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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왜 이럴까?] 존재를 위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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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3일 10:00 프린트하기

진화론 창시자 찰스 다윈은 1859년 발간된 ‘종의 기원’ 초판 제3장에 ‘존재를 위한 투쟁(struggle for existence)’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진화론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 자연 선택을 다루고 있는 장입니다. ‘존재를 위한 투쟁’은 다윈 진화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입니다. 동시에 다양한 분야에서 제멋대로 오용된 역사를 가진 용어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존재를 위한 투쟁’을 다른 말로 순화해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투쟁이라는 어감이 왠지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죠. 자력갱생할 수도 있고, 서로 협력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존재라는 말도 좀 어려운 철학 용어 같아서 생존으로 바꾸거나 아예 삶 정도로 대신 사용하기도 합니다. 따옴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어에서도 그렇게 쓰곤 합니다. 그러면 ‘삶을 위한 노력’ 정도로 되겠네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순화한다고 해서 ‘존재를 위한 투쟁’의 본질이 더욱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는 냉혹하고 삶은 거칩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며 대를 이어간다는 말이 보다 본질에 부합합니다. 보고 싶지 않고 믿고 싶지 않지만 자연의 세계는 원래 그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책 ‘동물사(History of Animals)’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살아야 하거나 같은 먹이를 먹어야 하는 동물 간에는 적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동물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다른 동물을 먹는 동물은, 내일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의 엄중한 진리죠. 어떤 동물도 피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동물의 생명을 빼앗고, 언젠가는 자신도 다른 동물의 삶을 위한 재료가 될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토머스 홉스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imini lupus)’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고독하고 가난하고 추악하고 야만스럽고 짧은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했죠.

 

조지 고다드 작. ‘존재를 위한 투쟁’, 늑대 싸움. 위키피디아 제공
조지 고다드 작. ‘존재를 위한 투쟁’, 늑대 싸움. 위키피디아 제공

자원 고갈과 인구 증가 

 

존재를 위한 투쟁이라는 용어는 사실 이전에도 가끔 쓰였던 용어입니다. 주로 정치적인 이슈를 언급하면서 사용되었죠. 하지만 이를 널리 알린 것은 토마스 맬서스입니다. 그는 1798년 자신의 책, ‘인구론’에서 인간 사이의 존재를 위한 투쟁이 발생하는 이유를 아주 간명하게 설명합니다. 인구 증가 속도를 식량 생산 증가 속도가 따라잡을 수 없으므로, 같은 자원을 두고 치열한 투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기근과 질병, 전쟁입니다. 이른바 맬서스 재앙이죠.

 

이러한 맬서스의 주장은 찰스 다윈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상은 신의 섭리로 이루어진 조화로운 곳이라는 종교적 주장에 의문을 품은 다윈은 비글호 항해를 통해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차별적 생존과 변이, 유전이라는 세 가지 요인을 통해서 진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간명하게 밝힙니다. 세 요인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진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존재를 위한 투쟁이야말로 개체 간의 차별적 생존율을 일으키는 가장 핵심적인 기전입니다.

 

무너진 원시주의, 조각난 진보주의

 

존재를 위한 투쟁은 아주 명백한 사실이었지만, 별로 인기는 없었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세상은 원래 조화로운 상생의 공간이었다는 믿음을 깨버렸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원은 결국 부족해지므로 투쟁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신의 섭리로 창조된 평화롭고 행복한 곳이라는 오래된 믿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죄악에 물든 세상이 곧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과 도무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양립합니다. 세상이 타락한 것은 죄악 때문이므로, 본질적으로 세상은 온전하고 조화롭다는 것이죠. 사자와 사슴이 다정하게 어울리는 에덴동산이나 배고픔과 전쟁이 없는 요순시절이라는 태곳적 이상향에 관한 믿음이죠. 회귀를 바라는 인간 심성의 깊은 갈망에서 비롯합니다. 그러니 뭔가 잘못된 것을 고치기만 하면, 원래 있었던 아름다운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이러한 원시주의적 믿음을 산산이 조각냈습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원시 이상향은 사실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나타난 이후 존재를 위한 투쟁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설사 자발적으로 투쟁을 포기한 생명이 있었다고 해도 곧 사라졌겠죠. 진화론이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정서적 배격을 당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좋았던 과거’에 대한 깊은 환상을 무너뜨리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원시주의와 반대로, 인간은 밝은 미래를 꿈꾸는 본성이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낫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시궁창이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삶도 그렇지만, 세상에 대한 믿음도 그렇습니다. 더욱 나은 살만한 세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올 수도 있고, 정도령이 올 수도 있고, 미륵보살이 와서 중생을 구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를 위한 투쟁에는 진보주의적 믿음이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하는 인구는 필연적으로 굶주림과 갈등,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보다 살기 좋은 곳일수록 인구는 더 가파르게 증가합니다. 잠시 잠깐의 낙토는 있을 수 있지만, 영원한 낙토는 없는 것이죠. 최소한 이승에서는 말입니다. 이제 ‘보다 나은 미래’는 사라졌습니다. 이러고도 진화론을 받아들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라는 반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화론은 그렇게 우리 마음에서 태곳적 이상향과 언젠가 찾아올 파라다이스를 모두 앗아버린 것입니다.

