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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보통과학자]과학출판의 풍경을 바꾼 깨어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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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보통과학자]과학출판의 풍경을 바꾼 깨어있는 사람들

2020.04.23 15:35
 

과학출판의 풍경과 역사는 1961년 NIH의 연구처장이었던 에렛 앨브리튼은 위스콘신대 의대의 생화학자 데이비드 그린의 정보교환그룹의 등장으로 완전히 바뀔 기회가 있었다. 20세기 중반 DNA 이중나선구조의 발견으로 신흥학문으로 부상하던 분자생물학자들과 생화학자들을 중심으로 세계의 생물학계를 선도하던 과학자들은 정보교환그룹을 통해 비공식 문서들을 출판전 논문 혹은 메모의 형태로 공유했다. 그리고 이처럼 빠른 정보의 교환은 해당 분야 과학자들의 교류와 연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익숙하게 여기는 프리프린트, 즉 학술지 출판전에 논문의 형태로 연구결과를 공유하는 출판전 논문은 네이처와 사이언스 등의 거대학술지와 주요 학술분야 학회의 보수적인 학술지 편집자들의 공격을 받고 좌절되고 만다. 그리고 과학출판의 생태계 풍경을 뒤바꿔버릴 프리프린트를 학계에 널리 앨브리튼과 그린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언제나 그렇듯 지식 그 자체에만 존중을 표하는 과학계의 보수적인 특징은 과학출판과 정보공유의 중요성을 간파했던 과학자들의 이름을 노벨상 수상자처럼 역사에 새겨넣지 않았다. 보통과학자는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지곤 한다.

 

 

연구교환그룹 그 이후


실제로 학술지의 편집자들이 정보교환그룹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네이처와 사이언스 편집자들의 날선 공격과 저명 학술지 편집자들의 적대적 의견은 계속 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국립보건원(NIH)에서 정보교환그룹을 더이상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소수의 그룹만 남기고 정보교환그룹은 사라졌다.

 

하지만 회원 94%는 메모의 교환이 연구활동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고 답했다. 회원의 68%는 메모 덕분에 시간과 연구비를 아낄 수 있었다고 대답했다. 앨브리튼이 생각했던 것만큼⁠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앨브리튼과 함께 이 프로젝트를 설계했던 그린은 “과학지식 공유의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혁신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정보교환그룹이 폐기에 이르게 된 사건은 도살나 다름없다고 분노했다. 정보교환그룹의 종료에 결정타를 날린 오스트리아 빈 학술지 미팅에서 그린은 이렇게 항변했다.

 

 

정보교환그룹의 실험은 좌절됐지만 논문 출판전에 더 빠르게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물을 공유하자는 운동은 1970년대를 거치며 활발하게 논의된다. 다양한 회의를 거쳐 1969년 입자물리학 분야의 학자들이 프리프린트 서비스를 시작했다. 1년도 되지 않아 1600명이 넘는 회원이 모여들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면서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정보교환의 비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1991년 미 국립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폴 긴스파그(Paul Ginsparg)의 주도로 아카이브(arXiv)가 창설된다. 국립과학재단 (NSF)이 아카이브를 지원했고, 인터넷을 통해 강화된 프리프린트 서비스가 학술지에 전혀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빠르게 드러나면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프리프린트는 연구 출판의 일상이 됐다.


선구자들의 혁명을 기억하지 못하던 생물학자들 중에서도 프리프린트를 시작하려는 시도가 등장했다.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한 바이러스학자 해럴드 바머스는⁠ '이바이오메드(e-Biomed)'라는 프리프린트 서비스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JM) 같은 권위 있는 학술지의 편집자들은 바머스의 시도에 적대적인 입장을 표출했다. 편집자들은 NIH가 e-Biomed에 어떤 지원도 하지 못하게 로비를 시작했으며 4개월도 되지 않아 바머스의 시도는 좌절됐다.

