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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노벨상이 비추는 남루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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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노벨상이 비추는 남루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

2019.10.15 11:03
염한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 기초과학연구원 제공
염한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 기초과학연구원 제공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도쿄대에서 조교수 시절을 보낸 경력 때문에 노벨상 시즌, 특히 올해처럼 일본 과학자가 노벨상을 탄 시즌에는 여러 질문 공세에 시달린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우리로서 일본의 늘 감정적으로 복잡한 대상이다. 일본에 의해 비자발적 근대화가 이뤄진 이후, 일본은 오랫동안 한국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우리는 일본의 노벨상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복잡한 심정으로 보고 있다.


특히 올해는 일본의 반도체 공정 재료 수출제한 조치에 따른 전국가적 대응과 국민적 극일의 분위기, 그리고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에 대한 격한 논쟁 직후에 일본 학자의 수상 소식이 들렸다. 그것도 애꿎게 소재 분야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샐러리맨 출신의 수상으로 일반 시민의 부러움도 배가 됐다. 거울을 바라보는 심정은 더욱 복잡해지고,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은 유독 남루하고 초라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감상을 걷어내고 냉정하게 사실을 정리할 때다.

 

우선, 노벨상이 대체로 20~30년 전 연구에 대한 수상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요시노 아키라 교수의 수상은 1985년에 발표한 특허, 그러니까 1980년도 초반의 연구에 대한 수상이다. 이번에 우리가 거울에서 통해서 겹쳐보고 있는 모습은 34년 전의 모습이다. 당시는 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 이전 일본 경제의 최성기다. 당시 일본의 기업들은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고, 연구개발(R&D) 투자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NTT, NEC, 히타치, 후지쯔 등 일본의 중핵기업들이 세계 최고수준의 연구소를 보유했고, 응용연구는 물론 기초연구에도 많은 투자를 했다. 아사히가세이와 같은 화학회사에서도 새로운 제품과 시장을 위해 본업인 화학제품을 다른 방향으로 활용하게 하는 엉뚱한 연구를 장려했다. 명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뛰어난 인재들이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않고 기업의 연구소로 갔다. 이들은 일본의 독특한 논문박사제도를 통해 기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명문대 교수가 됐다. 

 

기업이 수준 높은 기초연구를 통해 세계의 혁신을 주도한 것은 일본이 처음이 아니라 미국이다. 미국 경제의 황금기인 1950~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민간기업 연구소인 벨연구소와 제록스연구소, IBM 연구소 등이 기초연구를 통해 혁신을 주도했다. 이들 연구소에서 많은 수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배출됐다.

 

비슷한 시기 한국은 비교가 어려운 수준이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연구개발비 투자는 수십 배 차이가 났다. 필자가 속한 고체물리학분야, 그러니까 소재를 다루는 물리학 분야의 주요 학술지에 나온 논문 수 역시 수십 배 차이가 난다. 1970~199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노벨상 수준의 연구를 언급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얘기였다. 당시 연구로 수상하는 최근의 노벨상에 한국이 아직 수상자를 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19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투입된 두 나라의 연구인력과 연구비의 모두 적분해보면 차이는 100배는 훌쩍 넘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은 연구비 투자액이 급속히 증가했다. 현재는 일본의 절반을 넘어섰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도 동반해 급속하게 증가했다. 현 정부는 기초과학 투자를 5년간 두배 늘리기로 했으며 이 약속을 잘 지켜오고 있다. 이제 한국의 기초연구는 금액 면에서 미국, 중국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독일, 일본, 영국, 프랑스 등과는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다. 이런 투자가 10년, 20년 꾸준히 이어졌을 때 비로소 노벨상 수준의 연구성과들이 여럿 만들어질 것이다. 연구성과가 산출된 이후 노벨상 수상까지는 평균 23년 걸린다. 한국이 노벨상을 수상하려면 앞으로도 20~30년의 긴 세월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평균적인 셈법이라 언제든 뛰어난 과학자와 연구업적이 돌연 나타날 수는 있다. 아무런 사회적인 토대가 없이 박세리가 나왔고 김연아가 세계에 우뚝 섰듯이. 

