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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질병] 큰 뇌를 가진 인간, 변화에 적응하는 인류에겐 숙명인 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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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질병] 큰 뇌를 가진 인간, 변화에 적응하는 인류에겐 숙명인 질병

2019.09.14 06:00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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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각 시기에 달성해야 할 적응적 목표가 다르다. 어린 시절에는 성장을, 성인기에는 번식을 해야 한다. 노년기에는 주변을 돌보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런데 각 시기의 기간 및 에너지 투입량을 결정하는 최적 수준은 생태적 압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새끼를 낳고 늙고 죽는 과정은 모든 생물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지만, 몇 년 동안 성장할지 몇 년 동안 새끼를 낳을지는 종마다, 그리고 개체마다 다른 결정을 내린다.

 

심지어 수명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생물이 무조건 긴 수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는 우리 조상들이 수백만 년 동안의 진화사를 통해서 상당한 수준으로 이미 결정해두었다. 일찍 죽고 싶은 사람은 물론 없겠지만, 사실 개인으로서는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체화된 자본 가설은 과거에 '할머니 가설'이라고 불리던 고전적 가설을 개량한 것이다. 할머니 가설이란 할머니, 즉 번식 연령이 지난 이후에도 여성이 오래 사는 이유를 설명하는 진화적 가설이다. 손주를 돌보는 이득이 크기 때문에 장수하는 형질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번식기가 끝날 무렵 우리는 일종의 타협을 형성해야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 명 더 낳을 것인가? 아니면 그만 낳고 오래 사는 쪽을 택할까? 여성 입장에서는 어느 시점이 넘으면 직접 번식을 포기하고 오래 사는 편이 유리해진다. 자식의 자식, 즉 손주를 돌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설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왜 남자도 오래 사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성이 남자보다 상당히 오래 살지만, 남자도 제법 오래 산다. 도대체 예순 살이 넘은 남성이 왜 필요한가? 손주를 별로 열심히 돌보는 것 같지는 않다. 사냥도 잘하지 못하고, 농사도 잘하지 못한다. 남자는 폐경이 없으므로 노년이 되어도 번식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가능성’의 문제에 불과하다. 노년기에 접어들어 자식을 낳는 남성은 극히 드물다. 과거 봉건 사회도 마찬가지다. 일부 상류층에서는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예나 지금이나 노년기의 남성이 자신의 자식을 낳아줄 배우자를 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체화된 자본 가설, 즉 '자본 체화 가설(Embodied Capital Hypothesis)'은 남성과 여성에게 모두 적용된다. 독자에겐 미안하지만, 국문으로는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다. ‘자본 체화 가설’이라고 하면 경제학 용어 같은 느낌을 준다. 제목만 보면 도무지 뜻을 짐작할 수 없는 용어다. 하지만 더 좋은 대안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아서 당장은 ‘자본 체화 가설’이라고 하겠다. 아무튼, 이 가설은 인류의 장수 경향은 더욱 우수한 뇌와 도구 사용 능력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우수한 뇌를 진화시켜 도구를 만들었고, 도구 사용의 이득은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당연한 말 같지만 당연한 말이 아니다. 느닷없이 뇌가 왜 커지는가? 


자본 체화 가설은 조금 다르다. ‘일단 수명이 길어졌고 이는 뇌와 도구가 더 발달하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수명이 길어지면 취약한 노년기를 더 오래 보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노년기에는 아무래도 신체적 능력으로 대결하기 어렵다. 그런데 우수한 지능, 즉 큰 뇌를 가진 개체는 노년기가 되어도 제법 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 만들어둔 인적 네트워크, 삶을 통해 체득한 생태학적 지식을 가진 개체만이 긴 수명, 즉 긴 노년기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은 친족 이득을 통해서 가속화되며, 긴 수명과 우수한 지능, 큰 뇌가 진화했다는 것이다. 수명이 길어지지 않았다면 큰 뇌도, 인간의 독특한 인지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신경과 의사 릴리 보브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큰 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 그의 대뇌에 자본 체화 가설과 다발성 경화증을 연결하는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다발성 경화증이란 뇌와 척수, 시신경으로 구성된 중추신경계에서 발생하는 만성 질환으로 면역 체계가 건강한 세포와 조직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이다. 