 

하지만 바머스는 거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펍메드 센트럴(PubMed Central)이라는 서비스를 통해 게재된 논문을 무료로 공개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팻 브라운, 마이클 아이젠 등과 함께 ‘공공과학도서관(PLoS)’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프리프린트 운동이 오픈액세스 운동으로 점화된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이 앨브리튼과 그린의 아이디어를 다시 프리프린트 운동으로 부활시킨 건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13년 바이오 아카이브(bioRxiv)와 피어제이(PeerJ) 가 탄생하면서부터였다⁠.

 

이 과정을 주도한건 생화학자 론 베일과 초파리 유전학자 레슬리 보쉘이었고, 이번에는 예전처럼 큰 저항 없이 과학계 전반의 동의를 얻어냈다. 국제학술지 논문의 심사에 드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고, 오픈 액세스 운동의 확산으로 인해 프리프린트에 대한 저항감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1961년 앨브리튼과 그린이 꿈꿨던 프리프린트 프로젝트는 생물학계에 다시 자리잡게 된다. 


프리프린트의 선구자들, 에렛 앨브리튼과 데이빗 그린

 

에렛 앨프리튼 (Errett C. Albritton, MD, 1890~1984)과 데이빗 그린 (David E. Green, 1910-1983) 조지워싱턴대 및 NIH 제공
에렛 앨브리튼 (Errett C. Albritton, MD, 1890~1984)과 데이비드 그린 (David E. Green, 1910-1983) 조지워싱턴대 및 NIH 제공

데이비드 그린은 효소학과 생체운동학 분야에서 저명한 생화학자였다. 그는 지난 191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공립학교를 다녔다. 학교생활에서 큰 배움을 얻지 못하던 그는 뉴욕주립대 의대에 입학했으나 의학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1931년 여름 우즈홀에서 생물학 교수들을 돕는 연구조교를 하면서 효소학 연구에 흥미를 갖게 되고, 이후 뉴욕주립대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 프레데릭 홉킨스 교수 밑에서 박사 학위를 시작했다. 홉킨스는 192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 생화학연구소장에 올랐고 동물의 영양을 연구해 비타민과 같은 부영양소의 존재를 밝혔다. 또 근육 수축과 세포내 호흡을 규명한 업적으로 1929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20세기 중반까지도 미국의 우수한 대학원생들은 유럽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러 가는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린도 당시 생화학의 중심지라고 말할 수 있는 영국 케임브리지 생화학연구소에서 홉킨스의 지도하에 효소학 연구에 매진했다⁠. 케임브리지대에서 8년의 연구를 마치고 하버드대 의대에 자리를 잡은 그는 효소를 분리하고 세포에서 효소 기능을 알아내는 연구를 지속했다. 이후 그린은 컬럼비아대를 거쳐 위스콘신대 의대에서 연구자로 생을 마감했다.


미국과학한림원은 회원의 부고를 '회상록' 형태로 잘 정리해둔다. 보통 해당 과학자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제자나 동료가 정리하며 이곳에 정리된 한 과학자의 일생은 두고두고 과학사가들의 참고 자료가 된다. 그린의 생애도 그의 제자들에 의해 회상록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 회상록에는 그린의 정보교환그룹 활동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슬픈 일이다.


과학자의 업적을 그의 논문이나 학술상 등으로 국한하는건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예를 들어 노벨화학상과 노벨평화상을 모두 받은 라이너스 폴링의 생애를 단백질 구조 발견으로만 기술한다면, 그 저술은 반쪽자리에 불과할 것이다. 반대로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 덕분에 한국에 과학사가로만 알려진 조셉 니덤의 생애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생화학연구소의 경력을 제외한다면 그 또한 반쪽짜리 회고록이 되고 만다.


그린의 회상록을 쓴 제자는 정확히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린의 생애에서 정보교환그룹의 역사를 아예 제외해 버린 것이다. 가끔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면 과학자들의 편협함과 상아탑 근성에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과학자 모두가 노벨상 수상자가 될 수 없는 현실에서 한 과학자가 과학계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면 그 과학자는 그 실천으로 기억되어도 괜찮다⁠. 그린은 분명 홉킨스의 실험실에서 조셉 니덤과 조우했을 것이고 당시 열정적이고 과학 이외의 여러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던 과학자들이 모여 있던 그곳에서 정보교환그룹을 추진하게 된 동기가 생겨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된다. 


