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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 스트레스를 받으면 열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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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 스트레스를 받으면 열나는 이유

2020.05.05 14:00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일본 큐슈대 의대 심신의학과 오카 타카카주 교수에게 어느 날 한 소녀 환자가 왔다. 중학교에 다니는 15세 소녀는 특이한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집에 있을 때는 멀쩡한데 학교에만 가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열이 치받치고 극도의 피로감에 조퇴하기가 일쑤였다. 소아과에서는 해열제를 처방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심리적인 문제라고 판단해 오카 교수를 소개한 것이다.

 

오카 교수는 소녀에게 온도계를 주며 하루 네 차례(오전 8시, 12시, 오후 4시, 8시) 겨드랑이 온도를 기록하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소녀가 갖고 온 체온 데이터로 그래프를 그리자 정말 학교에만 가면 체온이 2도나 오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소녀가 느낀 열감이 진짜라는 말이다. 오카 교수는 소녀의 증상을 ‘심인성 발열’이라고 진단했다.

 

 

심인성 발열 100여 년 전 발견

 

 

학교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심인성 발열 증상을 보이는 15세 소녀의 심부 체온(겨드랑이에서 측정) 그래프다. 학교에 머무는 동안 평소보다 체온이 2도나 높다. ′온도′ 제공
학교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심인성 발열 증상을 보이는 15세 소녀의 심부 체온(겨드랑이에서 측정) 그래프다. 학교에 머무는 동안 평소보다 체온이 2도나 높다. '온도' 제공

심인성 발열(psychogenic fever)이란 심적 요인인 스트레스가 체온을 올리는 현상으로 1914년 처음 보고됐고 1930년 이런 이름을 얻었다. 과거 시집살이가 심하던 시절 며느리들이 만성 스트레스로 마음고생을 하며 얻은 ‘화병(火病)’도 심인성 발열이 주요 증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녀는 왜 학교에만 가면 열이 났을까.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녀는 온순하고 차분한 모범생 스타일로 등교를 거부하는 불량소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리 상담을 한 결과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소녀는 학교생활을 좋아했지만 신체장애가 있는 친구가 같은 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너무 괴로웠던 것이다. 오카 교수는 부모에게 아이의 전학을 권유했고 학교를 옮긴 뒤에는 등교 발열 증세가 사라졌다.

 

심인성 발열은 사람뿐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은 포유류와 조류에서도 관찰된다. 진화적으로 보존된 현상으로, ‘투쟁 도피 반응’의 하나로 설명된다. 짝짓기 철 라이벌이 나타났을 때나 포식자가 다가올 때 몸은 일련의 생리적 반응을 통해 순간적으로 최대한의 힘을 낼 수 있게 대비한다. 몸속 갈색지방을 태워 체온을 올리는 것도 대사 반응 속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정온동물에서 체내 발열은 주위로 빼앗기는 열을 보충해 체온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병원체 감염이나 포식자 등장 등 위기 상황에서는 체온을 올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별도의 발열 반응을 일으킨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감염(염증반응)과 스트레스(투쟁 도피 반응)가 발열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이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염증반응으로 인한 발열을 내리는 해열제가 심인성 발열에는 안 듣는 이유다. 전자의 메커니즘은 잘 알려져 있지만 후자는 아직 잘 모르는 상태였다.

 

심인성 발열 뇌 회로 규명

 

 

최근 일본 나고야대 연구자들은 쥐를 대상으로 스트레스로 인한 심인성 발열의 배후에 있는 뇌 회로를 밝히는 데 성공했다. PVT/MD 같은 스트레스 센서가 전두엽의 DP/DTT로 스트레스 정보를 보내면 시상하부의 DHH를 거쳐 뇌간의 rMR로 전달돼 몸에 있는 갈색지방을 태워 열을 낸다. ′네이처′ 제공
최근 일본 나고야대 연구자들은 쥐를 대상으로 스트레스로 인한 심인성 발열의 배후에 있는 뇌 회로를 밝히는 데 성공했다. PVT/MD 같은 스트레스 센서가 전두엽의 DP/DTT로 스트레스 정보를 보내면 시상하부의 DHH를 거쳐 뇌간의 rMR로 전달돼 몸에 있는 갈색지방을 태워 열을 낸다. '네이처' 제공

학술지 ‘사이언스’ 3월 6일자에는 스트레스가 발열로 이어지게 하는 뇌의 회로를 밝힌 연구결과가 실렸다. 일본 나고야대 의대 통합생리학과 나카무라 카주히로 교수팀은 무려 20년 가까운 연구 끝에 ‘DP/DTT-DMH-rMR-갈색지방 회로’라고 명명한 심인성 발열 경로를 규명했다. 동물실험(쥐) 결과이지만 포유류의 뇌 구조 대부분이 진화적으로 보존돼 있기 때문에 사람에서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회로의 구성요소가 발견된 순서는 신경 신호 진행 방향의 역순이다. 지난 2004년 rMR-갈색지방 경로가, 2014년 DMH-rMR 경로가, 그리고 이번에 DP/DTT-DMH 경로가 발견된 것이다. 이는 신경 신호가 진행하는 반대 방향으로 경로를 추적해 관련 부위를 찾는 연구방법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회로 순서대로 설명한다.

 

동물은 살아가며 주위에서 다양한 물리적 심리적 스트레스 요인과 맞부딪치는데 뇌의 시상에 있는 실방핵(PVT)이 ‘스트레스 센서’라는 사실이 2015년 밝혀졌다. 한편 중앙내측시상핵(MD)라고 불리는 영역은 규칙 학습과 추상화, 평가, 상상력(사람) 같은 복합적인 인지 기능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생각이 많아 자초한 ‘고차원적 스트레스’의 출처인 셈이다. 

