. 

 

GIB 제공
GIB 제공

 

개체발생적 적응

 

한때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 사라지는 생물학적 현상이 있습니다. 이를 개체발생적 적응(ontogenic adaptation)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태반입니다. 태반은 사실 태아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태아의 일부입니다. 어머니의 몸 안에서 영양소와 산소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태반이 없으면 태아의 성장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38주의 재태 기간이 끝나면, 아기는 자신의 일부였던 태반과 작별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 있는 지방은 크게 백색 지방과 갈색 지방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갈색 지방은 어른에겐 거의 없습니다. 주로 갓난아기의 목과 볼, 어깨 등에 붙어서, 열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갓난아기는 체온을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 갈색 지방이 몸에서 사라집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갈색 지방이 남아있으면 큰 질병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노란 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는 정말 부드럽고 귀엽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노란 털은 사라지고, 굵고 긴 깃털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생애사의 특정 시기에 꼭 필요했지만,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조직은 없어집니다. 서운하다고 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해서, 어른이 되어서도 태반이나 갈색 지방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연의 순리입니다. 

 

신생아는 어깨와 목 부분에 갈색 지방이 분포하여, 체온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곧 사라진다. 특정한 생애기간에만 존재하는 진화적 형질을 개체발달적 적응 현상이라고 한다. - FLICKR 제공
신생아는 어깨와 목 부분에 갈색 지방이 분포하여, 체온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곧 사라진다. 특정한 생애기간에만 존재하는 진화적 형질을 개체발달적 적응 현상이라고 한다. - FLICKR 제공

 

정신의 개체발생학적 적응

 

이러한 개체발생학적 적응은 신체적 수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인간에게는 정신적 형질의 개체발생학적 적응이 두드러집니다. 


갓난아기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쪽쪽 빨아댑니다. 무의식적인 빨기 반사죠. 이러한 행동상의 특징은 특정한 시기에만 존재하다가 곧 사라집니다. 대략 생후 2-3개월이면 사라집니다. 물론 이후에도 빨기 행동은 지속되지만, 자동 반사가 아니라 의식적인 빨기 행동입니다. 


신생아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자동 반사는 잘 연구되어 있습니다. 머리의 위치가 바뀔 때 팔 다리를 쫙 폈다가 껴앉는 모로 반사, 얼굴을 돌릴 때 같은 쪽 팔 다리를 곧게 펴는 펜싱 반사, 한쪽 척추를 쓰다듬으면 그 방향으로 하체를 구부리는 갈란트 반사, 손에 물체가 닿으면 꼭 쥐는 파악 반사 등이죠. 그런데 이러한 자동 반사가 아니라 보다 고등한 정신적 기능에서도 역시 개체발생학적 적응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린이의 생각을 했으나

 

“어렸을 때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을 버렸습니다”. - 고린도전서 13:11, 공동번역.

 

이 성경 구절은 물론 보다 깊은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겠지만, 진화생물학적인 함의도 상당합니다. 젊은 시절을 지배하던 욕망과 주장, 생각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 둘 사라져갑니다. 진화생애사적 이론에 의하면, 각 연령 대에 주로 작동하는 인지적 모듈은 생애사적 과업에 최적화되도록 조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는 노는 것을 좋아하죠. 놀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는 상담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유년기의 놀이는 특화된 기술적 행동을 익히고 신경근육계를 단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매일매일 끝없이 놀고 싶어합니다. 


너무 놀다가 야단을 맞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런 꿈을 꾸곤 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원없이 놀겠다는 것이죠. 하지만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노는 것이 별로 재미없습니다. 몇 시간이고 로보트를 가지고 싸우는 상상을 하고, 해가 지도록 인형을 들고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저게 뭐가 재미있다고 그렇게 신나서 노는 것일까? 이제는 누가 돈 주고 놀라고 해도 못할 것 같습니다. 


인류는 다른 포유류와 달리 아주 긴 성숙 기간을 가집니다. 대략 20년에 달합니다. 따라서 성장 기간 동안 가지고 있던 다양한 생각과 욕구, 관계, 감정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미숙하고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가장 중요한 정신적 활동이었습니다.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유년기의 기억입니다. 

 

사방치기(hopscotch), 테오필 두버거 작, 1901년. 아마 바닥에 줄을 긋고 폴짝거리며 뛰는 놀이인 사방치기를 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더 이상 재미있지 않다. 인간의 심리적 형질의 상당수는 특정 생애사 기간에만 배타적으로 활성화된다. - 위키피디아 제공
사방치기(hopscotch), 테오필 두버거 작, 1901년. 아마 바닥에 줄을 긋고 폴짝거리며 뛰는 놀이인 사방치기를 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더 이상 재미있지 않다. 인간의 심리적 형질의 상당수는 특정 생애사 기간에만 배타적으로 활성화된다. - 위키피디아 제공
 

 

나에게 작별을 고해야 할 때 

 

이러한 적응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지속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러 단계의 생애사적 단계를 밟는 현상은 인간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동료와 경쟁하고, 선호하는 짝을 탐색하고,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낳아 양육하고, 자녀의 혼인을 준비하고, 손주의 양육을 보조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은 다양한 과정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보다 유용한 정신적 형질의 종류가 서로 다릅니다. 


사회적 자원을 획득하는 초기 성인기에는 야심과 경쟁심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운동 경기와 같은 경쟁적 과업에 몰두합니다. 그런 활동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고 보니, 이제는 그다지 재미있지 않습니다. 그냥 늙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경쟁적 활동을 위한 정신적 형질이 사라져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갈색 지방처럼 말입니다. 


이성을 보고 두근거리던 마음도 점점 시들해 집니다. 안정적인 관계를 추구하게 되고, 불필요한 갈등이나 과도한 자극은 꺼려지게 됩니다.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울증이 온 것도 아니고, 세상살이에 지친 것도 아닙니다. 이제 그럴 때가 온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성숙함보다는 젊음을 숭상하고, 신중함보다는 미숙함을 외려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서 생애사적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당연한 심리적 변화를, 마치 노화나 질병의 징조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년 이후에 나타나는 정신적 변화는 뭔가 못나거나, 고리타분하거나,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합니다. 각자 제 나이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하기보다는, 젊은이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오래오래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십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젊음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서 칭찬합니다. 손가락을 빠는 초등학생에게, ‘아직 신생아기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하는 격입니다. 
 

 

에필로그


젊은 시절에는 세상을 뒤엎어버릴 것 같은 패기가 있었고, 한번 시동이 걸리면 며칠이고 밤을 새워 공부하던 열정도 있었고, 되던 안되던 부딪히고 대쉬하던 객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당신을 이루고 있던 정신적 가치들은, 마음 속의 갈색 지방처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비겁하게 세월에 굴복한 것도 아닙니다. 정신이 늙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그럴 때가 온 것 입니다. 


변치 않고 살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방치기를 하는 초등학생에게, 자신도 끼워주라며 조르는 철없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이의 것을 버려야 합니다. 아쉽지만 과거의 나에게 작별을 고해야 합니다. 

 

 

 

※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 과정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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