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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도 갸우뚱? 표준 없어 읽지 못하는 '제멋대로 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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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도 갸우뚱? 표준 없어 읽지 못하는 '제멋대로 점자'

2019.11.04 16:09

점자촉지도 설치율 17% 불과, 10곳 중 3곳 해독 불가

표준 없어 각각 표기 제멋대로…점자 전문가도 좌절 

한국의 점자 표준과 관련한 연구는 1건 머물어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제작된 점자 안내판들이 잘못된 점자 사용으로 인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 관계자들이 점자표지판 설치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모습이다.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 홈페이지 캡처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제작된 점자 안내판들이 잘못된 점자 사용으로 인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 관계자들이 점자표지판 설치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모습이다.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 홈페이지 캡처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인 장상호 경남점자정보도서관장은 일반인이 책을 읽듯 점자를 막힘없이 읽는 ‘점자 숙련자’다. 다른 사람 도움 없이도 집에서 회사까지 5분 거리를 자유롭게 출퇴근하지만 건물에만 들어서면 자신감이 줄어든다. 보통은 점자로 건물의 구조와 시설을 설명하는 ‘점자촉지도’를 읽고 건물 내부를 파악하지만,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는 지도가 많다. 점자가 구형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오지 않고 윗부분이 평평한 형태로 만들어진 지도가 많아 손에 걸리지 않는다. 한참을 손을 대야 ‘화장실’, ‘안내데스크’와 같은 단어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다.

 

한참을 걸려 제대로 읽히기라도 하면 그나마 낫다. 점자의 점 사이 간격이나 점자 사이 간격이 엉망이라 열심히 손가락을 갖다 대도 무슨 말인지 읽을 수 없을 때는 허탈해진다. 장 관장은 “점자는 점 6개만 있으면 된다고 보는지 점 사이 간격이나 글자 사이 간격이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다”며 “내용을 읽을 수 없어 비싼 돈을 주고 설치했겠지만 사실상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점자촉지도는 '장애인·노인·임산부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에서 공공시설에 설치가 의무화됐다. 하지만 설치율도 낮을 뿐더러 설치된 지도도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다. 2017년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에서 실시한 '서울시 주민센터 시각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실태조사'에 따르면 시내 424개 주민센터 중 점자촉지도 혹은 음성안내설비가 설치된 곳은 75곳으로 17.7%에 불과하다. 이중에서도 규정에 맞게 설치된 것은 23곳으로 전체의 5.4%에 불과하다. 잘못 설치된 52곳 중 점자의 규격이 맞지 않거나 점자를 읽을 수 없는 상태로 설치된 건은 33건에 달한다.

 

이같은 사례는 곳곳에 있다. 시각장애인은 화장실에 앉으면 다시 한번 움츠러든다. 비데의 버튼엔 시각장애인이 ‘비데’ ‘세정’ ‘건조’와 같은 버튼 기능을 알 수 있도록 점자가 붙어있다. 하지만 6점 글자 내 점 사이 간격이 같도록 권고한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권고안과 달리 가로 점 간격이 훨씬 좁아 시각장애인이 쉽게 읽을 수 없다. 글자 사이 간격도 점 사이 간격보다 좁아 다른 글자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다. 장 관장은 “화장실에서 비데가 있는 건 알아도 써 본 적은 없어 무슨 용도인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이 읽지 못하는 점자 지도

 

11월 4일은 점자의 날이다. 한글 점자 ‘훈맹정음’의 반포일인 1926년 11월 4일을 기념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이 고아와 장애인 교육을 위해 구휼기관으로 설립한 제생원에서 교사로 일하던 박두성 선생이 일본 점자를 대체할 목적으로 한글 점자를 비밀리에 만들어 배포했다. 지금은 수만 명의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활용하고 있다. 2018년 기준 국가에 등록된 시각장애인은 25만 2957명이다. 2014년 국립국어원이 조사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중증 시각장애인인 장애등급 1~4급 시각장애인 기준 점자가 필요하다고 응답한 이는 41.6%다.

