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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질병] 투유유의 세 번째 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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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질병] 투유유의 세 번째 낫

2019.08.25 06:00

 

201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투유유(屠呦呦). 개똥쑥에서 말라리아 치료 성분인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노벨상수상위원회 제공.
201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투유유(屠呦呦). 개똥쑥에서 말라리아 치료 성분인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노벨상수상위원회 제공.

인간은 낫으로 풀을 베고 숲을 개간했지만, 덕분에 모기와 재회하게 되었다. 말라리아라는 불청객이 찾아왔고 수많은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갔다. 하지만 인간은 두 번째 낫을 만들었다. 바로 자신의 적혈구를 낫 모양으로 만드는 돌연변이가 일어난 것이다. 세 번째 낫은 문화대혁명이 중국 대륙을 뒤덮던 때, 연구에 쓸 약초를 채집하던 여성 식물학자 투유유의 손에 바로 인류의 세 번째 낫이 들려져 있었다. 

 

2015년 여든다섯 살의 여성 연구자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마련된 시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벨의학상을 받기 위해서 중국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투유유는 노벨의학상을 받은 최초의 중국인이 되었다. 

 

523 임무

 

1966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대학 입시를 없앴다. ‘현재 대학교의 입시는 공농병 청년을 받아들이는 데 불리하므로 개혁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낡은 사상과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을 타파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세상을 열겠다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중국을 뒤덮었다. 캠퍼스도 예외일 수 없었다. 


대학교수와 교사, 학자, 의사 등 중국 사회의 엘리트는 모두 홍위병의 타도 대상이었다. 대학은 사실상 폐쇄되었다. 1970년이 지나서 몇몇 대학이 다시 학생을 뽑았는데, 입시는 없었다. 공장이나 마을, 군대에서 추천받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다. 공농병 학생이다. 추천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만 해도 대학에 갈 수 있었다. 1972년 북경 시내 대학교 입학자의 80%는 중졸 이하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지도층 자녀도 슬쩍 입학했다. 부정입학이 만연했다. 


병원의 의사는 화장실 청소를 하도록 강요당했다. 청소부가 환자를 돌보았다. 심지어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병원을 점거하고 의사와 간호사 행세를 했다. 제대로 된 진료를 할 수 없었다. 진료실 사정마저 이러니 의학 연구는 전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중국의 기초과학 연구는 완전히 중단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말라리아 환자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말라리아 환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중국 대륙에서만 무려 사천만 명의 말라리아 감염자가 발생했다. 의과학 연구는 완전히 중단되었지만, 예외적으로 살아남은 분야가 바로 말라리아 연구였다. 1967년 마오쩌둥은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 전국 협력 회의’를 통해서 치료제 개발을 지시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말라리아 치료제 연구에 국가적 역량이 집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른바 523 임무라고 불린 비밀 프로젝트였다. 

 

 

여성 의학자, 투유유

 

1950년대 투유유가 중국의학연구소에서 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 신화통신/연합뉴스
1950년대 투유유가 중국의학연구소에서 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 신화통신/연합뉴스

투유유는 1955년 베이징 의과대학 제약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투유유는 베이징의 중의학 연구원에서 약물 연구를 하였다. 약 2년 반 동안 서양 의학을 배울 기회도 얻었다. 문화대혁명의 여파인지 몰라도 투유유는 석사 학위도, 박사 학위도 없다. 하지만 혁명 직전 현대 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얻었다.


베트남 전쟁 동안 크게 불어난 말라리아 환자로 인해 월맹은 큰 골치를 앓고 있었다. 당시에는 주로 클로로퀸을 사용하여 말라리아를 치료했는데, 클로로퀸에 저항성을 가진 말라리아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중국도 말라리아의 열병을 앓았다. 젊은 시절 일본과 프랑스에서 공부했던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설득했다.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 비밀 프로젝트, 즉 523 임무가 시작되었다. 문화대혁명의 와중에도 523 임무에 동원된 연구자들은 하방을 피할 수 있었다. 


1969년 투유유도 523 임무에 투입되었다. 네 명의 연구원과 함께 연구를 시작한 그녀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이었다. 당시 전 세계 연구자들은 다양한 화합물을 사용하여 말라리아 치료제로서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었는데, 투유유는 중국 고의학서에서 실마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오랜 문화적 유산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던 문화대혁명 속에서 수많은 서적이 불태워지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에서는 고의학서를 뒤적이며 말라리아 치료제의 단초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투유유는 옛 의학서에 기록된 640개의 처방을 수집했다. 수천 종의 식물을 조사하는 연구팀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인류의 세 번째 낫, 지식이었다. 수백 개의 약초 추출물을 확보하여 실험했는데, 그녀의 낫에 걸린 약초 중 하나가 바로 개똥쑥이었다. 

