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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큰 걸음]문익점 목화씨 들여오듯 천연물 연구의 불모지를 개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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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큰 걸음]문익점 목화씨 들여오듯 천연물 연구의 불모지를 개척하다

2020.04.21 16:16

김영중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김영중 서울대 명예교수에게는 자신도 모른 채 붙은 ‘처음’이라는 타이틀이 많다. 서울대 약대 첫 여성 교수이자 서울대 공채 첫 여성 교수, 대한약사회 첫 여성 회장까지. 김 교수는 한국의 천연물 연구를 개척하고 한국 자생식물 자원 보존과 활용 기반을 마련한 공을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한국 최연소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됐다. 김 교수를 서울 강남구 KAIST 도곡캠퍼스 과학기술유공자 라운지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한 분야를 개척해온 인물로서 지금의 풍모와 달리 유년 시절에는 운동장 조회에 조금 서 있기만 해도 쓰러질 정도로 병약했다고 했다. 이런 병약함이 약대로 진학하는 계기가 됐다. 김 교수는 “몸이 아프다 보니 자연스레 아픈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집에서는 의대 공부를 할 체력이 되지 않는다며 의대 진학을 반대했고 대신 택한 것이 약대였다.

 

약한 몸이 오히려 유학을 떠나는 계기가 됐다. 대학 4학년 때 학과에서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가기로 했다. 배를 타고서만 제주도를 가던 시절 집에서는 긴 여행을 못 버틴다며 반대했다. 여행을 포기하고 낙담했던 그의 눈에 문득 담벼락에 붙었던 유학생 선발 공고가 눈에 띄었다. 마침 시험 날짜가 수학여행 기간이었다. 김 교수는 “시험을 응시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덜컥 붙었다”고 했다.

 

 

유학을 고려하던 김 교수에게 시험 합격은 불을 붙인 계기가 됐다. 김 교수는 2018년 한국 첫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된 생화학 연구의 선구자 이상섭 서울대 약대 명예교수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막연히 유학의 꿈을 꿨다. 그에게는 약한 몸을 이길 강한 정신력이 있었다. 김 교수는 “아프고 조퇴하는 한이 있어도 학교는 반드시 갔다”며 “유학시험을 준비할 때도 어머니가 무릎이 짓무를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며 앉은뱅이가 되면 어쩌냐 할 정도로 미련했다”고 회고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김 교수는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생화학 석사 학위를, 일리노이대에서 영양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플로리다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다 서울대 공개채용 2기로 1978년 부임했다. 김 교수는 유학 시절 천연물을 활용해 동맥경화증 발병 원인을 밝혔던 연구를 인정받아 생약학 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당시 대학의 연구 환경은 척박했다. 1970년대는 한국 바이오 연구가 그야말로 ‘불모지’던 시절이다. 물리와 화학 연구와 달리 생물학 연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재료도 연구비도 없고 장비나 시설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천연물은 더했다. 김 교수가 부임했을 때 한국에서 발표된 천연물 연구는 스무 편도 되지 않았다.

 

서울대 제공
김영중 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대 첫 천연물 연구교수로 부임한 이후 한국의 천연물 연구 기틀을 다졌을 뿐 아니라 천연물 분야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서울대 제공

김 교수는 연구 방향을 찾는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의 천연물 연구는 간단한 성분 분석만 하는 수준이다. 활성에 관한 연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천연물에서 추출한 물질의 특성을 관찰하는 데도 실험동물을 활용했다. 하지만 당시 천연물에선 특정 물질을 대량으로 추출하는 기술도 없어 실험 동물에게 먹여도 효과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김 교수는 생약 물질을 찾는 연구를 하려면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겠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천연물 연구법을 한국에 처음 들여왔다. 당시 학계에서는 실험동물 대신 세포를 몸 밖에서 배양하면서 활성을 검증하는 연구법이 갓 도입될 때였다. 세포를 배양해 실험하면 소량의 물질로도 활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세포 실험을 통해 효과를 입증한 후 동물 임상에 접어드는 게 신약개발의 기본이지만 40여 년 전만 해도 정반대였던 셈이다.

 

틈날 때마다 미국을 오가며 세포를 활용해 생리활성을 검색하는 방법을 배워 왔다. 김 교수는 “한국에서 식물 성분을 분리하고 구조를 규명한 후 여름과 겨울방학만 되면 미국으로 가 세포를 활용해 활성을 규명하는 연구를 10년간 반복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처럼 배워 온 연구법은 한국 천연물 신약 개발 연구기법의 기초가 됐다.

