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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 대사와 후성유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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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 대사와 후성유전학

2020.11.17 14:00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유전자를 소프트웨어로 보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가 분화 과정에서 유전자를 조절하는 후성유전적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전자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생화학적) 물체로 간주하는 편이 더 낫다.

-리처드 프랜시스, ‘쉽게 쓴 후성유전학’에서

 

호기심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거의 해마다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타는 걸로 봐서 재미는 덜하더라도 예술성은 높은 영화겠거니 했는데 기대와 너무 달랐다. 그 영화만 그런가 싶어 그 뒤에도 한두 편 더 봤는데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마 서구의 평론가들은 그런 접근법을 높이 평가하나 보다. 홍 감독 영화의 관객 수가 수만 명 내외인 걸 보면 필자가 유독 까다롭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홍 감독 영화의 제목만은 꽤 인상적이다. 첫 작품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오! 수정’ ‘생활의 발견’ 등 뭔가 있어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최고의 작명은 2015년 개봉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가 아닐까. 인간 심리의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라서인지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패러디되고 있다. 특히 정치 쪽에서 언급이 잦은데, 정권교체로 여야가 바뀌면서 비슷한 사안을 두고 각자 입장이 180도 바뀐 채 여전히 충돌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필자 생각에 과학 분야 역시 이 문구가 적절하게 쓰일 것 같다. 다만 단어를 재배치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써야겠지만. 과거에는 맞다고 생각한 가설이나 이론이 세월의 검증을 견디지 못하고 폐기되거나 수정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인간 게놈 해독도 그런 예가 아닐까. 20년 전 두 그룹이 해독한 인간게놈 초안이 발표됐을 때만 해도(논문은 이듬해 초 각각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실렸다) 게놈 정보라는 청사진을 들여다보면 생명의 미스터리가 풀리고 질병을 정복하는 일은 시간문제라고 여겨졌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낙관론으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 뒤 게놈 해독 비용이 급감하고 여러 사람의 게놈이 해독되면서 인체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됐고 의학에서도 적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단순히 DNA 염기서열 정보만으로 우리가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게 오늘날의 시각이다. 게놈 해독을 통한 유전자 정보도 중요하지만, 그 유전자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발현돼 세포와 조직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아는 것이 그 이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DNA 염기서열만 들여다봐서는 그 답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지난 20년 사이 눈부시게 성장한 분야가 바로 후성유전학이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DNA 염기나 히스톤 단백질(DNA 가닥을 감는 실패)에 분자 표지를 남겨 유전자 발현을 조절해 생명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면 가운데 하나는 이런 표지가 세포분열 뒤에도 남아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세대를 통해 유전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존 유전학에 후성유전학에 대한 이해가 더해져야 생명현상과 암을 비롯한 많은 질병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사 정보 부호화

 

나이가 들수록 신체 조직의 세포에서 DNA 메틸화 비율이 낮아진다. 2013년 LA캘리포니아대 스티브 호바스 교수는 인체 여러 조직의 DNA 메틸화 정도를 분석해 생물적 나이를 산출하는 후성유전적 시계 개념을 제시했다. 나이보다 꽤 젊어 보이는 사람은 호바스 시계가 동년배보다 느리게 갈 가능성이 높다. 스티브 호바스 제공
나이가 들수록 신체 조직의 세포에서 DNA 메틸화 비율이 낮아진다. 2013년 LA캘리포니아대 스티브 호바스 교수는 인체 여러 조직의 DNA 메틸화 정도를 분석해 생물적 나이를 산출하는 후성유전적 시계 개념을 제시했다. 나이보다 꽤 젊어 보이는 사람은 호바스 시계가 동년배보다 느리게 갈 가능성이 높다. 스티브 호바스 제공

