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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가습기연구소와 중이염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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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5월 23일 11:02 프린트하기

포스텍(포항공대)이 개교한 지 5년 남짓 지난 1990년대 초반 포항 주민들 사이에서 뜬금없이 포항공대에 가습기연구소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주민들은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가정용 가습기가 보급되기 전이라 가습기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단지 가습기연구소치고는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점에서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을 뿐이다.

당시 포항방사광가속기연구소는 주민에게 ‘가습기연구소’로 인식됐다. 가속기를 ‘가습기’로 발음하는 경상도 사투리 때문이다. 연구소로 배달되는 우편물 주소가 ‘가습기연구소’로 쓰인 경우도 많았다. 가습기가 아니라 가속기라는 걸 알아차린 택시운전사들은 가속기연구소로 가는 승객에게 도대체 어떤 자동차에 들어가는 가속기(액셀러레이터)인지 묻곤 했다.

망치로 돌을 때리면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돌 부스러기가 튀어나온다. 그 부스러기를 분석하면 돌이 어떤 성분과 어떤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가속기는 매우 작은 입자로 특정 목표물을 때리면 튀어나오는 부스러기의 성분과 구조를 파악하는 장치다. 망치의 크기는 무지무지 작지만 때리는 힘은 엄청나게 크다. 망치를 빛의 속도로 가속하여 때리기 때문이다. 망치가 전자면 방사광가속기, 양성자면 양성자가속기, 중이온이면 중이온가속기다.

미래창조과학부가 대전에 설치하는 중이온가속기 사업이 최근 중간평가에서 ‘성공적 수행이 매우 회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술 분야에서 역량이 부족하고 실적도 미흡할 뿐 아니라 사업관리 역량도 모자란다는 것. 종합등급은 ‘보통’이지만 세계 최고 및 최초를 지향하는 1조 원대의 초대형 과학프로젝트로서 사실상 ‘미흡’이라는 평가다.

그 원인을 두고 ‘정부의 기초과학 육성 의지가 부족하다’ ‘입지 선정과 단장 선임에서 정치가 개입됐다’ ‘연구비 배분에 대한 불만으로 기초과학계가 분열됐다’ ‘미래부를 중심으로 하는 ‘관피아’들이 말아먹었다’ 등등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중이온가속기를 세월호에 비유하면서 선장(기초과학연구원 원장)의 부재, 선박직(기초과학연구원 사무처) 직원의 무능, 해경과 해양수산부(미래부)의 관리 부실을 싸잡아 지적하기도 한다.

세월호의 트라우마가 벌써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걸까. 그것도 가장 흔들리지 않고 굳건해야 할 기초과학의 영역에서. 문제의 발단은 중이온가속기를 만드는 물리학자들의 주도권 다툼에 있다. 핵물리학자와 입자물리학자, 또는 설계자 그룹과 사용자 그룹 간의 논쟁이 분쟁으로 확산되면서 목소리만 큰 호사가(好事家)들에게 멋진 불쏘시개를 제공했다. 미래부의 미숙한 시스템이 제때 불길을 잡지 못하면서 불은 과학계를 넘어 인화성 강한 정치계로 번질 태세다.

대한민국의 물리학자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것을 받아놓고 감사하기는커녕 왜 온 국민을 걱정하게 만드는가. 과학을, 그것도 기초과학을 정치로 오염시킨 죄다. 과학계의 원로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소통의 간극을 메우는 원로는 없고 빈자리만 탐내는 노인네만 보인다. 돌아가신 박태준 포스코 회장과 김호길 포항공대 학장이 그리워지는 시점이다.

1990년 초반 포항 주민들은 알지도 못하는 가습기연구소(가속기연구소)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자긍심을 가졌지만 2020년대 초반 대전 주민들은 괴상한 중이염연구소(중이온연구소)가 완공됐다는 소식에 질겁을 할지도 모른다. 중이염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귀가 더러운 미생물(정치)에 감염되어 소통에 장애(난청)를 유발하는 질환이다.


huhh2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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