기나긴 수초화의 과정


마이엘린 수초(신경섬유막)은 유악어류가 진화할 무렵 같이 진화했다. 캄브리아기 대폭발 무렵에 출현한 최초의 척추동물은 턱뼈가 없었다. 대폭발이라고 하면 화산이라도 폭발한 것인가 싶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고생대 초반 다양한 동물이 갑자기 진화한 시기를 말한다. 대략 5억 4000만 년 전이다. 칠성장어가 바로 이런 종류의 척추동물인데, 마치 거대한 거머리처럼 생겼다. 턱이 없기 때문에 둥근 가장자리에 돌기가 달린 원시적인 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머리는 무척추동물이지만 칠성장어는 명실상부한 척추동물이다. 


그 뒤를 이어 오르도비스기와 데본기를 거치면서 턱을 가진 동물이 나타났다. 동시에 마이엘린도 나타났다. 신경세포의 전기적 신호전달의 속도와 효율이 빨라졌다. 안정적인 신호를 전달할 뿐 아니라 신호 전달에 필요한 에너지도 줄어들었다. 희소돌기아교세포(oligodendrocyte)가 바로 마이엘린을 만들어 엑손을 둘러싸는데, 크고 복잡한 뇌와 거대한 신체의 다양한 신호 전달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인간은 기이할 정도로 큰 뇌를 가지고 있다. 두발걷기를 하면서 골반은 점점 작아졌는데, 뇌는 오히려 커졌다. 하는 수 없이 아기를 일찍 낳는 방법으로 타협했는데, 대략 6~9개월 정도는 일찍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 갓난아기는 정말 유약하다 못해 안쓰러울 정도다. 걷기는커녕 서지도 앉지도 못한다. 심지어 목도 가누지 못한다. 갓난아기를 안을 때는 반드시 머리 뒤를 받쳐주어야 한다. 거의 세 달이 지나야 겨우 스스로 목을 가눈다. 그래서 그때 백일잔치를 하는 지도 모른다. 일 년이 지나야 겨우 두 발로 서는 정도다. 돌잔치다. 


그러니 뇌 발달의 상당 부분은 태어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단 뉴런의 숫자를 늘린 후, 회백질에서 뉴런 간의 시냅스를 정리한다. 이 과정에서 희소돌기아교세포가 마이엘린으로 엑손을 감싼다. 백질의 수초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시기에 따라 유기적으로 일어나면서 회백질과 백질이 단단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다양한 세포가 협업한다. 미세아교세포(microglia)는 부서진 마이엘린 조각을 분해하고 신경아교세포는 뉴런을 구조적으로 지지하며 영양을 공급하고 손상된 부분을 보수한다. 


이는 오직 인간에게서만 일어나는 특이적 형질이다. 침팬지나 돌고래처럼 제법 뇌가 큰 동물도 중추신경계의 수초화가 거의 완료된 상태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수초화는 출생 이후에 주로 일어나는데, 사춘기를 넘어 30대 무렵까지도 지속한다. 그래서 인간은 서른이 되도록 철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걸까. 


기나긴 수초화의 과정은 좀처럼 철이 들지 않는 단점도 있지만, 상당히 이점을 인간에게 제공했다. 생애 초기의 다양한 환경에 반응하여 인지 기능의 발달을 조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인기에 접어들어서도 새로운 인지적 능력을 획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무 살이 넘은 어른도 새롭게 자전거를 배울 수 있고, 피아노도 칠 수 있다. 어린이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한심스러울 정도로 더디게 배워나가겠지만, 그래도 결국 ‘어른도 아이만큼’ 해낼 수 있다.


유연과 견고 사이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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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아주 큰 뇌를 가지고 있으므로 뉴런의 숫자나 뉴런 간의 연결성도 엄청나다. 그러니 안정적인 수초화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합선이 일어날 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조상은 아주 위험한 선택을 했다. 중추신경계의 발달을 수십 년 이상으로 크게 연장한 것이다. 마치 쌩쌩 돌아가는 컴퓨터의 본체를 뜯어서 계속 새로운 회로를 더하거나 빼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교한 전자 제품일수록 고장도 잘 난다. 불량률이 1만분의 일이라고 해도, 부품이 1만 개라면 분명 어딘가는 고장 난 상태다. 인간의 뇌는 생물의 역사상 가장 정교한 전자 제품인데, 아주 특별한 기능까지 추가로 덧붙였다. 스스로 회로를 재구성하는 기능이다. 이런 전략은 인지적 유연성이라는 점에서 큰 이점을 주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아슬아슬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발성 경화증은 주로 20대 이후에 발생한다. 보브는 이런 점을 들며 다발성 경화증은 마이엘린의 회복과 손상의 균형이 깨어지면서 나타나는 병이라고 했다. 새로 더해지는 마이엘린의 복구 속도가 느려지면서 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 체화 가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명이 길어지면서 뇌도 커지고 뉴런의 연결성도 복잡해지고, 이로 인한 인지적 능력은 다양한 생존 상의 이점을 낳았지만 다발성 경화증도 낳았다는 것이다. 