 

한글점자는 기본적으로 점 6개로 구성된다. 왼쪽 위부터 아래로 1, 2, 3점, 오른쪽 위부터 아래로 4, 5, 6점으로 정했다. 6개 점의 조합에 따라 다양한 글자를 만든다. 점의 위치에 따라 글자가 결정되기 때문에 점자는 다른 언어와 다르게 ‘크기’와 ‘모양’이 중요하다. 글자는 작게 쓰나 크게 쓰나 글씨체를 바꾸나 이를 읽는 데 무리가 없다. 반면 점자는 손가락 끝의 감각에 의지해 읽어야 해 손가락 끝에 들어오는 일정한 크기가 필수다. 또 점자는 반구형으로 돌출돼야 손가락이 쓸고 지나갈 때 손가락에 걸리지 않고 부드럽게 지나가며 점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발간한 시각장애인용 편의시설 설치 매뉴얼 점자 규격이다. 점자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권고사안으로 법적인 구속력은 없다. 미국의 점자 규격을 차용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제공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발간한 시각장애인용 편의시설 설치 매뉴얼 점자 규격이다. 점자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권고사안으로 법적인 구속력은 없다. 미국의 점자 규격을 차용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제공

미국과 유럽, 일본, 호주는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읽기 편리하도록 국가에서 점자의 외형적 규격을 지정했다. 미국은 ‘미국장애인법(ADA)’에서 점자의 물리적, 외형적 규격을 정의해 규격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법을 기반으로 '미국장애인법과 건축상 장애물관련 접근성을 위한 가이드라인(ADA & ABA)'에서 점의 높이와 지름, 점과 점 사이 간격, 글자 간 간격, 줄과 줄 간격을 모두 규정해 점자의 해독력을 보장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국가에서 정한 점자 표준이 없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미국 기준을 참고해 제시하고 있는 표준이 전부다. 국가 표준이 없다 보니 점자가 필요한 구조물을 설치할 때 참고할 것이 없어 시각장애인에게 오히려 불편을 끼치는 점자가 다수 나온다. 앞서 나온 점자촉지도나 비데 속 점자 사례처럼 시각장애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점자가 설치되는 것이다.

 

제작자 입장에선 국가에서 권고한 표준이 없어 참고할 것이 없다. 때문에 점자가 들어간 설비를 제작하는 이들의 편의대로 점자가 제작되고 있다. 개당 60만 원이 넘는 점자촉지도에는 철판에 점자를 만들 때 원통형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부식형 점자’가 반구형 점자보다 제작비가 싸다는 이유로 쓰인다. 이 점자는 비장애인에게만 보이는 점자다. 시각장애인이 거의 읽을 수 없다. 비데도 버튼이 작다 보니 임의로 규격을 만들어 버튼 속에 넣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점자가 나온 사례다.

 

한국은 점자 표준이 문제가 돼 비용을 치른 사례가 있다. 한국의 유일한 점자 KS 표준인 ‘엘리베이터용 점자표시 표준’ 사례다. 한국에서 가장 점자를 많이 볼 수 있는 설비인 엘리베이터의 점자 표준은 2002년 처음 만들어졌으나 만드는 과정에서 시각장애인과 점자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았다. 점 크기와 간격, 높이와 간격 등이 실제 한국에서 쓰이는 점자와 다른 표준이 나와 시각장애인의 항의가 빗발쳤다. 이 표준은 2013년 한국시각장애인편의증진센터의 의견을 받아 개정됐다.

 

화장실에 설치된 비데의 점자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권고한 규격과 달리 글자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점자 글자가 서로 붙어있다. ′건조′의 ′조′라는 글자를 보면 4,6점(ㅈ)과 1,3,6점(ㅗ)가 간격을 두고 쓰여야 하지만 글자 내 점의 간격과 글자 간 간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달 9월 설치된 엘리베이터에도 점자 점 간 가로 간격과 세로 간격이 같아야 하지만 가로 간격이 더 좁은 모습이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화장실에 설치된 비데의 점자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권고한 규격과 달리 글자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점자 글자가 서로 붙어있다. '건조'의 '조'라는 글자를 보면 4,6점(ㅈ)과 1,3,6점(ㅗ)가 간격을 두고 쓰여야 하지만 글자 내 점의 간격과 글자 간 간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달 9월 설치된 엘리베이터에도 점자 점 간 가로 간격과 세로 간격이 같아야 하지만 가로 간격이 더 좁은 모습이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시각장애인에게 유용한 점자 표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행 연구가 필수다. 시각장애인에게 도움이 되는 점자 표준을 만들기 위해 외국은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여러 규격을 만들고 시각장애인에게 이를 읽게 해 가장 읽기 쉽다고 느끼는 점자를 찾아내는 연구가 많다. 최근에는 점자의 크기, 높이에 따른 영향을 각각 관찰하는 추세다. 데이지 레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연구원팀은 점자의 높이가 0.04㎜보다 작아지기 시작하면 점자를 읽는 속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을 밝혀내 올해 4월 국제학술지 ‘플로스원’에 발표하기도 했다.