 

나고야대 연구자들은 실방핵과 중앙내측시상핵의 뉴런이 뇌의 전두엽에 있는 배측각피질(DP)과 배측덮개띠(DTT)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심인성 발열 회로를 완성한 뒤 DP/DTT로 들어가는 신경을 역추적해 밝혔다). DP/DTT 영역은 지금까지 거의 연구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PVT와 MD 등 모든 스트레스 센서가 감지한 정보가 모이는 허브로 밝혀진 것이다.

 

DP/DTT는 스트레스 정보를 배내측뇌하수체(DMH)로 보내고(이번에 규명) DMH는 이를 뇌간에 있는 문측수질솔기(rMR)로 중계한다(2014년 규명). rMR의 뉴런은 몸에 있는 갈색지방 조직에 연결돼 있어 신호를 받으면 발열 반응을 일으킨다(2004년 규명). 아울러 심박수도 늘리고 혈압도 올린다. 투쟁 도피 반응을 준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이 관여한다.

 

스트레스가 투쟁 도피 반응을 준비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오래전에 알려졌음에도 뇌의 관련 회로는 규명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번에 그 전모가 밝혀졌다. 특히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았고 역할도 몰랐던 전두엽의 배측각피질(DP)과 배측덮개띠(DTT)가 알고 보니 스트레스 회로의 허브였다는 사실은 뜻밖의 성과다.

 

회로 차단하자 겁 없어져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사진)는 19세기에 이미 감정이 몸의 생리 반응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생리 반응의 해석이 감정임을 간파했다. 심인성 발열 회로가 차단돼 생리 반응을 일으키지 않게 된 쥐는 큰 쥐를 봐도 공포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위키피디아 제공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사진)는 19세기에 이미 감정이 몸의 생리 반응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생리 반응의 해석이 감정임을 간파했다. 심인성 발열 회로가 차단돼 생리 반응을 일으키지 않게 된 쥐는 큰 쥐를 봐도 공포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위키피디아 제공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19세기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감정에 관한 놀라운 통찰을 제시했다. 감정이 몸의 생리적 반응을 촉발한다는 기존 이론에 맞서 제임스는 몸의 생리적 반응에 대한 해석이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곰을 보고 겁이 나 도망치는 게 아니라 곰을 보고 도망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얼핏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긍이 간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도 있듯이 위기 상황에 마주쳤을 때 몸의 본능적인 생리적 반응을 통제할 수 있다면 감정(공포)에 압도돼 혼비백산하는 대신 침착하게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번에 발견한 스트레스 회로로 제임스의 이론을 검증해보기로 했다. 스트레스 정보의 허브인 DP/DTT에서 중계지인 DMH로 가는 신경을 억제해 발열과 심박수 증가 같은 생리적 반응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면 정말 스트레스 관련 감정이 유발되지 않는가를 본 것이다. 

 

연구자들은 실험 대상인 쥐에게 ‘사회적 실패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했다. 쥐의 우리에 덩치가 훨씬 큰 다른 품종의 수컷 쥐를 넣고 한 시간을 같이 두면 쥐는 침입자에게 쫓기며 어쩔 줄을 모른다. 그 뒤 우리 가운데 철망으로 칸막이를 친 뒤 그 안에 큰 쥐를 넣고 밖에 작은 쥐를 두면 앞서 패배감을 맛본 작은 쥐는 최대한 멀리 머무르며 잘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꼬리의 체온이 꽤 떨어진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부 체온을 올라가지만 말단은 정맥이 수축해 체온이 내려간다.

 

그런데 유전적 처리를 해 일시적으로 DP/DTT-DMH 경로를 차단하자 작은 쥐가 겁이 없어져 큰 쥐가 안에 있는 칸막이 근처까지 주저하지 않고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꼬리 온도도 칸막이에 큰 쥐가 없을 때와 비교해 차이가 없었다. 스트레스 센서(PVT/MD)가 스트레스 요인(큰 쥐의 존재)를 감지해 DP/DTT로 정보를 보내도 이게 DMH로 중계가 되지 않으면서 교감신경이 관여하는 몸의 생리 반응(발열, 심박수 증가, 혈압 상승)이 뒤따르지 않자 별 게 아니라고 판단해 두려움이 촉발되지 않은 것이다. 감정은 생리 반응의 해석이라는 제임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과다. 

 

인류가 문명사회를 이루면서 스트레스 대다수가 투쟁 도피 반응이 필요 없는 심리적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우리 몸은 여전히 투쟁 도피 반응을 대비해 생리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게 문제다. 물론 인류는 이에 대처하는 방법도 모색했다.

 

예를 들어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거나 면접을 하기 전에 우리는 긴장을 낮추기 위해 심호흡을 한다.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마음챙김 명상에 기반한 스트레스 감소(MBSR)’라는 프로그램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해 ‘DP/DTT-DMH-rMR-갈색지방 회로’를 약화시켜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 감정의 세기를 줄이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심리학에서 생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윌리엄 제임스는 ‘한 권으로 읽는 심리학의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심인성 발열을 일으키는 뇌 회로 관련 실험을 보니 그의 선견지명이 더욱 돋보인다.


“달아나면 공포가 더 강화되고, 슬픔이나 화의 징후에 굴복하면 그 감정이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중략) 만약에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적 성향을 극복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배양하고자 하는, 반대되는 성향을 외적으로 표현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필자소개

강석기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8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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