후성유전적 표지로 DNA 메틸화와 히스톤 메틸화 및 아세틸화가 알려져 있다. DNA 메틸화는 바로 뒤에 구아닌이 있는 시토신(CpG로 나타냄)에 메틸기(-CH3)가 붙는 과정으로 유전자 발현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흥미롭게도 나이가 들수록 게놈에서 전반적으로 DNA 메틸화가 점점 줄어든다. 그 결과 발현되지 않아야 할 유전자나 전이인자(정크 DNA)가 하나둘 고삐가 풀리며 잡음이 생기고 세포 노화로 이어진다. 지난 2013년 미국 LA캘리포니아대 스티브 호바스 교수는 인체 여러 조직의 DNA 메틸화 정도를 분석해 생물적 나이를 산출하는 후성유전적 시계(일명 ‘호바스 시계’로 불림)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거의 모든 암에서 DNA 메틸화 정도가 줄어든 상태라는 것이다. 세포분열을 촉진하는 유전자에 유독 이런 변화가 두드러지면 세포분열이 무분별하게 일어나는 암세포가 된다는 말이다. 암이 단순히 유전자 돌연변이의 결과라는 설명만으로는 암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이유다. DNA 메틸화 관점에서 보면 나이가 들수록 암에 걸릴 위험성이 높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편 DNA 가닥을 감는 실패인 히스톤 단백질의 특정한 위치에 있는 라이신(아미노산의 하나)에 메틸기나 아세틸기(-COCH3)가 붙어도 유전자 발현이 영향을 받는다. 메틸기는 붙는 라이신 위치에 따라 유전자 발현을 촉진하거나 억제하고, 아세틸기는 유전자 발현을 촉진한다. 이런 분자 표지가 히스톤 단백질 구조를 변화시켜 DNA가 촘촘하게 감기면 유전자 발현이 억제되고 느슨하게 풀리면 촉진된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DNA나 히스톤에 후성유전적 표지를 붙이거나 떼는 과정이 어떻게 일어날까. 지난 20년 동안 이 질문에 답하는 연구결과들이 쌓이면서 관련 효소들(생체 촉매)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리고 최근 수년 사이 세포 대사가 후성유전적 과정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학술지 ‘네이처 대사’ 11월호에는 대사와 후성유전학의 관계에 대한 최근 연구결과를 정리한 미국 하버드대 라울 모스토슬라브스키 교수와 동료들의 리뷰논문이 실렸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먹는 음식 같은 영양 정보가 대사물질을 통해 후성유전체에 부호화돼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가 우리 몸의 변화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중독과 관련된 연구결과 두 가지를 소개한다.

 

술을 마실 때 뇌에서 일어나는 일

 

 

술을 마시면 에탄올이 간에서 대사돼 아세트산(acetate)로 바뀐다. 지난해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이 아세트산이 혈관을 따라 이동해 뇌의 해마에 있는 뉴런으로 들어가 아세틸-CoA로 바뀐 뒤 효소(HAT)의 작용으로 히스톤(보라색 공)에 달라붙는다(녹색 작은 공). 그 결과 DNA 가닥이 느슨해져 기억과 관련된 유전자 발현이 촉진된다. 수 시간 뒤 다른 효소(HDAC)의 작용으로 아세틸기가 떨어지며 DNA 가닥이 원래대로 감겨 유전자 발현이 억제된다. 네이처 제공
술을 마시면 에탄올이 간에서 대사돼 아세트산(acetate)로 바뀐다. 지난해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이 아세트산이 혈관을 따라 이동해 뇌의 해마에 있는 뉴런으로 들어가 아세틸-CoA로 바뀐 뒤 효소(HAT)의 작용으로 히스톤(보라색 공)에 달라붙는다(녹색 작은 공). 그 결과 DNA 가닥이 느슨해져 기억과 관련된 유전자 발현이 촉진된다. 수 시간 뒤 다른 효소(HDAC)의 작용으로 아세틸기가 떨어지며 DNA 가닥이 원래대로 감겨 유전자 발현이 억제된다. 네이처 제공

지난해 학술지 ‘네이처’에는 음주가 후성유전적 과정을 통해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술에 들어있는 알코올(에탄올)은 간에서 두 단계를 거쳐 대사된다. 먼저 아세트알데히드로 바뀐 뒤 아세트산으로 바뀐다. 두 번째 반응을 촉매하는 효소가 부실한 사람은 독성이 강한 아세트알데히드가 몸에 오래 남아 숙취 등 여러 부작용을 경험한다. 이런 차이는 유전자 변이로 설명이 된다. 

