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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N사피엔스] 그래도 지구는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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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N사피엔스] 그래도 지구는 돈다

2019.11.29 13:17
시레데우스 눈치우스  책의 일부.
시레데우스 눈치우스 책의 일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10년에 출간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는 유럽 지식인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그러나 망원경을 이용한 갈릴레이의 놀라운 발견을 모두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일단 눈과 물체 사이에 뭔가가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맘에 들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영향이었다. 달이 울퉁불퉁하고 태양에 얼룩무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망원경이라는 장비의 결함 때문이 아니냐는 반론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관측결과를 설득하기 위해 망원경이 실제 피사체를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확대해서 눈앞에 보여줄 뿐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만든 망원경을 유럽의 유지들에게 보내기도 했고 직접 로마로 가서 시연을 하기도 했다. 즉,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건물 등을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여주면 망원경이 피사체를 왜곡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그 망원경으로 달이나 태양의 흑점을 관측하면 갈릴레이가 관측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한 결과는 한 마디로 코페르니쿠스가 옳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갈릴레이는 금성의 상이 초승달, 반달, 보름달 등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관측했다. 이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고정돼 있고 금성과 태양이 이 순서로 지구 주위를 돌 때 결코 관측할 수 없는 결과이다. 특히 보름달 같은 모습은 이런 구조에서 도저히 만들어낼 수가 없다. 반면 태양이 중심에 있고 금성과 지구가 이 순서대로 태양 주변을 돌면 금성의 다채로운 상변화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갈릴레이가 로마를 오가며 유력자들을 만나 태양중심설이 옳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다니자 이를 공격하는 움직임도 일기 시작했다. 특히 1615년 2월, 니콜로 로리니 신부는 로마 종교재판소에 갈릴레이의 편지를 고발했다. 이 편지는 1613년 갈릴레이가 그의 친구였던 피사대학의 수학자 베네데토 카스텔리에게 보낸 것으로 성경과 자신의 발견 등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갈릴레이는 성경의 문구를 글자 그대로,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성경의 문구는 신앙을 위한 것으로 성경에 적혀 있는 천문 현상은 보통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도록 단순화시킨 것이며 자연현상의 본질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나아가 갈릴레이는 태양중심설이 성경과 양립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태양계의 모식도를 나타낸 것으로, NASA 제공
태양계의 모식도를 나타낸 것으로, NASA 제공

그러나 1년 뒤인 1616년 2월, 교황은 더 이상 코페르니쿠스를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못하게 했다. 벨라르미누스 추기경은 직접 갈릴레이를 소환해 이 내용을 경고했고 갈릴레이는 이 경고를 받아들였다. 교황의 이 조치에 따라 코페르니쿠스의 《천구회전에 관하여》는 내용이 수정되지 않은 출판이 금지되었다. 


갈릴레이에게 서광이 비친 것은 1623년이었다. 피사대학 동문이면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즉위한 것이다. 갈릴레이는 신임 교황을 몇 번 알현하기도 할 정도였다. 갈릴레이는 일관되게 자신의 천문학적 관측 내용이 성경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변을 설득했다. 전임 교황에 비해 우르바노 8세가 상대적으로 갈릴레이에 우호적이었던 덕분에 갈릴레이는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정리해 출판하기로 했다. 그 책이 바로 《두 체계의 대화(이하 대화)》이다. 