사실 엑손 전체에 마이엘린을 두껍게 꽁꽁 싸놓는다면 다발성 경화증은 생길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뉴런의 재구성은 몹시 어려워질 것이다. 전선의 피복이 얇으면 벗겨내어 연결하기가 아주 쉽다. 아주 얇은 전선은 칼도 필요 없다. 성냥불로 살살 녹여서 연결할 수도 있다. 반면에 두꺼운 피복으로 감싼 전선은 새로 연결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한번 만들어 두고두고 쓸 회로라면 두꺼운 전선으로, 자주 연결을 바꿀 요량이라면 얇은 피복의 전선이 바람직하다. 생물이 가진 모든 형질은 타협의 결과다. 유연함을 선택할 것인지 혹은 견고함을 선택할 것인지 기로에서 우리 조상은 유연함을 선택했다. 


아마 다발성 경화증은 뉴런의 재구성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일치 때문에 발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상이 더 빨라지거나 회복이 늦어지면서 생긴다는 것이다. 유전자도 영향을 미치고, 환경도 영향을 미친다. 병원체가 적은 지역에서는 면역 반응이 신경세포 및 관련 조직을 잘못 공격하여 발병률이 높아질지도 모른다. 혹은 유연한 인지적 적응이 필요한 환경, 즉 환경 변화가 격심한 지역에서 오래도록 적응한 인구 집단에서는 재구성 과정이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고, 불가피하게 다발성 경화증이 높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이킹의 후예인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과 아이슬란드, 영국 일부 도시들처럼 신경계 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이 가장 많이 진단되는 나라들의 환경이 그랬던 것일까.  


여성과 다발성 경화증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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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흥미로운 사실이 발표되었다. 다발성 경화증이 점점 늘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유독 여성에게서 발병률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은 한 번 발병하면 증상이 심하고 빠르게 병이 진행하지만, 전체적인 유병률은 여성이 더 높다. 약 두 배 혹은 세 배에 달한다. 사실 이런 경향은 자가면역질환에서 흔하게 관찰되는 현상이므로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왜 최근 여성의 발병률만 크게 높아지고 있는 것일까?


보브는 현대 사회의 변화된 환경과 과거 환경에 적응한 몸이 충돌하는 불일치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여성의 발병이 증가하는 이유는 아마 임신과 출산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늦은 나이에 임신하거나 아예 아기를 가지지 않는 여성은 다발성 경화증에 좀 더 취약하다. 게다가 임신을 한 환자의 경우 후반기로 가면 증상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 좋아진다. 물론 출산을 하면 약 30%에서 다시 재발하지만 말이다. 


임신은 아주 독특한 신체적, 정신적 상황인데, 면역 반응에서도 물론 그렇다. 임신하고 있으므로 면역 반응이 다소 무뎌진다. 면역 기관이 아기를 공격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의 여성은 아기를 적게 낳을 뿐 아니라, 초산 연령도 늦어지고 있다. 20대 후반이 되어야 한 명을 낳는데, 심지어 한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30대로 넘어가 버렸다. 면역 반응이 무뎌지는 임신 기간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춘기 이후의 여성은 주기적인 호르몬 변화를 겪는다. 그런데 임신과 수유 기간은 이러한 호르몬 변화에서 자유로운 기간이다. 호르몬 등락이 유발하는 면역 반응은 다발성 경화증을 악화시키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아기를 아예 낳지 않는다면 여성은 초경 이후 폐경 무렵까지 단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주기적인 호르몬 변화에 노출된다. 인류 진화사적으로 초유의 사태다. 


