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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N사피엔스] 해부학 시대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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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N사피엔스] 해부학 시대의 도래

2020.04.16 16:30
해부학 실습 모습. 하이델베르크대 제공
해부학 실습 모습. 하이델베르크대 제공

고대 의학의 큰 줄기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에서 초기 로마의 갈레노스에 이르는 흐름이다. 앞서 이미 소개했듯이 갈레노스는 인체보다 동물을 이용해 해부학적 지식을 얻었다. 자유롭게 사람 배를 갈라볼 수 없었던 시대의 한계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이는 이슬람 의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종교적인 이유가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슬람 세계에서는 중세 유럽이 암흑기를 관통하는 동안 독창적인 의학을 꽃피울 수 있었다. 그리스-로마의 히포크라테스-갈레노스 의학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인근 인도와 페르시아의 의학도 적극 받아들여 여러 문화권의 의학을 융합하기에 이른다. 


먼저 기억해야 할 사람이 알 라지(854~925)이다. 알 라지는 의학은 물론 철학과 신학 분야에 걸쳐 200여 권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그중에는 갈레노스 의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갈레노스에 관한 의구심들》이라는 책도 있다. 주로 히포크라테스에서부터 갈레노스로 이어진 4체액설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물론 알 라지가 갈레노스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항상 비판적인 사고로 권위에 도전하고 진실을 추구했던 그의 자세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알 라지는 약제기구와 수은 연고 등을 발명했고 두통, 변비, 우울증에 대한 치료법도 개발했다.

 

알 라지. 위키미디어 제공
알 라지(865~925). 위키미디어 제공

그는 중세 임상의학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는 인물이다. 특히 《천연두와 홍역에 관한 고찰》에서 알 라지는 두 질병의 임상적 특징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여 비교하고 있다. 수많은 저서 중 알 라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저서는 무려 15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썼다는 《의학총서》이다. 연금술을 연구하다 눈에 화상을 입어 점점 시력이 나빠지던 중 이 무렵에는 시력을 잃었고 손도 마비되었다. 《의학총서》는 백과사전식 의서로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그리스, 인도, 중국의 의술까지 총망라하고 있다. 수백 년 뒤 갈레노스 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의학의 새 지평을 열었던 베살리우스는 알 라지의 의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단 한 명의 지성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한 세기쯤 뒤에 나타난 이븐 시나(980~1037)를 선택할 것이다. 이븐 시나에게는 별명도 많다. 이슬람의 아리스토텔레스, 의사의 왕자, 학문의 왕, 내과의사의 황태자 등이 모두 이븐 시나를 향한 칭호이다. 이븐 시나는 일생에 걸쳐 400여 권의 책을 썼고 백과사전식의 《의학정전》을 펴냈다. 여기서 당시 알려진 의학정보를 집대성하였으며 해부학, 질병, 위생학, 의약품 등의 부문에 걸쳐 17세기까지 유럽의학의 기본서로 사용되었다. 

 

이븐 시나는 어릴 때부터 엄청난 ‘엄친아’여서 흔히 하는 말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신동이었다. 일화에 따르면 10세에 코란을 다 외웠고 13세에 의학에 입문해 “의학이 제일 쉬워요.”라는 말을 남기고 16세에 환자를 보기 시작했고 17세엔 사만 왕조의 통치자 누 이븐 만수르의 병을 치료했다. 이 일로 왕조의 신임을 얻어 왕립도서관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18세쯤 되었을 때는 “더 이상 공부할 게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999년 투르크계 카라한 왕조에 사만 왕조가 멸망하자 이븐 시나의 인생도 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도피, 구걸, 방랑하는 세월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수많은 책을 썼는데, 대표적인 책이 《의학정전》이다. 백과사전식의 《의학정전》은 총 5권으로 생리학, 위생학, 병리학, 치료학, 약물학을 각각 다루고 있다. 《의학정전》은 17세기까지 유럽 의학의 기본서로 사용되었고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지금까지도 교재로 쓰인다.