《대화》는 4막으로 구성된 연극 같은 이야기이다. 살비아티, 세그레도, 심플리치오 등 세 명의 등장인물이 나흘에 걸쳐 나눈 대화를 4막으로 구성했다. 살비아티는 갈릴레이 자신의 아바타라 할 수 있는 인물로 대단히 지적이고 태양중심설을 옹호한다. 심플리치오는 그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단순하고 무식한 인물로 지구중심설을 옹호한다. 이탈리아 말로 심플리시오토(simpliciotto)는 바보, 얼간이란 뜻이다. 세그레도는 살비아티와 심플리치오를 중재하는 척하면서 결과적으로 살비아티 편을 드는 인물이다. 살비아티와 세그레도는 실제 피렌체와 베네치아에 살았던 갈릴레이의 지인들로 《대화》가 나올 때에는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대화》의 첫째 날엔 천체관, 둘째 날엔 지구의 자전, 셋째 날엔 지구의 공전, 넷째 날엔 조수의 운동을 다룬다. 애초에 갈릴레이가 《대화》를 쓴 목표는 조수의 운동을 지구의 자전운동과 공전운동의 조합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조수운동은 달과 태양의 중력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중력은 갈릴레이 바로 다름 세대인 영국의 뉴턴이 처음 발견했다. 중력 없이 조수의 운동을 올바르게 설명할 수는 없다. 예컨대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주기를 갈릴레이는 잘못 예측하기도 한다. 따라서 갈릴레이의 원래 기획은 사실상 실패였다. 


우여곡절 끝에 《대화》는 1632년에 출간되었으나 교회의 압박을 피할 수는 없었다. 교회가 《대화》에 강경했던 이유는 물론 《대화》의 내용이 성경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1618년 신교도들이 프라하에서 일으킨 30년 전쟁으로 교황은 강력한 리더십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대화》에 등장하는 심플리치오가 사실은 교황을 빗댄 인물이 아니냐는 소문을 교황이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게다가 갈릴레이에게는 불행하게도 1616년 벨라르미누스 추기경이 경고를 했고 갈릴레이가 이를 받아들이는 상황을 기록한 문서가 1632년 검사성성 문서고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갈릴레이는 로마 종교재판소의 검사성성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갈릴레이는 1632년 10월부터 로마소환을 종용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차일피일 로마행을 미루었다. 실제 당시 갈릴레이의 건강이 좋지도 않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의사의 소견서도 있었다. 갈릴레이가 1564년생이니까 1632년이면 만 68세이다. 지금 기준으로도 68세면 충분히 노인이다. 그해 12월엔 정말 몸져눕기까지 했다고 하니 갈릴레이의 호소는 단지 나이를 핑계로 한 꾀병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는 사정을 봐 주지 않았다. 종교재판관들은 갈릴레이가 제 발로 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끌고 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종교재판관 앞에 선 갈릴레오. Joseph-Nicolas Robert-Fleury 그림.
종교재판관 앞에 선 갈릴레오. Joseph-Nicolas Robert-Fleury 그림.

결국 갈릴레이는 이듬해인 1633년 1월20일 피렌체를 떠나 생애 마지막 로마행 여정에 올랐다. 로마로 가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중간에 토스카나 지방에 페스트가 창궐해 토스카나와 교황령의 경계지역에서 2주 동안 발이 묶였다. 이때 갈릴레이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겨울에 성치 않은 늙은 몸을 이끌고 종교재판소로 끌려가는 길이다. 두 딸은 피렌체의 자택 근처 수도원에 남겨져 있다. 하필 페스트 때문에 시골벽지에 발이 묶였다. 끼니도 시원찮았다고 한다. 종교재판소에 나간다는 건 현대적인 재판처럼 유무죄를 다툰다기보다 이미 유죄가 확정적인 상태에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형벌을 선고받는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당시의 갈릴레이에겐 페스트로 격리된 시골집의 거친 식사와 한겨울 추위보다 종교재판을 받아야 하는 암담한 미래가 더 괴로웠을 것이다. 