 

반면 한국의 점자 표준과 관련한 연구는 1건이 전부다. 김영일 조선대 특수교육과 교수가 2016년 국립국어원에 제출한 ‘점자 활용 규격 표준화 및 사용자별 교육 과정 개발: 점자 규격 표준안 개발’ 연구 보고서가 유일하다. 분당 평균 점자 50자를 읽는 시각장애인 40명을 대상으로 종이와 스티커, 폴리비닐카보네이트(PVC), 알루미늄, 자외선(UV) 필름 등의 재료에 다양한 규격의 점자를 만들어 어떤 규격이 한글점자를 읽기에 가장 좋은지 평가했다.

 

그 결과 종이 점자에서 40명 중 29명이 점자 높이 0.6㎜, 지름 1.5㎜, 점 사이 간격 2.3㎜, 글자 간 간격 6.1㎜, 줄 사이 간격 10㎜ 규격을 가장 선호했다. 연구팀은 이를 토대로 종이의 점자 높이 0.6~0.9㎜, 지름 1.5~1.6㎜, 점 사이 간격 2.3~2.5㎜, 글자 간격 6.1~6.9㎜, 줄 간격 10~10.2㎜를 표준 규격으로 제안했다. 미국 규격은 각각 0.6~0.9㎜, 1.5~1.6㎜, 2.3~2.5㎜, 6.4~7.6㎜, 10~10.1㎜다.

 

미국 점자 규격과 한국인이 선호하는 점자 규격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글자 사이의 간격을 뜻하는 ‘자간’에서는 차이가 났다. 김 교수는 “미국 지침이 한국에도 적용할만한지를 평가하기 위해 수행한 연구”라며 “자간은 미국 표준보다 좁아져야 잘 읽는 경향을 보였다”고 말했다. 한국 점자에 맞는 표준이 새로 필요한 이유를 보인 것이다.

 

점의 두께를 0.6mm와 0.4mm로 만든 점자촉지도의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표준 규격 없이는 시각장애인의 가독성을 떨어트리는 점자가 나올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 제공
점의 두께를 0.6mm와 0.4mm로 만든 점자촉지도의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표준 규격 없이는 시각장애인의 가독성을 떨어트리는 점자가 나올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 제공

정부도 뒤늦게 문제를 인식하고 점자 표준을 만들기 위한 법을 만들었다. 시각장애인의 문자권을 보장하기 위해 2017년 제정된 ‘점자법’이다. 2018년 12월에는 이 법에 근거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점자 규격을 표준화하고 점자 교재를 개발하는 내용을 담은 ‘제1차 점자발전기본계획(2019~2023)’을 발표했다. 점자의 크기와 간격 등을 표준화하는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고 의약품이나 화장품, 지하철 등에 적용할 규격 표준화 방안도 연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표준화 방안을 위한 연구계획만 2021년과 2022년에만 잡혀있을 뿐 표준 마련을 위한 구체적 계획은 언급돼있지 않다.

 

전문가들은 법과 계획이 겨우 마련됐으나 관련 예산이 부족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표준을 정하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김 교수는 “점자 규격 표준을 만들려면 연구개발 예산이 있어야 하지만 올해 한국에서 점자 연구와 관련한 예산은 2억 원도 채 되지 않는다”며 “이 같은 상황에서는 실태조사만 간헐적으로 수행할 뿐 점자 표준을 만들기 위한 기초연구는 엄두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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