그린은 논문 외에도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을 통해 자신의 연구를 대중이 읽을 수 있는 글의 형태로 남겨두었다. 언젠가 파지그룹의 리더였던 막스 델브릭은 “과학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은거하기 위해 그의 작업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없으며,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서도 또한 그렇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린처럼 평생 한 분야에 천착한 과학자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하지만 현장성이 풍부한 에세이의 형태로 과학활동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과학대중화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한국의 과학 대중화도 그런 방식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선 과학계를 둘러싼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의 억압이 사라질 필요가 있다⁠. 그린이라는 과학자의 삶은, 자신의 연구와 과학자의 사회적 실천의 좋은 균형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그린은 생화학자로서의 작업을 충실히 대중에게 전달하는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엔 여전히 그의 글들이 남아 있다.
그린은 생화학자로서의 작업을 충실히 대중에게 전달하는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엔 여전히 그의 글들이 남아 있다.

 

잊혀진 과학자 에렛 앨브리튼


그린은 1964년과 1965년 두 번에 걸쳐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정보교환그룹을 홍보하는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앨브리튼을 언급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61년 초반 앨브리튼의 주도로 첫번째 정보교환그룹(IEG1)이 실험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주제는 주로 전자전달계와 산화 인산화에 대한 것입니다. 이 실험의 전제는 특정 분야 과학자들의 정보교환이 점점 비효율적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그 비효율성이 해당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정보교환그룹은 특정 과학분야의 정보교환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지난 4년동안의 경험을 통해 이제 정보교환그룹의 성과를 평가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린의 말처럼, 정보교환그룹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이를 실현시킨 사람은 NIH의 늙은 연구행정가인 앨브리튼이었다. 하지만 앨브리튼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역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린은 미국과학한림원 회원으로 생애를 마친 유능한 과학자였지만 평범했다. 앨브리튼은 1890년 12월 14일 켄터키주 메이필드에서 태어나 1984년 5월 4일 생애를 마쳤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16년 미주리대에서 학부를 마치고 이후 존스홉킨스대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17~1918년 툴레인대에서 해부학 강사로 재직하다 1921~1922년 헨리 포드 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1924~1926년까지 버팔로대 의대 생리학 교실에서 조교수 생활을 했다. 1926~1932년 미국 록펠러재단의 지원받아 태국 방콕 정부의대에서 생리학, 약학 및 생화학 교수로 근무했고 1932~1951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의대에서 생리학 분과의 행정관을 지냈다. 이후 1956년까지 같은 대학에서 생리학 정교수로 재직하다가 NIH의 연구비 담당 부서장으로 임명되어 이후 1967년까지 국가연구비와 연구관련 행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앨브리튼은 1949년에서 1954년까지는 국립연구협의회의 사무총장으로 생물데이터 핸드북 시리즈를 출판하는데 공헌했, 당시 그의 주도로 출판된 책 몇권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독특한 점은 1926년부터 6년간 방콕의 정부의대에서 교수로 근무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마히돌 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시리랄즈 병원 생화학과 홈페이지에는 앨브리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20년대 태국 정부는 병원과 의학교육을 현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마침 록펠러재단이 돈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록펠러재단은 이 과정에서 앨브리튼을 태국으로 파견하고, 그는 거기서 6년동안 태국 의과대학 교육체계를 다듬고 생리학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었다고 한다. 앨브리튼은 당시 생리학, 약학, 생화학 분야를 모두 의대 교육편제에 집어넣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생리학 실험실을 열어 의대에서 실험교육을 하는 기반을 닦았다. 그가 남긴 업적을 이어받아 시리랄즈 병원은 이후 생화학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앨브리튼이 쓴 글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의사이자 생리학자로 살아간 궤적을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는 의사로 시작해서 생리학 연구자로도 경력을 쌓았지만, 이후 방콕 등에서 의과대학 교육체계를 정비하고 국립보건원에서도 연구비행정과 연구체계관리 등의 행정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일반적인 과학자들처럼 연구논문과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남기는 대신, 연구에 도움이 되는 행정업무문서들을 만들고 핸드북을 편집하는 일에 매진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가 미국립보건원에서 연구비관리 행정업무를 수행할 때 남긴 글이 인터넷에 남아 있다. 