2월13일 로마에 도착한 갈릴레이는 로마의 토스카나 대사관인 팔라초 피렌체에 머물렀다. 첫 심문은 4월12일 감사성성 판사실에서 있었다. 심문에 나선 것은 10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종교재판관이 아니라 집행관 마쿨라노와 보좌관 한 명이 전부였다. 심문은 모두 네 차례 진행되었다. 이 재판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대화》가 1616년 교황의 결정, 즉 더 이상 코페르니쿠스를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느냐 하는 여부였다. 기록에 남아 있는 심문과정을 보면 갈릴레이가 과학자로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종교에 맞섰다는 식의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Eppur si muove).”는 말을 남겼다는 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갈릴레이는 잘나 보이려는 지적 허영심 때문에 또는 코페르니쿠스를 논박하기 위해 <대화>를 썼다고 진술했다. 마지막 네 번째 심문은 6월21일에 있었다. 그 이튿날인 6월22일에는 판결 결과가 선고되었다. 선고 장소는 검사성성 판사실이 아니라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교회에 딸린 수도회 방이었다. 이 교회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판테온 바로 옆에 있다. 교회는 아직도 교회로 남아 있지만 수도회 방은 지금 의회 도서관으로 쓰고 있어서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다. 이날 판결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갈릴레이가 이단으로 의심되며 태양중심설이 성경에 위배된다고 교회가 선언한 이후에도 이를 옹호한 것은 잘못이나 그 입장을 버리겠다고 맹세하면 죄는 면해 준다. 다만 《대화》는 금서로 지정하고 갈릴레이는 검사성성에 투옥하며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7대 고해성시를 암송한다. 


 이 결정에 따라 갈릴레이는 자신이 교회의 경고를 어겼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포기한다는 각서에 서명했다. 


판결문에는 열 명 중 일곱 명의 재판관이 서명했고 세 명이 불참했다. 그 중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우르바노 8세의 조카로서 가장 적극적으로 갈릴레이의 구명에 나섰던 사람이었다. 판결문을 바꾸지는 못했으나 그의 노력 덕분에 갈릴레이는 지하 감옥에 갇히는 대신 가택에 연금되었다. 갈릴레이가 연금된 가택은 핀초 언덕에 있는 메디치 저택으로 지금은 프랑스 문화원으로 쓰고 있다. 로마의 지하철역 스파냐 역에서 아주 가깝다. 보통 관광객들은 스파냐 역에 내려 남쪽으로 펼쳐진 스페인 계단과 광장으로 내려가는데 그 반대편 북쪽 언덕으로 메디치 저택이 있다. 


갈릴레이는 6월23일부터 7월6일까지 메디치 저택에 머물렀고 이후 시에나의 피콜로미니 대주교가 있던 저택으로 연금지를 옮겼다가 12월부터는 피렌체의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택에 연금되었다. 이후 갈릴레이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르체트리에서 살았다. 가택연금이긴 했어도 이따금 같은 동네에 있었던 딸들의 수녀원이나 눈병 치료를 위해 도심 의사에게 다닐 수는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갈릴레이의 피렌체 귀환을 누구보다 반겼을 맏딸 마리아 첼레스테는 갈릴레이가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지 않은 1634년 4월2일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금서로 지정된 《대화》는 그해 여름 정가의 12배까지 가격이 폭등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무언가가 갑자기 금지되면 더 해보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인가 보다. 한국에서도 2008년 국방부가 이른바 ‘불온서적’을 지정한 적이 있었다. 국방부는 총 23종의 서적을 볼온서적으로 지정했는데 해당 서적들은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뒤에 판매량이 늘어났고 (일부 책은 평소의 7배) 인터넷 서점에서는 국방부 지정 불온서적 코너를 따로 운영하기도 했다. 


 교회가 종교적인 이유로 과학책을 금서로 지정한 옛날을 미개하다고 탓할 일이 아닌 셈이다. 그때 세간에서는 제발 내 책도 국방부가 금서로 지정해 달라는 저자들의 웃지 못할 요구가 일기도 했었다. 갈릴레이 사후에도 《대화》는 검열 없이 출판되지 못했다. 모든 검열이 폐지된 것은 1835년에 이르러서였다.


갈릴레이의 재판은 1633년으로 모두 끝난 과거만의 일이 아니다. 1939년 교황 비오 12세는 갈릴레이를 과학연구의 가장 담대한 영웅들 중의 한 명으로 묘사했다. 
 

1965년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는 1633년의 재판을 언급하며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1992년 10월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청 과학원 공식회의에서 1633년 재판이 부당함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했으며 갈릴레이의 완전한 복권을 선언했다. 

