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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N사피엔스] 알파고의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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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N사피엔스] 알파고의 공습

2019.05.02 17:00

2016년 3월부터 건국대에 새로 생긴 상허교양대학(상허는 설립자 유석창 박사의 호)에서 교양과학 과목들을 가르치게 됐다. 과목 중에 '과학사'와 '과학의 원리'는 수강정원 80명의 대형 강의이고 '과학기술 글쓰기'는 35명 정원의 중소규모 강의다. 나는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십여 년 전부터 여기저기에 이른바 교양과학의 내용으로 글을 쓰고 강연을 해왔다. 입자물리학의 역사는 말하자면 과학이 발전해 온 길의 전형 내지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어서 '과학사'를 가르치는 데에 전공의 도움이 컸다. '과학의 원리'는 현대물리학의 주요 개념들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과학기술 글쓰기'는 늘 해 오던 일이었다. 각 과목별로 두 클래스씩 총 여섯 클래스(수강생 총합을 계산해 보시라!)를 수업하는 일이 만만치는 않았으나 교양과목으로서의 과학을 가르치는 보람도 작지 않았다. 


그해 3월 2일 수요일 나의 첫 '과학의 원리' 강의가 열렸다. 개강 첫날이었지만 휴강을 하거나 대충 수업을 하진 않았다. 초반에 강좌 전체를 소개하는 시간에는 강좌의 목표와 주별 강의계획, 학점 산출방법, 과제물을 안내했다. 수업 후반부에는 왜 과학이 중요한가라는 짧은 강의를 준비했다. 교양으로서 과학이 왜 필요한지 첫 강의에서부터 수업을 듣는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서다. 내게는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아주 적절한 소재가 있었다. 바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세기의 빅 이벤트인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의 5번기 대국이다. 

 

이세돌 9단이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에서 알파고와 맞붙는 세기의 대결을 펼쳤다. 연합뉴스 제공
이세돌 9단이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에서 알파고와 맞붙는 세기의 대결을 펼쳤다. 연합뉴스 제공

지금이야 알파고를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으나 그때만 해도 알파고는커녕 바둑 두는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조차 익숙하지 않았다. 동네바둑 6급 정도의 기력밖에 안 되지만(영광스럽게도 예전에 조혜연 9단과 지도대국을 둔 적이 있었다. 그때 조 국수께서 나더러 능히 1급은 된다고 하셨으나 대마가 몰살한 패자를 위로하는 말씀이었음이 분명했다.) 이세돌 9단의 열렬한 팬이었다. 이 9단이 알파고와 세기의 대결을 벌인다는 사실을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다. 3월 개강하기 전 2월에 어느 인터넷 매체 관계자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를 제외한 서너 명의 언론매체 관계자들 모두 이세돌-알파고 대국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3월 2일 수업에서의 학생들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80명 수강생 중 일주일 뒤의 이벤트를 아는 학생은 절반에 훨씬 미치지 못해 보였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세상엔 이런 놀랄만한 사건도 있다’는 투로 이세돌-알파고 대국을 소개했다. 물론 이세돌이 여유 있게 이기겠지만,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감히 이세돌이라는 세계 최고수이자 나의 우상을 상대로 도전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나중에 인공지능이 정말로 인간에 범접하거나 심지어 능가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면 아마 그 출발점을 일주일 뒤의 바둑대국에서 찾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침을 튀기며 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다. 