면역 반응에 더해서 직접적인 대뇌의 영향을 지적하기도 한다. 임신 중에는 뇌 가소성이 증가한다. 옥시토신과 프로락틴이 나오는데, 이는 출산과 수유를 돕는 호르몬이다. 그런데 양육을 위한 정서 반응을 촉진하는 기능도 같이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서 임신을 한 여성의 뇌는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인지적, 정서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 아기의 작은 변화도 금방 알아차리고, 아기의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대뇌, 특히 전전두엽이 준비하는 것이다. 아기의 기분이나 상태를 알아차리는 엄마의 능력은, 아빠의 눈으로 보면, 거의 초능력에 가깝다. 


물론 임신 중에는 해마의 신경 재생 속도가 느려지고 회백질이 감소한다는 보고도 있다. 임신할 때마다 머리가 나빠지는 것 같다는 속설이 있는데, 정말 그런 것일까? 출산 후 우울감은 상당수의 여성이 호소하는 증상이다. 아직은 확실하게 모르지만 아마도 임신은 고위 인지 기능이나 정서 공감 능력 등에 보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억력이나 산모 자신의 정서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른다. 


전반적으로 임신 중 대뇌의 변화는 다발성 경화증을 막는 긍정적인 효과가 강할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의 낮은 출산율, 늦은 초산 연령은 여성의 다발성 경화증 발병률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급격하게 서구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이런 경향이 일관되게 관찰되고 있다. 바이킹 유전자가 별로 섞이지 않았을 것 같은 지역에서도 다발성 경화증의 유병률이 높아지고 있다. 위생 환경의 개선이나 임신과 출산 연령의 변화가 원인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친구


친구는 오랜 친구가 더 좋은 법이다. 인간의 몸도 그렇다. 이른바 '오랜 친구 가설(old friend hypothesis)'에 따르면 감염체는 긴 세월 동안 인류와 공생하며 살아왔다. 질병을 일으키므로 무조건 나쁘다고 매도할 것은 아니다. 항상 민폐만 끼치는 것 같은 친구도, 막상 헤어지고 나면 그리울 때가 있다. 


오랜 친구 가설은 위생 가설의 다른 이름인데, '미생물 결핍 가설(microbial deprivation hypothesis)'라고도 한다. 오랜 친구 가설에 따르면 장내 기생충이나 미생물은 긴 진화사를 통해서 인간의 건강에 유익을 주었다. 물론 인류도 장 속에 그들이 살 공간과 영양분을 주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장내 기생충(선충, 촌충, 흡충 등)은 아주 흔했다. 아마도 최소 1만 년 이상 인간과 동거해온 것으로 보인다. 정말 오랜 친구다. 


다발성 경화증이 흔한 지역에는 기생충이 별로 없다. 특히 편충 감염이 흔한 지역에서는 다발성 경화증의 유병률이 갑자기 뚝 떨어진다. 편충에 감염됐다는 것은  장내에 다양한 기생충이나 미생물이 많다는 뜻이다. 위생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이다. 대략 열 명 중 한 명은 다른 기생충도 가지고 있다. 반대로 기생충이 없는 상태를 소위 ‘바이옴(장내 미생물) 결핍’ 상태라고 한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바이옴을 복원해 다발성 경화증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용감한 의사 몇 명이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200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파울 카레아 신경 연구소의 호르헤 코레알레와 마우리시오 파레즈는 흥미로운 연구를 발표했다. 장내 기생충에 감염된 다발성 경화증 환자 열두 명을 장기간 관찰한 연구다. 기생충 감염이 없는 다른 열두 명의 환자와 비교했다. ‘예상대로’ 장내 기생충에 감염된 환자는 재발률이 극적으로 감소했다. 면역 반응의 변화가 전반적으로 일어났는데, 질병의 경과가 눈에 띄게 더디어졌다. 


5년이 조금 지난 후, 열두 명의 환자 중 네 명에게 구충제를 주었다. 기생충이 몸에서 사라지자 다발성 경화증이 다시 악화했다. 면역 반응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기생충 감염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상식에 벗어나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사실 지금도 선뜻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그러나 다발성 경화증을 비롯하여 다양한 자가 면역 질환에서 기생충 감염 치료가 임상 시험 중이다. 결과가 자못 기대된다. 