 

이븐 시나 의학의 기본원리는 히포크라테스-갈레노스의 4체액설이며 여기에 다시 한열조습론, 즉 차갑고 따뜻하고 건조하고 습한 성질을 도입해 발전시켰다. 또한 신체와 마음이 연결돼 있다고 보고 병리현상을 심리적/정서적 문제로 치료하는 심신의학법을 도입했다. 원인 모를 중증에 걸린 어느 젊은이를 심리요법으로 치료한 사례가 전해온다. 이븐 시나는 이 젊은이에게 여러 동네와 길거리 이름을 여러 개 불러주며 젊은이의 맥박을 체크했다. 다음엔 같은 방식으로 여자의 이름을 여럿 불러주며 맥박을 체크했다. 이런 식으로 이븐 시나는 젊은이가 크게 반응하는 지점에서 정보를 얻어 그 젊은이가 어디 사는 누구에게 상사병에 빠졌음을 알아냈다. 말하자면 최초의 거짓말 탐지기 기법을 이용한 셈이다. 
 

 

이븐 시나(980~1037)
이븐 시나(980~1037)

이븐 시나는 천연재료를 이용한 식이요법과 약물치료를 처방했는데 약초를 이용한 한의학의 한약과 비슷하다. 이븐 시나가 선보인 약물은 700가지가 넘는다. 뿐만 아니라 약물의 효능을 검증할 수 있는 7가지 법칙을 제시했는데, 이는 과학적인 방법론으로서 현대적인 임상약리학의 시초라 할 만하다. 즉, 약물의 순도, 대조실험, 약물의 강도 조절, 효과 시간, 통제된 환경, 사람에 대한 임상실험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밖에도 최초로 알코올을 소독제로 사용했고 소변 맛을 보고 당뇨를 진단하기도 했다. 또한 눈의 해부학적 구조에 대해서도 대단히 자세하게 연구했다. 이는 갈레노스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고 동시대에 살았던 ‘광학의 아버지’ 이븐 알 하이탐의 연구결과보다도 의학적으로는 더 깊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 의학에서 또 한 명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이븐 알 나피스(1213~1288)이다. 다마스쿠스에서 태어난 알 나피스는 카이로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그는 한 마디로 당대 최고의 심장전문의였다. 알 나피스는 수술과 해부를 통해 심장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갈레노스의 이론을 혁파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다. 갈레노스는 심장의 좌심실과 우심실 사이 격벽에 조그만 구멍이 있어 피가 그 사이로 지나다닌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알 나피스는 심실 사이의 격벽에는 구멍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뿐만 아니라 심장의 피가 허파를 돌고 돌아오는 혈액소순환, 즉 폐순환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우심실에 있는 피가 어떻게든 좌심실로 가는 것은 맞지만 갈레노스의 주장처럼 격벽의 구멍을 통해서가 아니다. 격벽 사이에는 구멍이 없다. 심장 우측의 피는 폐동맥을 통해 허파로 전달되고 거기서 공기와 합쳐진 뒤 폐정맥을 거쳐서 좌심실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심실의 움직임. 위키미디어 제공
심실의 움직임. 위키미디어 제공

인체에서 심장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 알 나피스의 발견은 정말 대단한 발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알 나피스의 폐순환론은 1242년 《아비센나의 의학정전 해부학 주해서》에 나와 있다. 아비센나는 이븐 시나의 유럽식 표현이다. 그러나 이 책이 발견된 것은 1924년 이집트의 한 의사에 의해서였다. 


유럽인들은 이슬람 문명을 그저 그리스 로마 문명의 훌륭한 ‘냉장고’ 정도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슬람 문명은 그리스 로마 문명에 자신들의 독특한 전통과 페르시아, 인도, 중국 등 주변의 문화까지 흡수해 창의적이고 새로운, 요즘 유행하는 말로 융합적인 문명을 이루었다. 이슬람 전성기의 유럽은 여전히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지 못했고 질병이란 악귀의 소행 정도로 여기던 시절임을 생각해 보면 이슬람 문명의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다. 이슬람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불가능했을 거라는 평가는 허언이 아니다. 당연히 이슬람 의학도 누차 말했듯이 17세기까지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알 나피스의 위대한 발견 사실을 유럽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것은 참 아쉽다. 혈액소순환을 처음 제기한 유럽인은 알 나피스 이후 거의 300년 뒤인 1553년의 스페인 의사 미카엘 세르베투스(1511~1553)였고 혈액의 인체 대순환을 정식화한 것은 1628년 영국의 의사 윌리엄 하비(1578~1657)였다. 