 

 

개똥쑥

 

투 교수는 고대 문학에 나오는 전통 약물들은 연구하다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했다. 개똥쑥에 흥미를 갖게 된 투 교수는 정제 과정을 거쳐 ′아르테미시닌′이라는 인체에 작용하는 약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효과적인 말라리아 치료제로 사용하고 있다. phys.org 제공
투 교수는 고대 문학에 나오는 전통 약물들은 연구하다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했다. 개똥쑥에 흥미를 갖게 된 투 교수는 정제 과정을 거쳐 '아르테미시닌'이라는 인체에 작용하는 약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효과적인 말라리아 치료제로 사용하고 있다. phys.org 제공

동의보감에는 청호(菁蒿)라는 약초가 등장한다. 개똥쑥(학명: Artemisia annua)이라고도 하는데 아시아 전역에 널리 자생하는 식물이다. 열을 내리고 더위 먹은 증상을 치료하며(淸熱解暑), 몸이 달아오르는 증상을 없애고(除蒸) 학질을 치료하는 것(截瘧)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투유유가 동의보감을 본 것은 아니다.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에서 찾아냈는데, 서기 3세기경 동진 시대 갈홍이라는 학자의 저서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개똥쑥의 항말라리아 효과는 후추보다도 못했다. 포기하려던 차에 주후비급방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 주후비급방 제3권에는 ‘한 줌의 개똥쑥을 2승의 물과 함께 비틀어 짜서 마시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투유유는 오랜 처방에 따라서 고열로 추출하던 기존의 방법을 버리고 저온에서 추출을 시도했다. 섭씨 35도에서 에테르를 사용하여 성분을 추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공했다. 쥐와 원숭이를 사용한 동물 실험에서 효과가 있었다. 새로운 방법, 아니 이천 년 전 방법이 성공한 것이다. 


투유유는 추출물을 사람에게 직접 투여했다. 바로 자신이었다. 지금이라면 연구윤리위원회 제소감이지만, 일단 자신과 동료에게 직접 시험해보았다. 역시 성공적이었다. 서른 시간 만에 열이 내리고 혈액 내 말라리아 원충이 사라진 것이다. 

 

 

베일에 가려진 투유유

 

투유유 교수. EPA/연합뉴스
투유유 교수. EPA/연합뉴스

투유유의 발견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연구 결과는 오랫동안 베일에 숨겨져 있었다. 중국 정부는 연구의 성과를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군사 기밀로 취급되었기 때문인데, 사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서 연구를 발표할 학회도 학술지도 없었다. 책도 출판할 수 없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나서야 학술지에 실릴 수 있었는데, 투유유의 이름은 익명 처리되었다. 1981년에야 투유유는 자신의 이름으로 연구 성과를 밝힐 수 있었다. 그녀의 연구는 세계보건기구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투유유가 처음 532 임무에 배치되었을 때, 남편은 시골로 하방되어 있었다. 지식인을 강제로 시골 벽지로 보낸 후 육체노동을 시키는 정책이었다. 지금은 중국의 주석이 된 시진핑도 당시 16세의 나이로 하방되어 토굴에서 생활했다. 천만다행으로 투유유는 비밀 임무에 투입된 덕분에 하방을 피할 수 있었지만, 네 살된 딸을 돌볼 사람이 없었다. 보육원에 딸을 맡긴 채 투유유는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하이난으로 떠나야 했다. 그녀는 6개월 만에 베이징에 돌아왔는데, 자신을 보고 딸이 도망쳤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구를 멈출 수는 없었다. 하이난에서 자신의 딸 또래의 아이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투유유가 추출한 물질은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이라고 한다. 아르테미시닌은 내부에 엔도페록사이드(endoperoxide)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부분이 활성화되면 활성 라디컬이 발생한다. 이 활성 라디컬이 말라리아 원충을 공격하는 것이다. 활성화 기전은 아직 분명하지 않은데, 아마도 적혈구 내 헴 분자 혹은 철 이온에 의해 촉발되는 것으로 보인다. 말라리아 원충은 헤모글로빈에서 얻은 아미노산을 자신의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므로 원충 안에는 헴 분자와 철 이온의 농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아르테미시닌이 말라리아 원충에 선택적인 공격성을 보이는 이유다. 아르테미시닌은 아마도 헴 분자 혹은 아직 잘 모르는 특정 단백질을 알킬화하여 말라리아 원충을 죽이는 것으로 보인다. ATP를 분해하는 pfATP6 효소의 활성을 저해한다는 주장이나 세포막을 녹인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개발된 아르테미시닌은 2013년까지만 해도 직접 재배해서 추출했다. 중국에서 전 세계 소비량의 70%를 재배하는데, 8개월 정도 키운 개똥쑥의 잎을 따서 유기용매로 추출한다. 항말라리아 효과가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에서는 단독 사용을 금지했다. 혹시 내성이 생길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꼽히는 아르테미시닌이지만, 사실 최근까지 투유유의 정체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중국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아르테미시닌의 발견을 중화인민공화국의 10대 과학기술 성과라고 하거나 10대 공공 보건 성과라고 하며 치켜세웠지만, 그 성취는 중국 인민 전체의 공이었고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는 중국과학원 최고과학자(원사)도 되지 못했다. 


