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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의 사회심리학] 한국 사회의 혐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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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의 사회심리학] 한국 사회의 혐오에 대하여

2019.09.07 06:00
구조적인 문제보다 개인이나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무엇을 비난하는 것이 더 쉽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구조적인 문제보다 개인이나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무엇을 비난하는 것이 더 쉽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인간은 쉽게 편을 나누고 배척하는 존재다. 일례로 내집단 편향, 즉 별 다른 근거 없이 우리 가족, 학교, 직장, 국가, 민족 등 내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능력적인 면 등등 대부분의 측면에 있어 나와 상관 없는 다른 집단의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현상은 대부분 사회에서 만연하다. 자존감이나 삶의 의미감에 위협을 받거나 ‘죽음’을 떠올리는 등 본질적인 두려움을 마주치게 되면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로부터 비호를 받으려는 듯 이전보다 내집단 편향, 외집단 혐오를 심하게 보인다는 연구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개인이나 사회마다 쉽게 배척하고 혐오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다. 혐오를 발산하는 개인과 사회를 만드는 요인들은 무엇일까? 왜 주로 사회적 약자가 혐오의 대상이 될까? 


뉴욕대 심리학자 존 조스트 교수에 따르면 어떤 큰 구조적 문제가 존재할 때, 나라 경제가 좋지 않다거나 취업이 잘 안 되거나 등등 그걸 처음부터 ‘구조적’ 문제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추상적이고 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인지적으로 많은 능력과 노력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문제를 가급적 작고 구체적으로 명시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컨대 가난할수록 더더욱 가난이 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오직 ‘나만’ 정신차리면 잘 될거라고,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아니면 반대로 '이게 다 XX때문'이라고 하는 등 비난의 대상을 특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지 않고 문제의 원인이 거대한 구조에 있다고 인정하게 되면 무기력과 큰 불안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학자들은, 그것이 자신이든 타인이든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무엇을 비난하는 것이 불안을 일시적으로나마 ‘완화하는 역할(palliative role)’을 한다고 본다. 외국인이나 여성 등 만만한 대상을 공격하는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세상이 공정한 룰에 의해 돌아간다고 믿는 경향을 보인다.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Belief in a just world)'이라고 불리는 현상인데, 우리의 삶은 때론 내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불의한 일, 사고 등이 닥쳐오지만 그걸 인정하면 불안해지기 때문에 대부분 ‘착하게 부지런하게 살면 아무 탈 없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다소 나이브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 논리에 의하면 저 사람이 약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열심히 살지 않았거나 뭔가를 잘못한 탓이다. 사회적 약자 =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므로 더더욱 비난이 쉬워진다. 사회적 약자들을 일컬으며 “너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하는 말 또한 그 사람은 뭔가 인생을 잘못 살았으며 따라서 저런 대접이 어울린다고 하는 대표적인 약자 혐오 발언이다. 

 

불평등과 차별을 옹호하는 수직적 집단주의


‘심한 집단주의’라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 또한 약자 혐오를 쉽게 만든다. 집단주의란 개인의 성장과 행복보다 집단의 입김이 앞서는 것이다. 쉬운 예로 모두가 짜장면을 시킬 때 혼자 짬뽕을 시키면 왠지 ‘잘못’한 게 되고 눈총을 받는 등. 집단주의는 개개인의 행복을 위해 집단이 존재하기보다 반대로 집단의 효율이나 영광을 위해 개개인이 ‘부품’이 되는 시스템이다. 


가정이나 학교, 회사 등과 개인이 안 맞으면 가정과 학교가, 회사가 변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퇴출되는 것이 당연시된다. 기본적으로 개개인은 각자가 속한 다양한 층위의 집단에서 좋은 부품인지 아니면 나쁜 부품인지 검열받게 되고 나쁜 부품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기본적으로 인권이나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중요시하지 않을뿐 아니라 한국 사회는 수직적 서열이 확고한 ‘수직적 집단주의’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차별을 그닥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각자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라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낮춰 대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며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람을 달리 대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자신이 혐오를 당할 때에도, 혐오를 할 때에도 아예 혐오를 혐오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문화와 규범이 그 자체로 다양한 혐오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혐오 표현에 대한 제재 또한 잘 나타나지 않는다. 혐오를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던 걸 뱉느냐 아니면 뱉지 않느냐의 큰 차이를 만들며 적극적인 혐오자들을 양산한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억울하다는 피해의식


혐오와 관련된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중요 정서는 ‘피해의식’이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살면서 겪은 억울한 일에 대해 간략한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알바비를 떼였던 경험, 분명 상급자나 어른이 잘못을 했는데 그에 대해 지적했을 때 어리고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되려 질책을 당했던 경험, 군대에서의 부당한 명령이나 가혹행위 등이 다수였다. 노동권을 존중하지 않고 나이가 곧 권력이 되고 군복무가 의무인 한국 사회의 특성상 나타날 수밖에 없는 피해들이다.  