 

토머스 맬서스. 자신의 저작 인구론에서 식량 생산 증가는 인구 증가를 따라 잡을 수 없으므로 존재를 위한 투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다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위키피디아 제공
토머스 맬서스. 자신의 저작 인구론에서 식량 생산 증가는 인구 증가를 따라 잡을 수 없으므로 존재를 위한 투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다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위키피디아 제공

기술적 혹은 사회적 혁신

 

거친 반박이 쏟아졌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도 계속 쏟아지고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기술적 혁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둘째 사회적 혁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소출이 많은 작물의 육종하고 효과적인 비료를 만들고, 자연재해를 줄이고, 관개 시설을 개량합니다. 밀집 사육은 다양한 논란을 낳고 있지만, 어쨌든 전보다 적은 비용을 들여서 더 많은 고기와 우유, 달걀을 생산합니다. 태양에너지와 핵에너지를 통해 가용 에너지를 늘립니다.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 발전을 통해서 인류는 자원의 기하급수적 증산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죠. 

 

땅이 꽉 차면, 바다로 나가면 됩니다. 바다도 꽉 차면 우주로 나가면 됩니다. 달과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전 우주에 인간이 살 곳을 건설합니다. 기술적 혁신을 통해서 자원을 둘러싼 필연적인 갈등을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우주도 꽉 차면 어떻게 해야 할 지는 모르지만, 그때는 또 ‘뭔가 새로운 혁신’이 있을 테니 지금부터 걱정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혁신을 이야기하는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자원의 양이 아니라, 공평한 분배가 문제라고 하는 일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충분히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데, 분배가 잘 안 되어 굶주린 사람이 생기고,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구가 늘어나면 교육과 계도를 통해서 인구를 줄이면 됩니다. 인간은 충분히 똑똑하기 때문에 스스로 인구 집단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죠. 

 

인간은 사회적 협력을 할 줄 아는 동물이며, 따라서 협력과 상생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절한 통제와 규제, 교육, 계몽을 통해서 사회 구조를 바꾸고, 자신의 생각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찬 바람입니다. 기술적 혁신과 사회적 혁신, 전 지구적인 협력을 통해서 영구히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은 있는가?

 

기술 혁신을 통한 증산 및 거주지 확보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려면 지구가 몇 개, 아니 곧 우주가 몇 개 있어도 모자랍니다. 게다가 기술 혁신이 무한정 계속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게다가 기술적 혁신은 공짜가 아닙니다. 핵폐기물, 환경 오염, 과도한 개발에 의한 자연 파괴 등 오히려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사회 개조를 통한 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인간 사회를 이상적으로 만들겠다는 대부분의 시도는 대부분 오히려 끔찍한 비극을 낳았습니다. 지상 낙원을 약속하던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낳았고, 이에 대항한 서구 자본주의 사회 역시 극심한 불평등과 빈곤을 낳았습니다.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교육이나 계도로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적지 않은 비극은 인간이 우리 자신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기술 문명에 대한 과도한 기대도, 사회적 변혁에 거는 순진한 믿음도 모두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자원 고갈과 과도한 투쟁, 기아, 전쟁으로 이어지는 벼랑 끝으로 피할 수 없는 행진을 하는 것일까요? 정답은 모릅니다. 하지만 희망은 우리의 과거에 있습니다. 지난 오백만 년간의 인류 진화사 전체가 ‘존재를 위한 투쟁’의 기록으로 가득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난적 위기를 넘겼습니다. 겨우겨우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말이 옳을 정도로 인류의 역사는 믿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화적 기억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혜는 아마 과거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책에 나오는 과거를 넘어서 문자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더 거슬러 올라가 언어마저 희미하던 그 시절, 인간과 야수의 차이가 종이처럼 얇던 과거에 뜻밖의 해답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조상이 겪었던 고통과 슬픔, 배고픔과 추위, 광기와 몽상, 갈등과 싸움, 테러와 전쟁의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과거의 지혜를 통해서 한번도 가보지 못한 미래로 나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에필로그

 

과연 이 땅에 평화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우리는 단지 존재를 위한 투쟁에 단 한번 주어지는 삶을 바치며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는 쳇바퀴를 계속 달리는 것일까요? 분명 자연의 법칙에 따른다면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통찰하고 또 심지어는 법칙을 거스를 수도 있는 예외적인 능력을 부여 받은 유일한 종입니다. 진화적 자연 법칙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을 전해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행복한 성탄 되시길 바랍니다.

 

※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때문이야》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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