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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를 훔친 악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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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를 훔친 악동들

2015.02.15 18:00
왼쪽부터 보어, 드브로이, 슈뢰딩거,아인슈타인,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디랙, 러더퍼드. - 과학동아(일러스트 김정훈) 제공
왼쪽부터 보어, 드브로이, 슈뢰딩거,아인슈타인,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디랙, 러더퍼드 - 과학동아(일러스트 김정훈) 제공

 

양자역학! 알면 알수록 참 난해해서 ‘도대체 누가 만든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더 난감한 건 양자역학을 만든 사람이 따로 없다는 것. 천재 열 몇 명이 수십 년에 걸쳐서 다 같이 완성했다. 양자역학 탄생에는 작당들이 있었을 뿐 히어로가 딱히 없었다.

 

“모든 항들이 일사분란하게 에너지 원리를 따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머릿속에 그려왔던 양자역학이 수학적으로 타당하다는 확신이 들면서 깊은 경외감을 느꼈다. 원자의 내부에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질서가 존재했던 것이다. 온갖 수학으로 장식된 경이로운 자연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_하이젠베르크

 

● 세계대전과 함께한 물리 혁명

 

토고의 아인슈타인 동전 - 위키미디어 제공
토고의 아인슈타인 동전 - 위키미디어 제공

물리학도 결국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천재들도 인간이었다. 인간이기에 실수를 하고, 충분한 근거도 없이 자기 생각을 주장하거나, 사랑에 실패하기도, 정치에 휘말려 비극적인 삶을 살기도 했다. 양자역학이 탄생하던 20세기 초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 유럽을 휩쓸던 시기였다. 양자역학의 주인공들 역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살았던 인간들이다.

 

1925년 6월 7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년 노벨물리학상)는 꽃가루 때문에 알레르기성 비염에 시달리다가 북해의 섬 헬골란트로 휴양을 떠났다. 이곳에서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이라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전자의 궤도를 포기하고 오직 관측 가능한 물리량만으로 양자역학을 기술해야한다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필자도 봄마다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데, 한 번도 이런 아이디어가 떠오른 적은 없다). 당시 하이젠베르크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하이젠베르크의 10대는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독일의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전쟁을 일으킨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그를 혁명적 아이디어로 이끌었던 걸까.
 

사이 좋은 하이젠베르크(왼쪽)와 보어 - 위키미디어 제공
사이 좋은 하이젠베르크(왼쪽)와 보어 - 위키미디어 제공

시작은 그보다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2년 6월,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을 방문한 닐스 보어(1922년 노벨물리학상)와 만났다. 이 만남은 하이젠베르크에게 큰 영향을 줬다. 당시 보어는 정상상태와 양자도약이라는 괴상한 개념을 제안해 유명해진 터였다(훗날 이 개념들은 양자역학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된다). 하이젠베르크는 헬골란트로 떠나기 직전인 1925년 5월까지 보어와 함께 코펜하겐에 머물렀다. 여기서 원자를 가상적인 진동자들의 조합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접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로부터 행렬역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단서를 얻는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끈끈한 관계는 이후로도 지속되다가 상보성과 불확정성 원리라는 양자역학의 심장까지 이른다.
 

보어는 철학자의 분위기가 강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보어의 강연은 매우 애매모호한 것으로 유명했다. 1927년 9월 볼타 사망 100주년 기념학회에서 보어는 상보성과 불확정성 원리를 처음 소개했다. 그때 좌중에 앉아 있던 유진 위그너(1963년 노벨물리학상)는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체 무슨 소린지 한마디도 모르겠네. 이 강연을 듣고 양자역학에 대한 관점을 바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걸?” 이런 모호함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알버트 아인슈타인(1921년 노벨물리학상)도 보어가 주장하는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양자역학을 여러모로 비판하던 아인슈타인의 든든한 우군은 에르빈 슈뢰딩거(1933년 노벨물리학상)였다.
 

● 카사노바 슈뢰딩거와 아버지 ‘백’을 덕 본 드브로이
 

오스트리아의 슈뢰딩거 지폐 - 위키미디어 제공
오스트리아의 슈뢰딩거 지폐 - 위키미디어 제공

 

양자역학의 슈퍼스타 중 한 명인 슈뢰딩거는 전설적인 바람둥이였다. 알려진 애인만도 한둘이 아니다. 동료 교수의 아내를 임신시키기도 했다니, 말 다했다. 슈뢰딩거의 아내는 그의 외도를 인정하다 못해 여자를 소개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치에 반대했던 슈뢰딩거는 망명을 해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북아일랜드에 머물렀는데, 이때도 그의 여성편력은 지칠 줄 몰랐다.
 