 

그런데 에탄올의 최종 대사물인 아세트산도 후성유전적 과정을 통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기억에 관여하는 유전자 발현을 늘려 술자리에 대한 기억을 강화해 비슷한 상황에 놓일 때 술 생각이 간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가르시아 버거 교수팀은 쥐에게 방사성 표지가 된 에탄올을 투여했을 때(사람으로 치면 폭음 수준으로) 뇌의 해마에서 방사능이 검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분석결과 간에서 대사된 아세트산이 혈관을 타고 해마의 신경세포(뉴런)에 들어가 ACSS2라는 효소의 작용으로 아세틸-CoA로 바뀐 뒤 아세틸화를 통해 히스톤에 달라붙는 것으로 밝혀졌다. 술(에탄올)이 대사돼 해마 뉴런에서 히스톤 아세틸화의 재료로 쓰였다는 말이다. 그 결과 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활성화됐다. 이런 변화가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연구자들은 우리를 반으로 나눠 한쪽에서는 에탄올을, 다른 쪽에서는 소금물을 투여하는 실험을 8일에 걸쳐 반복했다. 그 뒤 쥐를 우리에 넣자 녀석들은 시간 대부분을 과거 에탄올을 투여받은 공간에서 머물렀다(음주의 추억!). 참고로 알코올 의존증 치료를 받은 사람이 과거 술을 마시던 환경을 접하면 음주 욕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쥐 해마 뉴런의 히스톤 아세틸화 정도는 에탄올 투여 후 30분이 지났을 때가 정점이었고 4시간 뒤에는 원래 수준으로 떨어졌다. 사람은 보통 한두 시간 이상 술자리를 가지므로 이때 아세틸화가 많이 되고 따라서 당시 상황이 기억에 새겨질 것이다.

 

도파민도 히스톤에 달라붙어

 

지난 4월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별사탕 모양)이 VTA 도파민 뉴런 히스톤의 글루타민(Q)에 달라붙어(효소(TGM2)의 작용으로) 후성유전적 작용으로 코카인 중독 행동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밝힌 논문이 실렸다. 오른쪽 그림은 도파민 분자(위)가 글루타민(아래)과 결합한 구조를 보여준다. 사이언스 제공
지난 4월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별사탕 모양)이 VTA 도파민 뉴런 히스톤의 글루타민(Q)에 달라붙어(효소(TGM2)의 작용으로) 후성유전적 작용으로 코카인 중독 행동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밝힌 논문이 실렸다. 오른쪽 그림은 도파민 분자(위)가 글루타민(아래)과 결합한 구조를 보여준다. 사이언스 제공

지난 4월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약물 중독과 관련된 뜻밖의 후성유전적 메커니즘이 밝힌 논문이 실렸다. 중독에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생산하고 분비하는 중뇌 복측피개영역(VTA)의 도파민 뉴런이 관여한다. 즉 약물 투여나 도박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도파민 뉴런이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돼 결국 보상회로 변형으로 이어져 중독 증상이 생긴다. 중독 행위를 하면 도파민 수치가 치솟아 쾌감을 느끼고 행위를 끊으면 도파민이 고갈돼 금단 현상이 생긴다.

 

미국 프리드먼뇌연구소 이언 메이즈 교수팀은 도파민이 신경전달물질로 기능할 뿐 아니라 VTA 뉴런의 핵에서 히스톤의 글루타민(아미노산의 하나)에 달라붙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코카인 같은 약물을 반복적으로 투여했을 때 VTA 뉴런의 히스톤이 도파민화되는 정도도 달라지지 않을까. 만일 뉴런의 도파민화가 후성유전적 기능을 한다면 그 정도에 따라 유전자 발현이 영향을 받고 그 결과 중독 증상이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연구자들은 만성 코카인 중독인 사망자의 뇌를 부검해 VTA 뉴런 히스톤의 도파민화를 조사했다. 그 결과 대조군인 비중독자에 비해 도파민화 정도가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을 대상으로는 연구에 한계가 있어 연구자들은 쥐에게 코카인을 열흘 동안 자가투여하게 한 뒤 당일, 하루 뒤, 한 달 뒤의 VTA 뉴런의 히스톤 도파민화 정도를 조사했다. 

 

그 결과 당일과 하루 뒤는 대조군(소금물 투여)에 비해 도파민화가 낮았고(사람 결과와 같다) 한 달 뒤에는 더 높았다. 중독이 되면 약물을 끊었을 때 VTA 뉴런 히스톤의 도파민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그 결과는 유전자 발현 이상으로 이어져 약물을 갈구하는 중독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일 VTA 뉴런에서 히스톤의 도파민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연구자들은 도파민이 달라붙는 글루타민 자리를 알라닌으로 바꾼 변이 히스톤 단백질을 만든 뒤 코카인 자가투여 실험을 했다. 그 결과 투여가 끝난 뒤에도 쥐는 약물을 갈구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열흘 동안 투여했음에도 코카인 중독으로 이끄는 보상회로의 변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편 도파민과 구조가 비슷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도 히스톤에 달라붙는다.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발효의 산물인 젖산 역시 히스톤에 달라붙어 유전자 발현 패턴을 바꾼다는 사실이 지난해 밝혀졌다. 히스톤에 달라붙어 후성유전적 영향을 미치는 대사물질의 목록은 당분간 늘어나지 않을까.