 

일본이 노벨상 수상은 남루했던 우리의 지난날들을 되새겨주는 것이지, 현재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남루했고 보잘것없던 우리의 과거는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며, 여기까지 오기에 꼭 필요했던 과정이었기에 부끄러워하거나 자책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20여 년 만에 여기까지 성장한 우리 과학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최근 기초과학연구원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이미 세계 최고수준의 성과를 내는 우리 과학자의 수는 이제 일본과 겨룰만한 수준이 됐다. 이들이 성과가 축적되고 성숙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의 미래는 어둡지만 한국의 미래에는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경제의 오랜 침체로 기업 연구소가 빠르게 쇠락했다. 정부의 기초연구 투자는 정체됐고 대학의 교원 수는 인구감소와 더불어 줄어들었다. 일본은 연구력 저하는 이미 필자가 도쿄대 조교수를 마치고 귀국하던 2000년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시의 동료들인 현 도쿄대 교수들은 박사과정에 일본인 학생수가 과거의 1990년대의 3분의 1 수준이라 말한다. 2018년 일본 문부과학성의 공식적인 진단에 따르면 일본 정부도 1990년대 이후 기업 기초연구의 쇠퇴, 이공계 기피, 대학연구력 저하를 그 원인으로 꼽고 있다. 

 

1970~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 연구 황금기의 성과로 일본의 노벨상은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확연히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예상이다. 물론 일본의 쇠락이 곧 우리의 성공은 아니다. 일본과 미국의 공백을 중국이 빠르게 메우며 세계 경제와 연구개발의 주도권을 가져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놀란 눈으로 목도하고 있다. 

 

이쯤까지 얘기하면 누구나 정부의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으로 경제가 바뀌고 과학연구의 수준이 달라지는 시대는 지났다. 물론 정부 연구개발 투자는 계속 증가해야 하고 장기적인 안목의 혁신정책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민간의 연구비 투자규모가 정부의 투자규모의 세 배 이상이 되는 시대다. 소수의 한국 대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혁신적인 기업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세계 100대 혁신 대기업 순위를 보면 한국기업은 두세 곳 밖에 없고, 세계 100대 대학에 국내 대학 역시 한두 곳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세계시장에서 패스트 팔로워(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먹고 살던 시대가 지났다는 이야기가 나온지는 오래 됐는데, 아직 퍼스트 무버(개척자) 기업은 거의 없다. 추세를 좇아가며 외국인이 선도한 분야에서 많은 국내연구자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새로운 발견으로 추세를 만들어내는 과학자는 아주 드물다. 추격자는 많고 발견자는 없다는 것이다. 기업은 블루요션의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고 대학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할 것이다. 혁신은 민간과 대학이 주도하는 것이고 정부 정책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기업이 변화하고 대학이 변화해야 한다.   

 

굳이 정부 정책에 대해 말하자면 세 가지 조언을 덧붙이고 싶다. 우선 장기적인 지속성이다. 연구개발과 기초연구에 투자를 오랫동안 지속해야 한다. 시스템혁신도 계속 이뤄져야 한다. 두 번째는 균형 잡힌 정책이다. 세계에서 4차 산업혁명을 이렇게 부르짖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인공지능(AI)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지도 않고 정부정책을 AI에 ‘올인’하거나, 대학의 모든 학부생들에게 AI를 가르치는 균형 없는 정책을 해서는 안 된다. 셋째, 현재와 미래의 인력에 대한 보다 진정성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모든 혁신에 가장 중요한 것은 혁신의 주체 그러니까 높은 수준의 혁신 인재들이다. 지금과 같은 입시 위주의 중등교육과, 획일화되고 구시대적인 대학교육을 통해서는 혁신인재를 길러낼 수는 없다. 일본이 이미 걷고 있는 몰락의 길을 우리가 곧 걷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염한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포스텍 물리학과 교수·기초과학연구원 원자제어 저차원 전자계 연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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