이 글을 쓰면서 3년 전 강의 슬라이드를 다시 넘겨보니 그 촌스러운 디자인과 구성에 쓴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런 쓴웃음, 그리고 그에 동반하는 부끄럼은 늘 있었다. 아마 3년 뒤에는 지금 만든 슬라이드를 두 눈 뜨고 보지 못할 지경일 것이다. 그날 첫 강의에서 나는 이세돌-알파고 대국을 예고하며 한국형 천재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고 주장했다. 한국형 천재, 즉 암기 잘하고 암산 잘하고 선행학습에 능하며 규칙을 잘 따르는, 그런 인재의 시대가 끝났다는 얘기다. 이런 능력이 전혀 쓸모없는 건 물론 아니다. 암기 잘하고 계산 잘하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그러나 여기에만 매몰되면 창의적인 일을 하지 못한다. 남이 정해 놓은 규칙 속에서만 놀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에서는 치명적이다. 과학 분야 노벨상이 아직 없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나의 박사과정 기간은 1997~2001년이었다.) 주변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이면 늘 하던 얘기가 그랬다. 한국형 천재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한국형 천재가 필요한 전형적인 상황은 높은 어르신이 뭔가가 궁금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을 때이다. 이때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0.5초 만에 답을 줄 수 있는 인재가 바로 한국형 천재이다. 과연 많은 것을 외우고 있고 어지간한 암산 정도야 순식간에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한창 산업화를 진행할 때는 이런 인재도 필요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을 아주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이런 인재를 키우는 과정이었다. 이걸 잘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에서는 좋은 스펙을 쌓고 졸업하면 대기업에 취직한다. 그게 우리의 성공방정식이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구글 딥마인드 리서치 담당 과학자(왼쪽 둘째) 등 알파고팀이 웃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 리서치 담당 과학자(왼쪽 둘째) 등 알파고팀이 웃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한국형 천재를 누가 많이 데려갔느냐에 따라 대학 서열도 매겨졌다.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는 그렇게 탄생했다. 나의 수업 슬라이드에는 아직도 이 열 개 대학의 이름이 나열돼 있다. 내가 근무하는 건국대는 이 안에 없다. 이 서열을 보는 우리 건국대 학생들의 마음은 어떨까? 전국 200개 대학 중에 이 10개의 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은 또 어떨까? 한번은 이런 내용으로 KAIST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강연을 듣던 한 학생이 왜 자기 학교는 저 명단에 없느냐고 항의 아닌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이화여대의 어느 교수님도 비슷한 항의를 한 일이 있다. 


내가 대학  명단을 보여 준 이유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이세돌에게 도전장을 낸 이 마당에 아직도 우리는 ‘서연고서성한···’’만 읊조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작태인가를 말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내 수업을 듣는 건국대 학생들이 어디서 이런 명단을 보더라도 "절대 기죽지 마라, 이제 더 이상 이런 서열이 무의미한 시대가 열리고 있다, 앞으로 우리의 경쟁상대는 ‘서연고’가 아니라 슈퍼지능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암기와 암산하면 나도 명함 내밀고 싶은 사연이 있었다. 1990년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학력고사 세대이다. 역시나 ‘국영수’가 가장 중요했던 시절, 나는 수학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국어는 젬병이었다. 특히 내가 취약한 대목이 정철의 ‘관동별곡’이었다. 이과생이라 안 그래도 고문에 취약했었는데 그 절정이 관동별곡이었다. 모의고사를 보면 관동별곡은 항상 딸림 문제가 서넛 달린 중요한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딸림 문제 중에는 항상 등장하는 유형이 있었다. 지문 중 빈 칸 안에 알맞은 말은 무엇인가, 지문을 순서대로 재배열하라, 지은이가 다닌 장소를 시간 순으로 나열하라, 등 출제된 지문만 읽고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들이다. 원래 국어를 못하기도 했던 터라 관동별곡 관련 문제를 푸는 데만 거의 10분 가까이 까먹기 일쑤였다. 내겐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관동별곡을 통째로 외우기로 했다. 몇 주에 걸쳐 관동별곡을 다 외운 결과는 놀라웠다. 딸림 문제풀이에 걸린 시간이 10여 분에서 1분 이내로 대폭 줄었다.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강호에 병이 깁퍼”로 시작하는 관동별곡 첫 문장이 저장돼 있다. 


관동별곡이 학력고사 시절의 처절한 입시경쟁이 남긴 상흔이라면 영화 '넘버3'는 대학원 시절의 유쾌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영화는 1997년에 개봉한 코믹 조폭 느와르로 지금 충무로를 주름잡고 있는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이미연이 주연으로 출연했다. 극장 개봉 때는 많은 관객을 모으지 못했으나 오히려 비디오로 출시된 이후 입소문을 타고 더 유명해졌다. 특히 송강호의 찰진 부산사투리 대사(대사의 8할 이상이 욕이었지만)가 화제였다. 부산 출신으로 평가하자면, 부산 남자 셋이 모이면 그 중에 꼭 있을 법한 캐릭터가 '넘버3' 속의 송강호였다. 그 무렵 대학원 선후배들끼리 모여서 술자리라도 가질 때면 으레 누가 더 정확하게 송강호의 대사를 외우고 있느냐로 옥신각신하기 일쑤였다. 남자들의 쓸데없는 ‘핵존심’은 술자리 농담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끝까지 승부를 가리기 위해 술집에서 곧바로 비디오방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비디오방에서 넘버3를 대여해 보면서 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 미친 승부욕 때문에 후배 한 명은 '넘버3'를 50여 번 정도 봤다고 한다. 