 

미국에서 기술을 힘들게 도입한 김 교수의 노력을 오히려 미국이 주목했다. 김 교수는 한국 천연물 연구에선 처음으로 1998년 미국에서 5년간 200만 달러(약 24억 원)의 과제를 따내는 데 성공하며 한국 천연물 연구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과제를 시작으로 2000년에는 국가주도의 천연물 신약개발 연구프로젝트가 차려졌다. 당시 양성된 인력들은 지금의 한국 천연물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대 약학대학 약초원 제공
김 교수는 서울대 약초원장을 지내며 지금의 약초원장을 지내기 위해 서울대 총장실을 수 차례 들락거렸다고 한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맨 앞 오른쪽)도 그 중 하나다. 서울대 약대 약초원 제공

과제를 따낸 과정도 극적이었다. 미국 학회에 참석한 김 교수를 미국국립보건원(NIH) 천연물 연구 담당 국장이 수소문했다. 천연물의 활성을 물질을 찾는 연구가 드물었던 학회 속에서 김 교수의 연구를 발견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1970년대 ‘자연으로 돌아가자’를 내건 히피 유행을 거치면서 천연물 활용에 관한 관심이 커지던 때였다. NIH는 대체의학으로 활용되던 천연물과 허브를 제도권으로 들여야 한다 보고 대체의학 관리 부서를 차린 상황이었다.

 

국장은 그 자리에서 김 교수에게 NIH 과제 지원을 제안했다. 김 교수는 ‘동양의약으로부터 신경세포 보호 물질의 도출’이라는 주제로 서울대 약대 선배인 오태환 메릴랜드대 교수와 함께 과제를 지원해 1998년 상위 2.7%의 높은 평가점수로 5년간 200만 달러(당시 약 24억 원)를 따냈다. 당시만 해도 미국과 교류하는 기업이 아닌 한국 대학교수가 미국 정부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김 교수는 “외국인이 미국 연구비를 신청할 수 있는지도 몰랐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연구 기반을 마련한 김 교수는 한을 풀 듯 1년에 15편씩 연구결과를 쏟아냈다.

 

김 교수는 천연물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천연물을 키우는 데도 주력했다. 김 교수는 서울대 약초원장을 21년간 지내며 약초원을 조성한 것을 가장 의미있는 도전으로 꼽았다. 경기 고양과 시흥, 파주 일대 28만㎡에 이르는 서울대 약초원과 수목원을 혼자 힘으로 일궈내며 천연물 보전과 생물자원 관리에 힘썼다.

 

(왼쪽) 관동화, 오미자 (오른쪽) 인삼.  서울대 약학대 약초원 홈페이지
서울대 약초원에 자란 관동화와 오미자(왼쪽 위부터), 인삼(오른쪽)의 모습이다. 김 교수는 땅 하나 없던 약초원을 3만 6364㎡ 부지로 일구고 1600여 종의 자생식물을 키우는 천연물의 장으로 만들었다. 서울대 약대 약초원 홈페이지

김 교수가 1989년 처음 약초원장을 맡았을 땐 아이러니하게도 서울대에는 약초원이 없었다. 서울숲 자리에 있던 약초원은 1975년 서울대가 서울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처분됐다. 김 교수는 “보직수당을 하는 일도 없으면서 받는 게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어 약초원을 만들려 백방으로 뛰어다녔다”고 말했다. 하지만 땅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현재 230개 건물이 있는 관악캠퍼스엔 조그만 땅이라도 있으면 다른 대학 시설을 짓는 게 우선순위였다.

 

낙담하던 김 교수에게 서울대 한 직원이 '유휴 국유지'라는 대안을 제안했다. 유휴국유지는 국가 소유 땅 중 용도가 없어 쓰지 않는 땅이다. 땅에 아무것도 없다 보니 민간에서 무단으로 침입해 마음대로 활용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다 보니 골칫거리 취급을 받고 있었다. 김 교수는 경기 고양시 설문동에 닭이나 돼지를 불법으로 기르고 있는 유휴국유지를 찾아내 국가로부터 얻어냈다.

주변에 찾아보니 이런 땅이 매우 많았다. 김 교수는 약초원을 키우기 위해 곳곳에 퍼진 유휴국유지를 찾아 약초원 주변 붙은 땅과 교환하는 작업을 수차례 했다. 김 교수는 “재미가 들려서 열심히 했다”며 “당시 학교에서 우스갯소리로 복부인이라고 부를 정도”라고 말했다. 1995년 9917㎡ 규모였던 약초원은 2004년 3만 6364㎡으로 커졌다. 18만 4464㎡의 파주 약용수목원 부지와 시흥 수목원도 김 교수가 약초원장으로 있던 시기 조성했다.