하비로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될 인물이 둘 있다. 첫째는 그 유명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이다. 다빈치가 인체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좋은 예술작품을 남기기 위해 인체구조를 잘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만화가들은 사람의 움직임을 잘 묘사하기 위해 기본적인 인체의 해부학적인 구조, 골격이나 근육 등을 공부한다고 한다. 이는 다빈치 뿐만 아니라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빈치는 단지 인체를 잘 묘사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연구를 거듭할수록 인체의 구조 자체에 큰 관심을 가졌다. 다빈치는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누오바 병원과 로마의 산토스피리투스 병원에서 30구 넘는 시체를 해부했다.

 

당시에는 시체를 오래 보존하지 못했을 테니 해부 과정에서 부패와 악취 등의 어려움이 컸을 것이다. 다빈치는 총 1,800여 장의 해부학 그림을 남겼다. 그림 잘 그리기로는 당대 최고였던 데다 관찰력 또한 뛰어나서 다빈치가 남긴 해부도는 의학적인 가치가 무척 높다. 우선 골격과 근육 묘사가 탁월했고 두개골 내부의 비어 있는 공간인 위턱굴을 최초로 파악했고 특히 황소 두개골 왁스를 주입해 뇌실구조를 알아냈다. 응고된 왁스를 잘라보면 대뇌조직의 절단면을 관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눈과 시신경에 대한 관찰도 탁월해서 시신경이 뇌와 연결되었음을 최초로 확인했다. 또한 심장 그림도 탁월해서 그가 묘사한 심실 속 방실다발을 이해하는 데에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다빈치의 해부도 중 가장 걸작은 아마 태아를 품은 자궁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피렌체의 어느 박물관에 갔을 때 다빈치가 묘사한 그대로 자궁 속 태아의 모습과 이후 태아가 분만되는 과정을 전시한 모형을 본 적이 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도 대단히 정확한 묘사라는 해설이 인상적이었다. 

 

다빈치 해부도 중 태아가 들어 있는 자궁의 그림.
다빈치 해부도 중 태아가 들어 있는 자궁의 그림.

다빈치는 자신의 해부학 연구 성과를 파비아 대학의 델라 토레 교수와 함께 출판하기로 계획했었다. 아쉽게도 토레 교수가 사망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빛을 보지 못했다. 다빈치 사후 그의 수많은 원고는 시대와 함께 많이 유실되었다. 다빈치의 해부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죽은 지 200년 뒤였다. 역사상 최고의 화가이면서 최고의 과학자가 남긴 인체해부서적이 예정대로 발간되었더라면 의학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다빈치가 못다 한 위업을 이룬, 그래서 근대 해부학의 시대를 연 사람이 바로 두 번째로 소개할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세르베투스와 함께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동문수학했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1564)이다. 베살리우스는 벨기에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대대로 의사집안이었다. 1533년 파리대학에 입학했는데 당시로서는 드물게 파리대학에서는 인체해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3년 뒤 베살리우스는 전쟁을 피해 다시 벨기에로 돌아갔다. 이후 1537년에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파도바 대학에 들어가 이듬해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해부학 교수로 재직했다. 


베살리우스가 의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가 근대 해부학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유럽의 의과대학에서는 여전히 갈레노스를 가르치고 있었다. 수업 방식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또는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의과대학 수업과는 상당히 달랐다. 직접 인체를 해부하는 대신 갈레노스의 책을 탐독하는 게 중요했다. 가끔 해부를 할 때에도 교수가 직접 하지 않고 갈레노스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갈레노스는 동물의 배를 갈라 해부학적 지식을 습득했음을 기억하자. 만약 누군가 작심하고 사람 배를 직접 많이 갈라봤다면 갈레노스 이론의 허점을 금방 알아냈을 것이다. 바로 그 작업을 한 사람이 베살리우스였다. 해부학 교수로서 베살리우스는 수업시간에 직접 칼을 들고 동물과 사람 배를 갈랐다. 지금도 해부실습용 시체가 모자라는 게 현실인데 자유롭게 인체해부를 할 수 없었던 16세기 유럽에서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베살리우스도 해부용 시체를 얻기 위해 공동묘지를 파헤쳤다고 한다. 이처럼 직접 인체를 해부하면서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잘못을 200여 개나 찾아냈다.
 