 

전성설과 후성설의 힘겨루기

 

신경생물학자에서 작가로 변신한 리처드 프랜시스는 2011년 펴낸 책 ‘쉽게 쓴 후성유전학’에서 후생유전학의 역사를 잠깐 소개했다. 저자에 따르면 그 기원은 발생에 대한 전성설(preformationism)에 반기를 든 후성설(epigenesis)이다. 

 

전성설은 수정란에 발생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 들어있다는 입장으로, 19세기 독일의 발생학자 빌헬름 루가 대표적 인물이다. 이에 따르면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할 때마다 정보도 나뉘어 각각의 명령에 따라 세포 분화가 이뤄지고 성체로 완성된다. 직관적으로 그럴듯한 설명이다.

 

반면 후성설은 세포분열을 하더라도 각 세포에서 전체 정보는 유지되고 배아에서 놓인 위치에 따른 상호작용의 결과로 세포 특성이 결정된다는 입장으로 역시 독일의 발생학자인 한스 드리슈가 대표였다. 드리슈는 성게 수정란이 세 차례 분열할 때, 다시 말해 여덟 개의 세포로 이뤄진 배아까지는 세포를 갈랐을 때 각각 정상적인 성게로 발생함을 실험으로 보였다. 수정란이 분열해도 정보는 각 세포에 온전히 보존돼 있고 8개 세포 배아까지는 각각이 모든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지금 용어로는 만능줄기세포). 

 

19세기 독일의 발생학자 한스 드리슈는 기발한 성게 배아 실험으로 후성설을 입증했다. 그러나 그 뒤 발생 과정의 복잡함에 압도돼 생기론이라는 비과학적 설명으로 물러섰고 나중에는 철학자가 됐다. 드리슈가 끝까지 과학적 추구를 견지했다면 오늘날 ‘후생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리지 않을까. 위키피디아 제공
19세기 독일의 발생학자 한스 드리슈는 기발한 성게 배아 실험으로 후성설을 입증했다. 그러나 그 뒤 발생 과정의 복잡함에 압도돼 생기론이라는 비과학적 설명으로 물러섰고 나중에는 철학자가 됐다. 드리슈가 끝까지 과학적 추구를 견지했다면 오늘날 ‘후생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리지 않을까. 위키피디아 제공

또 분화 중인 배아에서 특정 조직으로 자랄 위치의 세포를 떼어 다른 조직으로 자랄 위치에 끼워 넣어도 정상적인 개체로 발생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자리를 옮긴 세포가 새로운 환경에 맞춰 분화의 방향을 틀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드리슈는 세포핵 밖의 물질들이 핵(유전 물질)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핵이 다시 세포 물질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했다”며 “이는 세포 환경이 유전자 조절에 관여한다는 현대적 개념을 예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드리슈는 발생의 복잡성에 압도돼 결국 자연주의(과학)적 설명을 포기하고 영혼과 비슷한 모종의 원리인 ‘생기론’으로 후퇴했고 나중에는 철학으로 전향했다. 

 

저자는 인간 게놈 정보를 청사진으로 바라보는 유전학의 관점은 현대판 전성설로 다시 한번 후성유전학에 패배할 운명이라고 보고 있다. 게놈 정보는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필요조건일 뿐이고 유전자 바깥에 더 많은 정보가 존재하며 매 순간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것이다.

 

기존 유전학도 복잡한데(인간 게놈은 30억 염기쌍이다!) 여기에 더 복잡하고 생소한 개념이 난무하는 후성유전학까지 더해지니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길이 점점 더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게 바로 오늘날 생명과학이 제대로 가고 있다는 뜻 아닐까. 하나의 질문에 답을 얻으면 새로운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르게 하는 연구가 좋은 연구라고 하지 않던가. 문득 웜홀과 블랙홀의 작명자인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의 말이 떠오른다.

 

“지식이라는 섬이 넓어질수록 무지라는 해변이 길어진다.” 

 


 

 

※필자소개

강석기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9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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