 

경기 고양시 약초원은 연구와 교육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약초원 시설 하나하나 김 교수의 손을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서울대 약대 약초원 제공
경기 고양시 약초원은 연구와 교육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약초원 시설 하나하나 김 교수의 손을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서울대 약대 약초원 제공

약초원의 시설 하나하나 김 교수의 손을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약초원 축대는 밤에 약초워 빈 땅에 몰래 돌을 버리던 덤프트럭 기사를 붙잡아 오히려 돈을 줘 가며 사정해 쌓았다. 불법으로 버려진 쓰레기가 가득했던 땅은 제약회사 임원으로 있던 약대 동기들에게 받아낸 발전기금으로 치웠다. 김 교수는 “기가 막혀하던 동기들에게 고마워서 고기를 대접하겠다 약초원에 초대했다”며 “동기들이 ‘약초원장이 맨땅에서 고기를 구워주면 쓰냐’며 수도시설과 화덕 비용으로 400만 원을 주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김 교수는 대학원생들과 한국 곳곳을 누비며 채집한 식물자원 1600여 종을 약초원에 채웠다. 이 식물들에서 연구한 추출물은 모두 공개돼 후배 천연물 연구자들의 귀중한 자산이 됐다. 김 교수는 천연물 추출물 은행과 천연화합물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이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2017년 한국이 나고야의정서에 가입하고 생물주권이 중요해지며 김 교수의 업적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을 받는다. 김 교수는 “식물 하나하나가 역사”라며 지금도 가끔 약초원을 찾는다고 했다.

 

김 교수는 26년간 약대 유일한 여성 교수를 지냈다. 하지만 유일한 여성으로 외로울 시간조차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한다. 힘들 때마다 김 교수는 약대 입학 당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고 했다. 김 교수는 “약대에 처음 들어왔을 당시 학장님이 약대 정원 80명 중 20명쯤 되는 여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일종의 죄인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남자 자리를 뺏어서 국립대에서 싼 등록금을 내면서 나중에 그만둔다면 나라의 큰 죄인이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출처 교수신문

당시 연구계에 드물던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오랜 기간 약학을 연구하길 바랐던 셈이다. 김 교수는 “힘들 땐 항상 여기서 주저앉으면 죄인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약대 첫 여성 교수로 뽑혔는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만둔다면 나중에 여성 후배들, 특히 여성이 많은 약대 여성 후배들의 길을 막는 결과가 나오지 않겠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과학에서 여성과 남성을 분리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모든 과학자들의 덕목은 호기심과 세심함인데 과거엔 여성이 섬세하다고 했으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여성 후배들에게 “평등을 요구하면서도 여성임을 내세울 때가 있는데 그런 걸 하면 안된다”며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덕목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기틀을 다져놓은 한국의 천연물 연구는 주춤한 상황이다. 2000년대 들어 정부는 천연물 신약을 미래 먹거리라고 홍보하며 연구개발에만 1조 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과거 천연물 신약은 한의학 처방이 있다면 안전성 규명을 면제하는 식으로 승인됐으나 이것이 현대 의학의 안전성 및 유효성 평가에 반해 너무 느슨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결국 천연물 연구과제 대부분이 사라지고 정부는 결국 2017년 ‘천연물 신약’이라는 용어 자체를 법에서 뺐다. 배경엔 신약개발을 둘러싼 의학계와 한의학계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김 교수는 한국이 오히려 천연물 연구에 관심이 커지는 세계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며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외국은 화합물 신약개발이 한계에 도달하면서 세포나 항체를 활용한 바이오의약품과 천연물 신약에 집중하는 추세”라며 “중국은 전통의학을 동원해 무섭게 연구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싸움 속에 길을 잃지 말고 상생할 방안을 마련했어야 했는데 정부가 그렇지 못했다고도 했다. 김 교수는 “큰 안목의 정책은 쉽게 바꾸면 안 된다”며 “학계도 분야에 대한 독점 의식을 버리고 상생할 길을 모색해서 서로 상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김영중 서울대 명예교수는

 

1945년 서울 출생

1968년 서울대 약학과 졸업

1970년 미국 인디애나대 생화학 석사

1976년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박사

1978~2011년 서울대 약학대 교수

2001년 대한약학회 학술본상

2002년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자 본상

2003년 비추미여성대상 별리상

200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2009~2010년 대한약학회 회장

2011년 옥조근정훈장

 

관련링크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공식웹사이트 http://www.koreascientists.kr/scien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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