베살리우스는 인체해부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모아 《인체해부에 대하여(Du Humani Corporis Fabrica Libri Septem)》를 출간(출간한 곳은 스위스 바젤)했다. 보통 줄여서 《파브리카(Fabrica)》라 부른다. 라틴어 'fabrica'는 장치라는 뜻이다. 라틴어 제목을 직역해 보자면 ‘인간 몸 장치에 대한 책 일곱 권’이다. 'septem'은 우리말로 일곱이다. 9월(September)에 septem이 들어간 이유는 원래 율리우스력에서 3월이 한 해의 시작이어서 3월부터 일곱 번째 달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라틴어를 조금이라도 알면 서구문명을 이해하기가 조금은 더 수월해진다. 어쨌든 septem을 보면 이 책은 총 7권임을 알 수 있다. 1권은 뼈, 2권은 근육, 3권은 혈관, 4권은 신경, 5권은 복부와 생식기, 6권은 흉부, 7권은 뇌를 다룬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직접 인체를 해부하여 그린 ′파브리카′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인체해부에 대하여(Du Humani Corporis Fabrica Libri Septem)/약칭 파브리카'

이 책이 나온 해는 1543년으로 코페르니쿠스가 《천구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하고 사망한 해와 같다. 물론 베살리우스와 코페르니쿠스가 모의해서 같은 해에 책을 내자고 합의했을 리는 없다. 이는 우연이다. 다만 좀 더 긴 시각에서 보자면 과학혁명이 시작된 시기에 《파브리카》가 출판되었다는 점은 필연적인 면도 있다. 과학의 역사에는 동시발견의 사례가 많다. 미적분도 그렇고 역제곱의 법칙도 그렇다. 흔히 이를 비유적으로 말하기를, 봄이 오면 어느 순간 갑자기 많은 꽃들이 만화방창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즉 인간의 지식이 축적되고 사유방식의 변화가 조금씩 촉발되면 어느 순간 한꺼번에 새로운 돌파구가 여기저기서 열릴 수 있다는 말이다. 《천구회전에 관하여》와 《파브리카》도 비슷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파브리카》가 이전의 의학서적과 다른 점은 고화질의 삽화가 3백 장 이상 실렸다는 점이다. 삽화를 그린 사람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인 얀 스테벤 판 칼카르이다. 삽화가 굉장히 사실적이고 세밀해서 아마 이런 부류의 책이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꽤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우리는 인체 내부를 묘사한 그림이나 사진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인체의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고 다이내믹하게 재구성해서 전시하는 ‘인체의 신비전’은 언제나 인기가 높다. 

 

《파브리카》가 누군가에게는 호기심과 인기를 불러일으켰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충격과 혼란을 야기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종교적인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는 감히 신의 영역에 도전했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베살리우스는 심장의 심실 사이 격벽에 구멍이 있다는 갈레노스의 이론을 반박했을 뿐만 아니라 남녀 갈비뼈의 개수가 다르다는 등의 성경의 말씀도 반박했다. 또한 중세 기독교와 결합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에서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심장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쳤으나 베살리우스는 뇌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기존 체계와 대립하는 의견을 낸 덕분에 베살리우스는 주변의 공격에 시달렸다. 다행히 《파브리카》가 나온 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5세가 궁정어의를 제안했고 베살리우스는 이를 받아들여 파도바를 떠났다. 나는 카를5세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1527년의 ‘로마약탈’과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를 결사적으로 옹위했던 스위스 근위병들의 무용담이 떠오른다. 


베살리우스는 궁정어의로 20년을 보냈다. 그러나 이후에도 베살리우스는 모함을 받아 사형 받을 위기에 처했다. 마침 후임 국왕도 베살리우스를 신임하여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다만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유배에 가까운 처분(사형 대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면 언제나 저항과 견제가 들어오기 마련이다. 이때 그 실력자를 신임하는 절대 권력이 커버해주는 스토리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비슷한 에피소드를 《허준》 같은 드라마에서 본 것도 같다. 성지순례까지는 무사했던 모양인데 불행히도 돌아오는 길에 배가 난파돼 베살리우스는 실종되고 말았다. 

 

※참고자료

마이클 모건, 《잃어버린 역사 이슬람》(김소희 옮김),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정규영, 중세 이슬람 문명이 근대 서구문명에 미친 영향, 한국이슬람학회 2005:133-50;  
최효재, 신길조, 이븐 시나를 중심으로 고찰한 이슬람 의학의 이해, 대한한방내과학회지 제36권 3호(2015년 9월)
채옥희, 송창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업적과 사고, 대한체질인류학회지 제29권 제2호(2016).

쑨이린, 《생물학의 역사》 (송은진 옮김), 더숲.

 

※필자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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