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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해무는 '빨리'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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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해무는 '빨리' 달리고 싶다

2019.12.08 15:00
 

기자에 입문하기 한참 전인 2013년의 일이다. 지루했던 대학원 세미나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발표가 하나 있었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이라고 소속을 밝힌 연구원이 한국의 차세대 고속열차인 ‘해무(HEMU-430X)’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독자 기술로 개발한 동력 분산식 초고속 열차가 시속 400㎞를 돌파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해무는 승승장구했다. 2013년 3월 최고 시속 421.4㎞를 기록하며 프랑스와 중국, 일본에 이어 세계 4번째로 시속 400㎞를 돌파한 열차가 됐다. 정부는 해무를 활용해 서울에서 부산까지를 1시간 30분 내로 주파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수출에도 힘쓰겠다는 계획을 서둘러 발표했다.

 

하지만 해무는 지금 한구석에서 잠에 빠져 있다. 이달 5일 충북 청주 오송 철도종합시험선로에서 열린 시연회에서 해무를 6년 만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KTX와 달리 고급 가죽 시트로 포장된 자리 위에는 독서등이 달려 있었다. 좌석 앞에는 비행기 좌석에서 볼 법한 스크린이 달려 있었다. 다른 칸에는 해무의 시운전 횟수와 운행 시간을 홍보하는 판넬이 가득 했다. 해무가 고속열차라는 느낌은 어디에서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해무가 차량 안에 싣고 싶었던 건 이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국토교통부는 2017년 제3차 철도산업발전 기본계획을 발표하며 “초고속 열차 개발추세에 따라 국내에서도 속도 경쟁에 뒤처지지 않게 초고속 열차 기술개발의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이 분야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당시에도 이미 국토부 내부에서는 속도를 더 높일 필요가 있냐는 부정론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실제 해무는 개발 당시에도 한국에 활용할 수 있냐는 회의론이 있었다. 산악이 많아 곡선 주로가 많은 한국 지형의 특성상 해무가 제 속도를 낼 수 있는 구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기엔 정치 논리에 따라 이곳저곳을 거치느라 구불구불 깔린 선로도 한몫했다. 철로를 자갈로 채워 넣은 곳은 400㎞ 이상 속도로 달리면 자갈이 튀며 열차를 망가뜨리기 때문에 고속철로를 상당수 새로 깔아야 한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해무는 KTX보다 더 빠른 속도를 추구하기 위해 개발됐다. 속도를 추구하는 기술을 만들어놓고도 결국 이용 방법을 찾지 못해 포기한다면 시속 500~600㎞를 돌파하는 다음 고속열차는 나올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게 맞다. 하이퍼루프라는 초고속 교통수단이 주목을 받고는 있지만 과연 이 역시 같은 문제를 겪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라면 한반도에서 서울과 부산은 영원히 2시간 30분 생활권에 머무를 것이다.

 

이미 해무의 속도는 줄고 말았다. 국토부는 올해 7월 해무의 동력분산 기술만을 활용한 차세대 고속열차(EMU)를 2022년까지 전철화될 동해선에 투입하기로 했다. 이 열차의 최대 속도는 시속 250㎞다. 해무는 달릴 곳이 없다. 철도연 관계자는 이번 시연을 진행하며 “오송 철도종합시험선로의 길이가 짧다 보니 최고속도를 시속 200㎞까지만 낼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고백아닌 고백이다. 이날 시연은 철도연을 관리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미옥 제1차관을 위해 마련됐다. 곧 차관 인사가 예정됐다고 하는데 해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갔을까. 해무는 부처들의 무관심 속에 속이 썩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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