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본문바로가기

동아사이언스

생물학 논문 속 '사사'에 숨어있던 '히든 피겨스'

통합검색

생물학 논문 속 '사사'에 숨어있던 '히든 피겨스'

2019.02.16 12:00
논문의 마지막에 위치한 사사(謝辭·acknowledments).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사사에 이름이 오르는 일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논문의 마지막에 위치한 사사(謝辭·acknowledments).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사사에 이름이 오르는 일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논문에 이름이 실리는 건 과학자에게 영광스러운 일이다. 논문 최상단에는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들의 이름이 제목 바로 아래 실려 있다. 반면 논문의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 사사(acknowledgments·감사문)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가는 곳이다. 연구에 단순한 도움을 줬거나 지원한 사람, 기관의 이름을 감사의 의미로 쓴다. 만에 하나 연구에서 실질적 역할을 했음에도 아무 이유 없이 사사에 이름이 오른다면 억울한 일이다.

 

한때 여성 과학자들이 이런 처우를 받으며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 있다. 에밀리아 후에르타 산체스 미국 브라운대 생태학 및 진화생물학부 교수와 로리 롤프스 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생물학부 교수 연구팀은 1970년부터 1990년까지 학술논문에 여성이 저자로 이름이 오르는 것보다 사사에 이름이 오를 확률이 높았다는 연구결과를 국제학술지 ‘유전학’에 발표했다.

 

2016년 개봉한 영화인 ‘히든 피겨스’에는 냉전 시대였던 1960년대 무렵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옛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세 명의 흑인 여성 수학자가 나온다. 영화를 본 후 산체스 교수와 롤프스 교수는 세 명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데서 충격을 받았다. 문득 두 교수는 얼마나 많은 다른 여성 과학자가 자신들의 분야에도 감춰져 있을지 궁금해졌다.

 

에밀리아 후에르타 산체스 미국 브라운대 생태학 및 진화생물학부 교수(왼쪽)과 로리 롤프스 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생물학부 교수 공동연구팀은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논문에 여성이 저자로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사사에 이름이 오르는 경우가 많았음을 밝혔다. 미국유전학회 제공
에밀리아 후에르타 산체스 미국 브라운대 생태학 및 진화생물학부 교수(왼쪽)과 로리 롤프스 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생물학부 교수 공동연구팀은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논문에 여성이 저자로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사사에 이름이 오르는 경우가 많았음을 밝혔다. 미국유전학회 제공

두 교수는 학부생 5명을 모아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팀은 국제학술지 ‘이론 집단생물학’을 연구 대상으로 선택했다. 집단생물학은 한 개체가 아닌 여러 개체 생물군의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연구에 통계가 많이 쓰여 프로그래밍을 통한 분석 기법이 많이 쓰이는 분야다. 연구팀은 학술지에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게재된 883편의 논문을 모두 모았다. 이후 저자의 성별과 사사에 오른 연구자의 성별을 일일이 손으로 셌다. 과거에는 미스터(Mr.)와 미스(Miss.), 미세스(Mrs.) 등 성별을 알려주는 단어가 이름 앞에 적혀 있어 성별의 추정이 가능했다.

 

성별의 식별이 가능한 연구자만 추려 수를 셌더니 사사에 이름이 오른 여성의 비율이 저자에 이름을 올린 여성의 비율보다 높았다. 이들 논문에서 사사에 이름이 오른 연구자 44명 중 여성은 19명으로 43.2%였다. 반면 1078명의 저자 중 여성은 80명으로 7.4%에 불과했다. 1970년대로만 한정했더니 사사에 이름을 올린 연구자 중 58.6%가 여성이었다.