문제는 이런 억울함을 올바른 방법을 통해 해소하지 못했을 때, ‘세상에서 내가 제일 억울하고 힘들게 살았고 남들은 몰라도 나는 더 이상 피해를 볼 수 없다’는 피해의식과 이기심이 함께 발생하기 쉽다는 것이다. 고생에는 뭔가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보상이 따라야 하는데 보상은 없고 이유라곤 내가 지위가 낮고 약했던 것 뿐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 그 다음에는 내가 당했던 것처럼 내 밑에 있는 사람을 굴리는 것이 유일한 보상이 된다. 이렇게 억울함 발생 후 그 해결 과정이 올바른지 여부에 따라 한 때 억울했던 일의 피해자가 불의의 가해자가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연구들이 있다.(Zitek et al., 2010).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 인생 편하게 사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추가적인 억울함이 소위 편하게 사는 것 같아 보이는 다른 사람(보통 약자)들을 향하게 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너는 편하게 살아서 좋겠다’ 또는 ‘내가 힘들었을 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분노와 소외감은 종종 높은 공격성을 나타나곤 하는데 그것들이 혐오의 한 동력이 된다. 
좀 더 골치아픈 사실은 딱히 피해를 입은 사실이 없어도 피해의식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에 대해 조사한 결과 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피해자’라거나 이제 인종차별 같은 건 없고 되려 백인들에 대한 ‘역차별’이 더 심하다는 인식을 보였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Forscher & Kteily, 2017). 혐오자들이 자신을 스스로 강자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되려 피해자로 생각하고 이민자나 여성 등 가상의 가해자 집단을 마땅히 없애거나 통제해야 하는 무엇이라는 일종의 강한 ‘신념’을 보인다.  


여성을 심하게 혐오하는 남성들 역시 여성들이야 말로 세상을 편하게 살고 자신들은 순수히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성소수자를 탄압하는 사람들 역시 성소수자에 의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도덕이 망가진다고 보는 등 그들을 나쁜 무리, 자신들을 소수의 깨어있는 정의의 사도로 정의한다. 본인을 ‘억압과 불의에 저항하는 투사’로 정의하기 때문에 반대에 부딫히면 더더욱 자신이 자신이 옳다는 신념을 굳히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혐오를 혐오로 인식하기

 

혐오의 감정을 밖으로 휘두를지 결정하는 데에는 사회의 도덕, 가치판단이 큰 영향을 끼친다.
혐오의 감정을 밖으로 휘두를지 결정하는 데에는 사회의 도덕, 가치판단이 큰 영향을 끼친다.

사람을 완전히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알이다. 하지만 일단 그 사람이 혐오를 혼자 속으로 간직할지 아니면 밖으로 휘두르는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사회의 역할이 크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무리에 의해 중요한 도덕, 가치 판단이 좌우된다. 예컨대 노예제 시절 미국은 같은 인간인 흑인을 ‘백인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애매모호한 죄목으로 공공 장소에서 여럿이 돌아가며 고문하고 목매달아 죽이는 일이 흔했다. 인간은 ‘그래도 된다’는 사회적 합의 하나로 같은 죄책감 없이 잔혹한 행위를 벌일 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자. 따라서 이건 잘못됐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존재가 소중한 것이다. 


이런 비도덕적인 행위가 일어날 때 흔히 같이 일어나는 것이 비인간화(dehumanization)이다. 저건 인간이 아니라 ‘짐승’, ‘벌레’라고 생각함으로써 아무 감정 없이 사람을 벌레 대하듯 대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을 사람 이하의 것으로 만드는 혐오 발언이 무서운 이유다. 대상을 아무 죄책감 없이 탄압하고 처단할 원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 대부분의 끔찍한 일들이 ‘XX충들은 막 대해도 돼’ 같은 작은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혐오를 근절하기 위한 근본적인 인식 변화를 위해서는 우선 어떤 인권 침해나 학대도 ‘사소한’ 것으로 평가절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시행된 한 조사에서 학교에서 언어적 괴롭힘 등을 겪은 이후 이를 애써 ‘별 거 아닌 일’로 생각하고 애썼던 학생들이 이후 괴롭힘의 가해자가 되기도 했음을 발견했다. 분명 누군가에게 불편한 일을 ‘별 거 아니니까, 그냥 장난이니까’라고 치부할 때 그 사회는 가해자를 적극 양성하는 셈이 된다. 


미국에서 시행되는 성폭력 예방 교육의 핵심 또한 대부분 다양한 성적 괴롭힘이 얼마나 나쁜 건지, 누군가 이런 괴롭힘을 할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그 초점이 있다. 예컨데 ‘너의 그 성차별적인 농담은 하나도 재미 없어’라고 하는 등 괴롭힘을 그냥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메시지를 주는 것 만으로도 큰 효과가 있다고 한다. 혐오를 혐오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작은 행동들이 혐오가 만연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참고자료

-Espelage, D. L., Hong, J. S., Rinehart, S., & Doshi, N. (2016). Understanding types, locations, &perpetrators of peer-to-peer sexual harassment in US middle schools: A focus on sex, racial, and grade differences. Children and Youth Services Review, 71, 174-183.
-Forscher, P. S., & Kteily, N. (2017, August 10). A Psychological Profile of the Alt-Right. Retrieved from psyarxiv.com/c9uvw
-Luttrell, A., Petty, R. E., Briñol, P., & Wagner, B. C. (2016). Making it moral: Merely labeling an attitude as moral increases its strength.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65, 82-93.
-Zitek et al., (2010). Victim entitlement to behave selfishl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98, 245-255.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게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법과 겸손, 마음 챙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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