지난 1967년 ’생물공학과 인적 자원’를 주제로 열린 워크숍에서 그가 패널로 참석해 남긴 일종의 발제에 대한 코멘트가 남아 있다. 그는 여기서 생물공학이라는 분야를 마치 새로운 분과인것처럼 주장하는 고웬이라는 발표자에게 생리학 연구는 언제나 일부의 생물공학자들에 주도됐고 그들은 항상 연구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새로운 생물공학이라고 주장한다면 도대체 뭐가 추가되었기 때문이냐고 따졌다. 그는 생물공학이라고 말할 때 생명과학은 생물공학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게 될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9세기의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생리학자들은 항상성 개념을 만든 클로드 베르나르 이래로 되먹임 시스템을 연구해왔습니다만, 지금처럼 분자 수준의 측정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 생각엔 공학자들이 필요한 곳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생물학자들이 오랫동안 연구해온 시스템을 더 정교하게 측정함으로써 생물학이 큰 경쟁력을 갖게 만들어주는 일을 한다면, 공학 학위를 가진 학자도 과학자로 훈련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앨브리튼이 당시 하고 싶었던 말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지만 그다지 명징하게 쓰인 글은 아니다. 그는 아마도 생물공학의 중요성과 역할에 대한 워크샵에서 생리학자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보태 생물공학과 생명과학이 어떻게 조화롭게 실험실에서 만나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되먹임 시스템이라는 공학의 주제를 생리학이 오래전부터 다루고 있었다는 점을 생물공학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끌로드 베르나르를 소환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생물공학이 베르나르가 연구했던 항상성의 되먹임 시스템을 더 정밀하고 정교하게 연구함으로써 생물학에 기여하고, 공학 학위를 가진 사람도 생물학자로 훈련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베르나르는 생리학을 의학으로부터 독립시켜 과학으로 만든 인물이다. 생리학 연구자들에게 물리학과 화학처럼 엄밀함을 추구하도록 독려한 위대한 과학자다⁠. 앨브리튼은 자신의 정체성을 늘 생리학자라고 생각했고, 생리학을 근대과학으로 완성시킨 선배의 이론과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인물이다. 


앨브리튼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연구자의 정체성으로 행정업무를 통해 프리프린트라는 혁신적인 출판도구를 설계했다. 당대의 유명한 과학자들에게 왜 프리프린트가 필요한지 충분히 인식시켜 훗날 프리프린트를 향한 운동의 씨앗을 심었다. 앨브리튼과 그린의 정보교환그룹을 소개하는 논문을 쓴 매튜 코브는 글의 마지막을 앨브리튼에게 헌사했다. 그 문장으로 글을 마친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디지털 문화는 앨브리튼이 정보교환그룹의 메모들을 개개 회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하면서 꾸었던 꿈보다 훨씬 멀리 가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반세기 전에 지식을 공개적으로 회람하고 토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간파한 과학자였다. 그의 이름과 야망은 잊혀졌을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인정할 것이다⁠."

 

알브리톤에 관해 남은 사료는 거의 없다. 그가 남긴 책이 몇 권 있지만, 그 책들은 연구자로서 그의 전공을 기술한 교과서에 가깝다. 다행히 인터넷엔 그의 묘비 사진이 남아 있다
앨브리튼에 관해 남은 사료는 거의 없다. 그가 남긴 책이 몇 권 있지만, 그 책들은 연구자로서 그의 전공을 기술한 교과서에 가깝다. 다행히 인터넷엔 그의 묘비 사진이 남아 있다. 파인드어그레이브 캡쳐