2011년 미국에서 라스커상을 받고, 이어서 2015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나서야 오랫동안 묻혀 있던 투유유의 공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국내파 연구자이자 중국의 고대 의서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점이 현대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이면서 지금은 중국이 낳은 위대한 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문화대혁명, 그 무서운 광풍을 운 좋게 비껴간 곳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린 말라리아 치료제가 나왔다는 점이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제국의 말라리아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경 진(秦)나라를 세운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다. 중국의 영어식 이름인 차이나(china)의 기원이 된 나라다. 의사 갈홍이 주후비급방을 저술하던 때는 진(晉)나라인데, 물론 다른 나라다. 진시황의 진나라 이후 약 오백 년 이후에 세워진 나라다. 


당시 진시황의 진나라에는 어떤 의학서가 있었을까? 이견이 분분하지만 ‘아마도’ 황제내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내경의 기원을 문자 그대로 삼황오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려는 주장도 있지만, 요즘은 전국시대의 다양한 의학 학파가 경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론과 지식이 집대성해가면서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공동 저작으로 보는 추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황제내경에 말라리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지역적으로 집단 발병하며, 비장이 커지고 발작적인 고열이 나는 질병에 대한 처방이 있는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 당시에도 중국은 말라리아가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갈홍의 책에 개똥쑥 처방이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에 세워진 최초의 제국, 진나라는 말라리아를 앓고 있었다. 


진나라가 성립되던 무렵, 지구 반대편에서도 역시 거대한 제국이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로마다. 그런데 로마도 진나라처럼 말라리아를 앓고 있었다. 로마 열병(Roman Fever)이라고 불렀다. 당시 의학서에 의하면 커진 비장을 줄이는 처방이 기록되어 있으며, 특별한 의식을 치르고 환자를 묻기도 하였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병을 옮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 말기에는 ‘모든 성인 대축일(All Saint’s Day)’이 원래의 5월이었는데, 11월로 옮겨지기도 했다. 축일에 모이는 군중이 말라리아를 옮길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11월 1일의 전날, 10월 31일 저녁 핼러윈 축제가 열리는 이유다. 핼러윈(Halloween)은 ‘All Hollows’ Eve)에서 유래했는데, 할로우란 성인을 뜻하는 고어다. 


심지어 훈족이 로마 진격을 포기한 것은 당시 로마에 유행하던 말라리아라는 주장도 있다. 훈족의 공격을 피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말라리아로 인해 로마의 국력이 쇠퇴하여 결국 게르만족에게 멸망당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나왔다. 2016년 캐나다 맥마스터대 연구팀의 발표에 의하면, 서기 100년에서 300년 무렵 로마인은 확실하게 말라리아를 앓고 있었다. 당시 무덤을 발굴하여 유골의 DNA를 조사한 결과다. 

 

 

┃다음화 미리보기 "사르데냐섬의 비극"

사르데냐섬.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사르데냐섬.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기원전 264년 로마는 카르타고와 지중해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는데, 이를 제1차 포에니 전쟁이라고 한다. 로마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시칠리아섬을 얻을 수 있었다. 보너스로 두 섬을 더 가지게 되었는데, 바로 코르시카섬과 사르데냐섬이다. 


사르데냐섬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있는 인구 백육십만 명의 섬이다. 한국에는 잘 알려진 섬은 아니지만, 지중해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9세기경에는 페니키아인의 방문이 잦아졌고, 카르타고와 로마의 통치를 받으며 여러 민족이 섞였다. 하지만 사르데냐 인은 섬사람의 자존심을 지키며 비교적 독립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1970년대 무렵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발성 경화증 환자가 많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발성 경화증이란 뇌와 척수의 축삭을 둘러싸는 수초가 손상되는 병이다. 아시아인이나 흑인은 잘 걸리지 않는데, 유럽계 백인에게 빈발한다. 주로 20세부터 40세 사이에 발병하는데, 다양한 신경 증상 혹은 정신 증상이 생긴다. 그래서 임상에서는 도무지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신경 혹은 정신 증상을 보이면 일단 다발성 경화증을 의심하라는 말도 있다.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사람, 갑자기 실명을 보이는 경우, 발작이나 경련을 하는 경우, 몸이 마비되거나 감각이 사라지는 경우 등 다양하다. 증상도 갑자기 나타났다가 느닷없이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종종 꾀병이나 정신장애로 오진되기도 한다. 


1955년부터 59년 사이에는 사르데냐섬 주민 중 다발성 경화증 환자는 26명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부터 74년 사이 42명으로 늘어났고 1990년부터 95년에는 무려 104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다발성 경화증은 전염병이 아니다. 옛 로마제국의 영토, 사르데냐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비극의 시작은 기원전 5세기 카르타고의 사르데냐 침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참고자료

Susan Pinker (March 2012). "The truth about falling coconuts". Canadian Medical Association Journal.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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