수업 시간에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학생들은 십중팔구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꼰대’의 전형적인 “내가 너네들 만할 땐 말이야” 류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레퍼토리가 짜증스러운 건 당연하다. '넘버3'가 개봉한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도 영화 대사를 확인하려고 비디오방이나 DVD방에 가지 않는다. 누구나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몇 초 만에 확인할 수 있다. 아니, 그냥 영화를 내려받아서 확인할 수도 있다. 21세기는 그런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아직도 한국형 천재에 목매달고 ‘서연고서성한···’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누가 더 송강호 대사를 잘 외우고 있느냐를 따지는 20년 전의 술자리 모습과 다르지 않다.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이 당연했던 세대에게는 나의 20년 전 경험이 낯설다. 넘버3가 개봉한 1997년은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간 해이기도 하고 ‘야후 코리아’가 포털사이트 서비스를 시작한 해이기도 하면서 ‘다음’이 한메일이라는 무료 웹메일 서비스를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네이버는 아직 사내 벤처에 머물러 있었다. 해외에서는 ‘딥 블루’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인간 체스챔피언인 카스파로프를 2승3무1패로 꺾어 화제이긴 했으나, 바둑의 이창호 9단이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마스터스 대회와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우승하며 전성기를 내달리던 때였다. 관동별곡과 넘버3는 이후로 내가 한국형 천재시대의 종말을 소재로 강연을 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아이템이 되었다. 


그렇게 한국형 천재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고 말하던 2016년의 3월 2일까지만 해도 나는 이세돌9단이 알파고를 이기리라는 믿음에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전에 알파고가 유럽바둑챔피언(판후이 2단)을 이긴 적이 있긴 하지만, 이세돌 같은 초일류기사는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일주일 뒤의 이벤트가 인공지능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분기점이 될지도 모른다고 학생들에게 말할 때마다 “그래도 이세돌 9단을 도저히 이기지는 못하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늘 붙였다. 이는 동네바둑 6급만의 예상이 아니었다.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바둑기사와 인공지능 관련 전문가들도 이세돌의 승리를 점쳤다. 바둑에서나 인공지능에 대해서나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던 어느 선배는 SNS에 “반상에 혈흔이 자욱한 피비린내 나는 대국 끝에 컴퓨터의 수십 개 대마가 나자빠지는 결과가 일어나리라”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이 분의 허락을 받고 이 문장을 2016년 1월31일자로 나갔던 일간지 칼럼에도 그대로 인용했다. “‘기계 이세돌’을 준비해야 하는 시대”라는 제목의 이 칼럼에서 나는 이세돌 9단의 승리를 예상하면서 나의 팬심을 담아 “이세돌 9단이 기계를 이긴 마지막 인간이길 바란다”고 썼다. 이 말이 사실이 되리라고는 나는 그때 짐작조차 못했다. 

 

15일 구글 알파고와 경기에서 수를 놓고 있는 이세돌 9단 - 한국기원 제공
구글 알파고와 경기에서 첫 수를 놓고 있는 이세돌 9단 - 한국기원 제공

일주일 뒤인 3월 9일 이세돌과 알파고의 첫 대국이 오후 1시부터 열렸다. '과학의 원리' 수업도 오후 1시부터 시작이다. 나는 수업에 들어가면서 내가 준비한 강의 다 집어치우고 대국현장 생중계 장면을 스크린에 띄워 놓고 학생들과 함께 감상하면서 토론이나 할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직장에 임용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그런 ‘모험’을 감행할 자신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정식으로 계약서에 사인도 하기 전이었다. 지금 그런 빅 이벤트가 또 진행된다면 나는 아마 원래 준비했던 강의 슬라이드 따위 집어던져버렸을 것이다. 


과학의 원리는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2시간 연강으로 진행된다. 중간에 10분 정도 휴식시간이 있다. 나는 2시 무렵 쉬는 시간임을 공지했다. 몇몇 학생들이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내 세기의 첫 대국 생중계 화면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진행된 기보를 보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참고자료 

-박문호, 세기의 대결 이세돌 대 알파고 첫 대국, 뉴시스

-이종필, [이종필의 제5원소] ‘기계 이세돌’을 준비해야 하는 시대, 한국일보, 2016.1.31.

- BM100, Deep Blue, https://www.ibm.com/ibm/history/ibm100/us/en/icons/deepblue/ 

 

※필자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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