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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실험실 장비 보며 '청계천' 떠올리는 과학자들은 이제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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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실험실 장비 보며 '청계천' 떠올리는 과학자들은 이제 없나

2020.05.19 21:23
 

“우리의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초대 소장 연구실은 병원에서 내준 쪽방이었습니다. 연구 장비는 청계천 만물상에서 끌어모은 군수품 폐자재를 재조립한 것들이었습니다. 초기 KIST의 연구원들은 하숙비를 내기도 힘겨웠습니다.”

 

이제는 청계천과 세운상가가 속한 서울 종로구를 지역구로 갖게 된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2018년 과학정보통신의 날 기념식 축사에서 한 말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 과학기술은 아직 미약할지도 모르겠다. KIST는 홍릉의 넓은 땅으로 거처를 옮겼고, 처우에 대해선 여러 말이 있겠지만 적어도 하숙비를 내기 힘든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과학계의 연구 장비는 여전히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 도심 제조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계천에는 제품을 만들 때 필요한 각 공정 분야에 특화된 여러 제조업체와 재료상, 공구상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아이디어를 현실화시켜주는 산업 생태계가 존재한다. 새로운 지식을 찾기 위한 실험을 위해 이제껏 세상에 없던 장비를 만들어야 하는 연구원들은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연구하는 것과 장비를 제조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일은 다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계공학과 전공의 한 박사후연구원은 “청계천은 아이디어와 대략적인 디자인만 들고 가도 모두 구체화해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청계천 산업 생태계는 빠르게 발전해 온 한국 과학을 묵묵히 뒷받침해왔다. 한국 핵융합연구의 효시로 평가받는 토카막 핵융합 실험장치 ‘SNUT-79’를 제작한 서울대 연구팀은 1970~1980년대 청계천 일대에서 부품을 뒤져가며 장비를 개발했다고 한다. 지금은 과학계 원로가 된 과학자들은 연구 장비도 돈도 모두 부족하던 시절 연구를 위해서 청계천에서 다리품을 팔아 왔다고 고백하곤 했다.

 

과학계의 발견을 묵묵히 뒷받침해 왔던 청계천 일대는 최근 들어 생태계가 무너지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8년엔 재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제조업체와 공구상들이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 청계천에선 도심 제조업 생태계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낙후된 지역을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맞선다. 하지만 정작 과학계 어디에서도 청계천 재개발과 관련해 목소리를 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2013년 개인이 제작한 인공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려 화제가 됐던 송호준 작가는 "청계천 장인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으면 인공위성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15일 청계천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대학들이 연구 장비를 이곳에서 만든다는데 정작 이곳 상황에 대해선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며 “이곳이 없어지면 대학에서 실험을 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 과학의 연구개발(R&D) 활동을 음지에서 묵묵히 뒷받침해온 도심 제조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과학계는 언제까지 방관자로서 수수방관할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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