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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지 않는 옷 가능할까?" 노벨상 받은 연구도 이렇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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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지 않는 옷 가능할까?" 노벨상 받은 연구도 이렇게 시작했다

2019.10.18 15:11
픽사베이 제공
픽사베이 제공

올해 노벨상 수상자 발표 기간 중 한 장의 사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됐다. 세포가 저산소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는지 과정을 밝힌 피터 랫클리프 영국 프랜시스 크릭연구소 교수가 1992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논문을 보냈다 퇴짜를 맞고 받은 편지 사진이다. 편지에는 “랫클리프 교수의 연구를 교차 검증한 전문가 중 일부가 성과에 의문을 품고 있어 실어줄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이 논문은 결국 생명과학 분야의 다른 학술지에 실렸다.  그는 이 연구 성과로 27년 뒤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수상자들도 피해갈 수 없을 정도로 대다수 과학자에게는 '논문 게재 거절(리젝트)’은 일상이다. 하지만 랫클리프 교수가 이런 쓰디쓴 경험의 편지를 갖고 있던 이유는 연구의 배경이 되는 질문이 언젠가 꼭 풀어야 할 ‘궁극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던진 문제를 풀었고 값진 노벨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또 그 과정에서 연구자로서 더 깊이 있고 한층 성숙한 삶을 살게 됐다.

 

피터 랫클리프 영국 프랜시스크릭연구소 교수가 받은 논문 게재 거절 통보. 하지만 이 연구는 20여 년 뒤 노벨상을 받았다. 연구자가 품고 있는 ′궁극의 질문′은 때로 이해 받지 못하지만, 연구자를 성장시키게 된다. 트위터 캡쳐
피터 랫클리프 영국 프랜시스크릭연구소 교수가 받은 논문 게재 거절 통보. 하지만 이 연구는 20여 년 뒤 노벨상을 받았다. 연구자가 품고 있는 '궁극의 질문'은 때로 이해 받지 못하지만, 연구자를 성장시키게 된다. 트위터 캡쳐

다른 나라를 쫓기만 하던 한국의 기초과학도 최근 이런 궁극의 질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달 17일 저녁 대전 유성구 KAIST 학술문화관에서는 교수와 학생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KAIST가 던지는 궁극의 질문' 대회 시상식이 열렸다. 지난 4~7월 KAIST의 대학원생과 학부생들이 보낸 680개 질문 가운데 11개가 이날 최우수상을 31개가 우수상을 받았다. 참석자와 수상자들은 "호기심과 열정을 담은 궁극의 질문과 아이디어를 함께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고 입을 모았다.

 

백원옥 KAIST 연구기획센터 교수는 ”훌륭한 연구는 좋은 질문에서 출발한다”며 “평소 학생들이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연구 환경을 조성하고 창의적인 연구 문화를 확산하자는 취지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날 최우수 질문자 중 한명에 뽑힌 이어진 씨(문술미래전략대학원 박사과정)는 "나무에 신경계를 이식하는 것이 가능할까"란 질문을 제안해 최우수 질문에 선정됐다. 이 씨는 “신경계가 이식된 식물이 움직이면 그 생물이 식물일지, 동물로 분류할지 궁금하다"면서 "인공신경이나 두뇌가 이식된 식물이 나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마음’이 탄생할까”라는 철학적 의문을 던졌다.