 

그러나 갈릴레이에 우호적인 평가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1990년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로마 사피엔자 대학에서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판결은 이성적이고 정당했다(“rational and just”)고 말했으며 2003년 9월에는 교황청 교리성성의 안젤로 아마토 대주교가 우르바노 8세는 갈릴레이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한바탕 큰 소란이 있었던 것은 2008년이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16세가 그해 1월 로마의 사피엔자 대학을 방문하려고 하자 대학 관계자들이 격렬하게 교황의 방문을 반대하고 나섰다. 

 

 2005년 교황에 취임한 베네딕토 16세는 바로 1990년 사피엔자 대학에서 교회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던 라칭거 추기경이었다. 사피엔자 대학에서는 물리학과 소속 전 교수를 포함해 67명의 교수와 수많은 학생들이 18년 전 추기경 시절의 발언을 문제 삼아 교황의 대학 방문을 반대했다. 물론 모든 대학 구성원이 교황방문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듣자 하니 교황방문을 찬성하는 학생들이 산 피에트로 광장에서 대학 방문을 호소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베네딕토 16세는 대학방문을 취소했고 갈릴레이의 업적을 찬양하는 등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이 일화를 전해 들으면서 나는 이탈리아가 역시 선진국이구나 싶었다. 한국 사람들 중에는 서유럽 나라들 중에서 이탈리아를 좀 업신여기는 분들이 있다. 예전에 유로화가 통용되기 전 리라화를 쓸 때는 리라화의 가치가 원화보다 낮기도 했었다. “조상 잘 만난 덕에 관광으로 먹고 산다.”는 조롱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재벌 총수가 유명 사립대학을 방문하려하자 이를 반대하며 저지하고 나선 학생들을 대학이 무더기로 중징계한 적이 있었다. 그 대학 동문들은 어리석은 학생들 때문에 후배들의 취업길이 막혔다며 그 학생들을 나무라기도 했었다. 400년 전의 재판과 18년 전의 발언을 문제 삼아 교황의 앞길도 가로막은 이탈리아 교수와 학생들의 지조랄까, 나는 그게 부러웠다. 선진국이란 그저 거시경제지표 몇몇으로만 환산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그때 강하게 들었다. 갈릴레이의 재판과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교과서 속 옛날 이야기로만 받아들이는 학생들에게 2008년 사피엔자 대학 사건과 한국의 어느 명문대학 일화를 소개하면 학생들의 표정이 사뭇 복잡해진다. 과연 우리 학교에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지체 높은 분이 방문한다면, 또는 어느 직책을 맡고 부임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너무 ‘꼰대스런’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나로서는 과학적인 지식 하나를 더 가르치는 것보다 이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게 훨씬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그저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애티튜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참고자료

-윌리엄 쉬어, 마리아노 아르티가스, 《갈릴레오의 진실》(고중숙 옮김), 동아시아.
-데이바 소벨, 《갈릴레오의 딸》(홍현숙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연합뉴스, ‘국방부 고마워요’ 불온서적 지정된 책들 ‘잘 팔리네’, 한겨레신문, 2008.8.1.,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1942.html
-Pius XII, Man Ascends to God by Climbing the Ladder of the Universe, Address to the Plenary Session of the Academy,
http://www.casinapioiv.va/content/accademia/en/magisterium/piusxii/3december1939.html
-갈릴레오 갈릴레이 파문 3백59년만에 철회, 가톨릭신문, 1992.11.8.,
-DISCORSO DI GIOVANNI PAOLO II AI PARTECIPANTI ALLA SESSIONE PLENARIA DELLA PONTIFICIA ACCADEMIA DELLE SCIENZE,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it/speeches/1992/october/documents/hf_jp-ii_spe_19921031_accademia-scienze.html
-Papal visit scuppered by scholars, BBCnews, 2008.1.15.,http://news.bbc.co.uk/2/hi/europe/7188860.stm

 

※필자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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