※참고자료 
-Green, D. E. (1965). Information Exchange Group No. 1. Science (New York, N.Y.), 148(3677), 1543. https://doi.org/10.1126/science.148.3677.1543-b
-http://libgallery.cshl.edu/items/show/59123
-앨브리튼은 정보교환그룹을 통해 활발한 논쟁이 벌어지길 바라고 있었고, 그것이 그가 이 프로젝트를 구상한 주요 이유였다고 한다.
-osenfeld A, Wakerling RK, Addis L, Gex R, Taylor RJ. Preprints in particles and fields. SLAC-PUB- 0710; 1970. http://www.slac.stanford.edu/cgi-wrap/getdoc/slac-pub-0710.pdf
-Ginsparg P. arXiv at 20. Nature. 2011; 476:145–147. https://doi.org/10.1038/476145a PMID: 21833066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한 바이러스학자 해롤드 바머스의 자서전 《과학의 기예와 정치》 가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 https://www.ncbi.nlm.nih.gov/books/NBK190622/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07888.html
-Vosshall LB. The glacial pace of scientific publishing: why it hurts everyone and what we can do to fix it. FASEB J. 2012; 26:3589–3593. https://doi.org/10.1096/fj.12-0901ufm PMID: 22935905
-그린이 영국 캠브리지의 생화학 연구소로 박사학위를 받으러 가는 비슷한 시기 홉킨스의 제자이자 훗날 《중국의 과학과 문명》으로 과학사가로 변신하는 조셉 니덤이 같은 연구소에 있었다. 이로운넷, 김우재, 니덤과 과학자의 책-생화학자라는 정체성 참고 http://www.eroun.net/news/articleView.html?idxno=5999
-Beinert, H., Stumpf, P. K., & WAKIL, S. J. (2003). David Ezra Green. Biographical Memoirs, 84, 1-34.
12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한림원도 회상록이라는걸 작성은 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겨우 37명이다. 게다가 아는 이름은 최형섭이 고작이다. 심지어 회상록이라는 글들이 죄다 엉망친창으로 제대로 된 형식조차 갖추지 못했다. 과학자들 스스로가 과학자를 기억하지 않는데, 누가 과학자를 기억해줄까. https://kast.or.kr/kr/member/memoir.php?bbs_data=c3RhcnRQYWdlPTMwJmNvZGU9aHVpJnRhYmxlPWNzX2Jic19kYXRhJnNlYXJjaF9pdGVtPSZzZWFyY2hfb3JkZXI9||&ho=
-http://webzine.kps.or.kr/contents/data/webzine/webzine/147620933010.pdf
-고급교양으로서의 과학의 의미에 대해선 다음글을 참고할 것. 이로운넷, [김우재, 과학적 아나키즘과 고급교양으로서의 과학 http://www.eroun.net/news/articleView.html?idxno=9946
-과학대중화의 새로운 의미에 대해선 다음글을 참고할 것. 뉴스엔조이, 김우재, 창조과학을 막는 것보다 중요한 일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3187
-Green, D. E. (1964). An experiment in communication: the information exchange group. Science, 143(3604), 308-309.
-Green, D. E. (1965). Information Exchange Group No. 1. Science, 148(3677), 1543-1543.
-https://prabook.com/web/errett_cyril.albritton/1386104 여기서 그의 약력을 볼 수 있다.
-Albritton, E. C. (1953). Standard values in blood. Being the first fascicle of a handbook of biological data. Standard values in blood. Being the first fascicle of a handbook of biological data. https://www.biodiversitylibrary.org/item/28845#page/14/mode/1up
-Albritton, E. C. (1949). Experiment Design and Judgment of Evidence. the author.
-Albritton, E. C. (Ed.). (1953). Handbook of biological data. Saunders.
-https://www.si.mahidol.ac.th/department/Biochemistry/home/content/history_of_department_Eng.htm
-https://play.google.com/books/reader?id=suDnAAAAMAAJ&hl=en_CA&pg=GBS.PA1
-끌로드 베르나르의 생리학에 대한 글은 김우재의 《플라이룸》의 3장을 참고할 것.
-Cobb, M. (2017). The prehistory of biology preprints: A forgotten experiment from the 1960s. PLoS biology, 15(11).

※필자소개 
김우재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생물학과에 진학했지만 간절히 원하던 동물행동학자의 길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하고 바이러스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초파리의 행동유전학을 연구했다. 초파리 수컷의 교미시간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모두가 무시하는 이 기초연구가 인간의 시간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닌다. 과학자가 되는 새로운 방식의 플랫폼, 타운랩을 준비 중이다. 최근 초파리 유전학자가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책 《플라이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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