 

생활에서 얻은 다소 엉뚱한 질문도 나왔다. 안호진 씨(화학과 박사과정)는 "빨지 않아도 되는 옷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제안했다. 옷은 더러워지면 빨아야 한다는 현재 통용되는 개념을 바꾸자는 것이다.  안 연구원은 “옷을 빨지 않아도 되면 세제 사용과 미세섬유 발생에 따른 오염 문제도 해결된다"며 "몸에서 발생한 지방과 질소산화물, 외부 오염물질을 분해하고 미생물을 제거하는 촉매를 개발하면 빨지 않아도 늘 깨끗한 옷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융 씨(신소재공학과 석사과정)와 구본승 씨(화학과 박사과정)는 수만 년 뒤까지 정보를 전할 매체 개발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인류의 기록에 대한 속 깊은 고민을 질문에 담았다. 두 사람은 각각 “기록을 영원히 남길 방법은 무엇일까”, “영구 저장매체는 존재할까”란 질문을 내놨다. 구 씨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현존 자료에서 옛 사람들이 쓰던 말을 복원할 수 있을까"란 질문도 최우수 질문에 선정되며 2관왕에 올랐다. 구 씨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노래 가사와 발성기관 구조 변화를 분석하면 원형 발음에 가까운 소리를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최우수 질문에는 이밖에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컴퓨터가 가능할까” “나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보안체계는 무엇일까" "기존의 암모니아 제조법 효율을 뛰어넘는 생산법을 개발할 수 있을까”도 포함됐다. 

 

다른 참여자와 학생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은 '가장 인기 있었던 질문'에는 위영현 씨(화학과)의 "책을 읽지 않고 머리 속에 넣을 방법은 무엇인가"가 꼽혔다. 학업에 대한 부담에 시달리는 KAIST 학생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대목이다. 가장 많은 질문이 최우수 및 우수질문으로 꼽힌 '다승왕'에는 총 7개 질문이 뽑힌 박범식 씨(전기및전자공학부)가 선정됐다.

 

“DNA 서열과 유전체의 후성유전적 암호 패턴만으로 생명체의 미래를 얼마나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까”를 내 최우수 질문에 선정된 민혜성 씨(생명과학과)가 조광현 KAIST 연구처장으로부터 최우수질문 상을 받고 있다. 대전=윤신영 기자
“DNA 서열과 유전체의 후성유전적 암호 패턴만으로 생명체의 미래를 얼마나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까”를 내 최우수 질문에 선정된 민혜성 씨(생명과학과)가 조광현 KAIST 연구처장으로부터 최우수질문 상을 받고 있다. 대전=윤신영 기자

조광현 KAIST 연구처장은 “연구는 종종 실패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숙한 과학자로 성장한다”며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궁극의 질문, 가슴 뛰게 하는 나만의 질문이 있다면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궁극의 질문을 선정한 ‘궁극의 질문 위원회’ 위원인 박승빈 생명화학공학과 교수는 “하찮고 사소한 질문에서 출발해 보다 쓸모 있는 질문으로 발전하는 기회가 됐을 것”이라며 “보석과 같은 질문이 많았다. 누군가 중요한 질문으로 발굴할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참여한 연구자들도 신선한 생각을 해 본 계기라고 입을 모았다. “DNA 서열과 유전체의 후성유전적 암호 패턴만으로 생명체의 미래를 얼마나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까”를 제안해 최우수 질문에 선정된 민혜성 씨(생명과학과)는 “생각만 하던 질문을 구체화해 내가궁금해했던 것을 알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안호진 씨는 “특정 분야 연구하면 한쪽으로만 생각이 가는데 다양한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됐다”고 소감을 말했다.


신성철 KAIST 총장은 “과학 중진국은 선진국이 낸 문제를 잘 푸는 나라고 과학 선진국은 문제를 내면서 답도 내는 나라”라며 “우리도 과학 선진국으로 도약할 시점인 만큼 좋은 질문을 만드는 데 관심을 가질 때”라고 말했다. 신 총장은 “영구적인 저장매체 등 지금은 비관적으로 보이는 주제지만, 세상을 바꾼 발견과 발명은 이런 질문을 하고 이를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한 사람들 덕분에 이뤄질 수 있었다”며 “KAIST도 10~20년 동안 교수를 평가하지 않고 아이디어를 지원하는 ‘특이점 교수’ 제도를 운영해 이를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KAIST 제공
KAIST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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