덴마크의 보어 동전 - 위키미디어 제공
덴마크의 보어 동전 - 위키미디어 제공

1925년 크리스마스, 슈뢰딩거는 스위스의 스키 휴양지 아로사에서 외도를 즐기고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슈뢰딩거는 그녀와 지낼 때 양자역학을 기술하는 파동방정식을 완성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슈뢰딩거의 방정식’이라 부른다. 이 방정식은 파동의 연속적 변화를 기술하는 것으로, 보어가 주장하는 양자도약 따위의 어려운 개념이 필요 없는 듯 했다. 더구나 슈뢰딩거는 이 방정식이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행렬역학이 없어도 된다는 뜻이었고, 이 때문에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궁지에 몰렸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바로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였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1925년 발표된 루이 드브로이(1929년 노벨물리학상)의 이론에 기반을 뒀다. 드브로이는 프랑스의 제5대 브로이 공작인 빅토르 드브로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에펠탑의 통신센터에서 복무했는데, 이는 그가 지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드브로이는 처음에 중세사와 법학을 전공했지만, 형의 영향으로 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됐다.
 

과학동아(일러스트 김정훈) 제공
과학동아(일러스트 김정훈) 제공

 

1923년 드브로이는 전자의 파동성에 대한 논문을 파리대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다.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그의 논문은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높은 가문 출신이 제출한 논문을 퇴짜 놓기 싫었던 심사위원들은 독일에 있는 아인슈타인에게 자문을 구했다. 책임회피라고나 할까? 뜻밖에도 아인슈타인은 “드브로이의 연구는 물리학에 드리운 커다란 베일을 걷어냈다”는 의견을 보냈다. 아인슈타인의 지지 덕분에 드브로이의 논문이 빛을 보았고,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으로 이어졌다.
 

보어(왼쪽)의 주장에 대해 시큰둥한 반등을 보이는 듯한 아인슈타인(오른쪽) - 위키미디어 제공
보어(왼쪽)의 주장에 대해 시큰둥한 반등을 보이는 듯한 아인슈타인(오른쪽) - 위키미디어 제공

하이젠베르크, 보어,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드브로이. 이들은 1927년 10월 2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시작된 솔베이회의에서 격돌했다. 솔베이는 이 회의를 후원한 벨기에 기업가의 이름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파상공격이 이어졌지만, 보어는 모두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학회가 끝나갈 무렵 참석자 대부분이 보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조금도 설득되지 않았고, 보어에게 “신이 주사위 놀음이나 한다는 것을 정말 믿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물리학자 입에서 신 이야기가 나오면 게임 끝난 거다. 이렇게 여러 물리학자들의 좌충우돌 끝에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 완성됐다.
 
● 양자역학의 시작은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양자혁명이 언제 시작됐냐고 물으면 보통 막스 플랑크(1918년 노벨물리학상)의 흑체복사이론부터라고 한다. 플랑크는 ‘빛이 입자일 수도 있다’는 이론을 1900년 10월 독일물리학회에서 처음 발표했다. 이 때문에 베를린대는 2000년에 양자역학 100주년 기념식을 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혁명적인 행렬역학이 탄생한 때를 고려하면, 2025년이 100주년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이것은 괴팅겐대의 주장이다. 하이젠베르크가 1925년에 괴팅겐대에 있었고, 플랑크는 베를린대 교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왜 싸우는지 알 수 있다. 양자혁명의 횃불을 켠 사람은 분명 플랑크였지만, 그는 누구보다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간파한 기성 과학자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빛이 입자라는 사실에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독일의 플랑크 동전 - 위키미디어 제공
독일의 플랑크 동전 - 위키미디어 제공

플랑크만큼 비극적인 인생을 산 과학자도 드물다. 아내는 폐결핵으로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큰 아들 칼은 베르덩 전투에서 전사했다. 두 딸이 있었는데, 모두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마지막 남은 아들인 에르빈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반나치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플랑크는 히틀러에게 탄원을 했지만, 끝내 1945년 에르빈의 사형이 집행됐다. 플랑크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독일 과학을 재건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 과학자 대부분이 국제과학계로부터 왕따를 당한 반면, 끊임없이 나치에 저항했던 플랑크만은 예외였다. 그의 이름을 딴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이제 독일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연구소가 됐다.
 

양자역학은 뉴턴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달리 한 천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이 녹아있다. 기존의 물리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야했기에 모두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이론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진풍경이 벌이지도 했다. 물리학자들은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적으로 만나서 양자역학을 논했다. 몇십 년 동안 모두가 노력한 결과, 원자의 비밀을 알아낸 것이다. 양자역학이 태동하던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 동아사이언스에서는 부산대 물리교육과 김상욱 교수의 ‘양자역학 좀 아는 척’을 매주 월요일 연재합니다. 2014년 과학동아에 연재되었던 코너로 양자역학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김상욱 교수
KAIST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양자과학, 정보물리, 통계물리 등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영화는 좋은데 과학은 싫다고?’가있으며, 과학대중화와 관련한 여러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swkim0412@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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