어떤 기생충을 감염시키는 것이 좋을까? 사람을 대상으로 대충 짚이는 대로 다 시험해볼 수는 없는 일이다. 진짜 친구를 가려야 하는데,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하면 득보다 실이 클 수도 있다. 돼지편충(을 사용한 연구가 가장 많다. 사람을 감염시키는 편충과 비슷한데 인간의 몸에서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충란이 장벽을 통과할 수 없고 장 내에서 번식을 하지도 못한다. 돼지 편충은 아직까지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킨다는 보고도 없다. 사람 사이의 전파를 위해서는 축축한 땅에 두 달 이상 있어야 하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그러기 어렵다. 안전한 것이다. 게다가 깨끗한 환경에서 돼지편충 생산용 돼지를 키우면 다른 질병을 같이 옮길 일도 없다.  기대한 것처럼 성과가 좋다면 곧 많은 사람들이 돼지 편충을, 유산균이 들어간 요구르트를 즐겨 먹듯이, 즐겨 찾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음 화 미리 보기┃조상의 피

 

바스크 지방 지도. 바스크 지방은 스페인의 자치 지방이다.
바스크 지방 지도. 바스크 지방은 스페인의 자치 지방이다.

바이킹은 아마도 다발성 경화증을 많이 앓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썩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장수를 얻었으니 말이다. 수명이 가장 긴 나라는 일본과 한국 등이지만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여러 나라도 만만치 않다. 전통적인 장수 국가다. 게다가 키도 크고 날씬하다. 스웨덴이나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등의 남성 평균 신장은 180cm가 훌쩍 넘는다. 한국인보다 거의 5~10cm 이상 크다. 여성도 170cm가 넘는다. 


북유럽인이 왜 건강한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있다. 생선이나 통곡물, 채소, 과일을 많이 먹는다는 주장부터 높은 사회적 평등을 이루어 스트레스가 적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북유럽인처럼 산다고 해서, 심지어 북유럽으로 이민을 간다고 해도 수명이 길어지거나 키가 커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우리 조상들이 거의 결정해놓았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북유럽인의 형질은 자본 체화 가설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칸디나비아반도는 식량은 구하기 어렵지만, 감염원은 적은 환경이다. 이런 환경이라면 얼른 많은 자식을 낳는 전략보다는 천천히 소수의 자식을 낳는 전략이 유리하다. 수명은 자연스럽게 길어졌고 수초화는 늦은 연령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세대 간 정보 전달에 유리했지만, 불가피하게 일부 개체는 다발성 경화증을 앓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설익은 가설 수준이지만. 


빈란드 사가(vinland sagas)는 그린란드 사가와 붉은 에릭의 사가로 이루어진 바이킹의 오랜 전설이다. 레이프 에릭슨이라는 인물이 발견한 빈란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서기 1000년 경부터 구전되던 이야기는 13세기 경에 플래티북이라는 책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들은 아메리카까지 건너가 정착지를 경영했다. 하지만 모두들 단지 전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르웨이 탐험가 헬게 잉스태드와 고고학자 안네 스타인 잉스태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은 부부였는데, 빈란드 사가에 나오는 장소가 아메리카라고 확신했다. 바이킹의 후손답게 이들은 뉴펀들랜드 지역을 용감하게 탐험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오래된 집터를 보았다는 어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랑스 오 메도스에서 수년 간의 발굴 끝에 천 년 전 조상의 집터와 농장, 대장간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설은 역사가 되었다. 바이킹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아메리카에 발을 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에릭손은 그린란드를 경영한 붉은에릭의 아들이었다. 모험심도 닮는 것인지 몰라도 에릭손은 그린란드보다 더 서쪽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빈란드를 발견하여 수십 명의 동료와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포도의 땅 혹은 푸른 풀밭의 땅이다. 하지만 미국 개척은 쉽지 않았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공격을 받아 싸우다가 결국 포기하고 돌아간 것이었다. 노르웨이나 스웨덴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아쉬운 역사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에릭손이 미 대륙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이미 1만 년 전에 아메리카 인디언이 차지한 땅이다. 게다가 극지에 살던 이누이트족은 기원전 5세기경에 도르셋 문화를 구축하고 캐나다 북부까지 거주지를 넓히기도 했었다. 게다가 바이킹까지 잠시 머물렀으니 크리스토퍼 콜럼부스는 잘해야 네번째 발견자다. 그런데 자칫하면 다섯번째로 밀려날지도 모르겠다. 미대륙에 발을 디딘 것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민족은 바스크족이다. 스페인과 프랑스 경계에 사는 유럽 내 소수민족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스크족은 혈액형이 거의 O형이다. 바스크족의 피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필자소개 
박한선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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