과학계 남성 과학자들이 많던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분석 대상 논문들에서는 여성 과학자의 학술적 성과가 간과된 사례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산체스 교수는 사사에 자주 등장하며 이후 여러 논문에서 연구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언급한 제니퍼 스미스라는 여성 과학자를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대신 지 에이 워터슨 호주 모내시대 교수가 1975년 단독으로 이름을 올린 논문에 언급된 마가렛 우라는 여성 연구자를 찾았다. 마가렛 우는 이 논문의 사사에 ‘표 1을 계산하는 수학적 작업을 도왔다’고 소개됐다. 논문에서 소개된 ‘워터슨 추정기’는 산체스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지금도 여전히 즐겨 쓰고 있다. 이 논문은 3400회 이상 인용됐다.

 

연구팀의 지속적인 이메일과 전화에 겨우 연락이 닿은 마가렛 우는 당시 워터슨의 연구 조수였으며 프로그래밍을 직업으로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녀는 유망한 연구에 참여했음에도 인정되지 않았고 박사후연구원으로의 진학을 포기했다. 40대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녀는 20년간 통계학자와 수학 교사로 일해오다 지금은 호주 멜버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마가렛 우 호주 멜버른대 교수는 현재도 쓰이는 ′워터슨 추정기′의 개발에 함께 참여했으나 논문에는 저자로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사사로 이름을 올렸다. 미국유전학회 제공
마가렛 우 호주 멜버른대 교수는 현재도 쓰이는 '워터슨 추정기'의 개발에 함께 참여했으나 논문에는 저자로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사사로 이름을 올렸다. 미국유전학회 제공

1980년부터는 프로그래머가 사사에서 빠지고 정식 저자로 포함되는 경우가 늘었다. 프로그래머는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저자로서 영광을 나눠 가졌다. 하지만 프로그래밍 작업이 대우받기 시작하면서 적은 임금을 받던 여성의 직업에서 남성의 직업으로 점점 옮겨갔다. 연구팀은 이런 점을 두고 프로그래머가 남성의 직업이 되자 저작권을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국제학술지 ‘이론 집단생물학’ 측은 이번 연구결과를 높이 평가했다. 노아 로젠버그 이론 집단생물학 편집장은 “연구가 지난 세월 이론 집단생물학 분야에서 연구가 어떻게 수행됐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며 “과거 연구에서 사사에 이름을 올린 프로그래머들은 현재 연구계에서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들의 노력이 다시 조명받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고 말했다.

 

롤프 교수는 “이 연구는 저자를 주는 것과 학문적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에 대한 기존의 규범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며 “오늘날까지도 저자기 되기 위해 해야할 것에 대한 명확한 규칙은 없다”고 지적했다. 현재도 논문을 작성할 때 저자를 정하는 것은 오로지 연구팀의 몫이다.

 

롤프 교수는 “교수는 동료에게 데이터를 조금 보내는 것만으로도 저자가 되는 데 반해 연구기술자들은 엄청난 양의 실험을 수행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한다”며 “주변의 연구기술자들을 돌아보기만 해도 수많은 여성과 유색인종이 창의적인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저자의 권한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분야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연구가 나와 수많은 ‘히든 피겨스’를 발굴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6월 미국 위스콘신 주 메디슨에서 열린 ‘집단, 진화, 양적 유전학 컨퍼런스’에 참가한 연구팀이 연구결과를 담은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학회에 참석한 연구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는 후문이다. 왼쪽부터 에제키엘 바라간, 로첼레-얀 레예스, 사만다 크리스틴 덩, 안드레아 로페즈, 리키 투. 마이라 바누엘로스 제공
지난해 6월 미국 위스콘신 주 메디슨에서 열린 ‘집단, 진화, 양적 유전학 컨퍼런스’에 참가한 연구팀이 연구결과를 담은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학회에 참석한 연구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는 후문이다. 왼쪽부터 에제키엘 바라간, 로첼레-얀 레예스, 사만다 크리스틴 덩, 안드레아 로페즈, 리키 투. 마이라 바누엘로스 제공

이 기사가 괜찮으셨나요?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댓글 0

18 + 8 = 새로고침
###
    과학기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소개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고발 소재 등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제보하기

    관련 태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