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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 속에는 ‘녹색갈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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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28일 19:02 프린트하기

과학동아(일러스트 조은) 제공
과학동아(일러스트 조은) 제공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고, 산과 들에는 녹음이 완연하다. 바쁜 업무 중에 슬쩍 들어가 본 SNS에는 캠핑족과 자전거족의 즐거운 일상이 그득하다. 당장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영업팀 김 대리는 회사 옥상의 작은 정원에서 음료수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때, 문자 알림 소리가 들린다. ‘전체 직원 공지: 금주 토요일 직원 전체 산행이 있사오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갑자기 사무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한국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사례다. 일 년에 두세 번씩 전체 직원들을 몰고 산에 가자는 사장님 때문에 봄가을 주말마다 전국 각지의 산에는 젊은 직원들의 곡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디 사장님뿐이랴. 아버지뻘의 선배들이 주도하는 동문회, 40~50대 부모님, 대학원생들을 지도하는 교수님…. 하지만 정작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다.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인류에게 사바나 같이 탁 트이고 비옥한 환경을 선호하는 ‘녹색갈증’이 있다고 주장했다. - GIB 제공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인류에게 사바나 같이 탁 트이고 비옥한 환경을 선호하는 ‘녹색갈증’이 있다고 주장했다. - GIB 제공

● 유전자 속에 ‘녹색갈증’이 각인돼 있다


미국 하버드대 생물학과 교수 에드워드 윌슨은 모든 인류에게 *바이오필리아, 다시 말해 ‘녹색갈증’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진화를 거치면서 최적의 생태적 공간을 좋아하는 유전자를 갖게 됐다.

 

넓고 메마르지 않아 식물이 많고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기하학적 대칭을 이루지 않는, 아프리카의 사바나 같은 환경을 선호한다는 얘기다.

 

진화심리학자 고든 오리언스도 인간이 좋아하는 환경 조건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이 역시 녹색갈증과 관련이 있다. 첫째, 먹을 것과 경쟁자를 먼 거리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트인 장소일 것. 둘째, 절벽 끝이나 작은 언덕, 산꼭대기 등 지형적으로 두드러져 정찰이 편리할 것. 셋째, 물과 음식을 얻을 수 있는 호수와 강이 있을 것 등이다.

 

정말 우리가 선호하는 장소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김 대리가 종종 쉬러 가는 옥상정원을 생각해 보자. 칸칸이 나뉜 사무실과 달리 비교적 너른 공간에 시야를 막는 것이 없으니 첫째 조건은 만족한다.

 

게다가 고층건물의 옥상은 두 번째 조건에 해당하는 절벽 끝이나 산꼭대기와도 비슷하다. 늘 음료와 간식거리를 먹을 수 있고, 작은 분수 주변에 나무도 배치해 놓았으니 셋째 조건도 그럭저럭 만족한다.


한국의 산도 예외는 아니다. 170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등산(14%)인 것으로 나타났다(동아일보 2월 28일자). 우리나라에서 오리언스의 세 가지 요소를 가장 잘 만족시키면서도,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주변의 작은 산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산 속 계곡에서 다같이 즐기는 맛있는 한 끼 식사는 잠시나마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목마른 원시의 삶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2003년 노르웨이와 스웨덴 연구진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15분 동안 틀린 맞춤법을 찾는 과제를 수행하게 한 뒤, 실험참가자를 둘로 나눠 한 집단에는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해안과 목장 사진을 보여주고 또 다른 집단에는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번잡한 도시 사진을 보여줬다. 동시에 평소 상태, 과제를 하면서 긴장한 상태, 그리고 사진을 본 이후 상태로 나눠 맥박을 측정했다.

 

그 결과 과제를 하면서 빨라진 맥박은 사진을 보며 다시 느려졌는데, 도시보다 자연환경 사진을 본 집단에서 더 빨리 회복됐다. 심지어는 평소 상태보다 더 편안해 하는 것이 확인됐다. 아름다운 자연을 작은 모니터를 통해 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된 것이다.


심리학자 스테판 카플란은 자연이 주는 이런 효과를 ‘주의 회복 이론’이라고 명명했다. 자연 속에 있으면 마음이 안정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회복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주의력은 인지적인 정보처리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열심히 공부하거나 업무를 할 때 쓰는 주의력을 ‘목표지향적 주의력’이라고 하는데, 이 주의력은 쉽게 피로해진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짜증만 나고 도무지 능률이 오르지 않는 상태에 빠진다. 이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유유자적하는 주의상태’를 경험하는 게 더 좋다.

 

즉, 가볍게 흔들리는 나뭇잎과 하늘의 구름, 부드러운 바람처럼 목표지향적 주의력을 요하지 않는 자극이 더 쉽고 빠르게 주의력을 환기해 준다.


*바이오필리아
바이오필리아는 직역하면 ‘생명애’이지만, 정신분석가 에리히 프롬이 이미 생산적, 창조적 삶을 설명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윌슨의 바이오필리아는 녹색갈증으로 번역한다.

 

업무를 수행하면서 빨라진 맥박은 도시 사진보다 자연 사진을 본 그룹에서 더 빨리 안정됐다. 그래프는 맥박 사이의 간격을 의미한다. 즉, 막대 길이가 길수록 맥박이 느리다. - 학술지 환경심리학. 과학동아 제공
업무를 수행하면서 빨라진 맥박은 도시 사진보다 자연 사진을 본 그룹에서 더 빨리 안정됐다. 그래프는 맥박 사이의 간격을 의미한다. 즉, 막대 길이가 길수록 맥박이 느리다. - 학술지 환경심리학. 과학동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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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면서 바이오필리아 경향이 강화된다?


하지만 자연을 선호하는 정도는 나이에 따라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등산을 가장 좋아하는 취미로 선택한 비율은 남녀 모두 40대 이상에서 압도적이었다. 반면, 20대 남성 144명, 여성 131명 중 등산을 가장 좋아하는 취미로 선택한 사람은 각각 3%와 2%에 불과했다.

 

등산보다는 게임(남성)이나 음악감상(여성)을 가장 좋아하는 취미로 선택하는 경향이 강했다. 사실 이런 설문조사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주말 산행을 해본 적이 있다면 등산객의 대부분이 중년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런 경향은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보다 자연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아주 어린 사람은 자연을 좋아하기는커녕 매우 두려워하기도 한다.

 

환경교육학자 데이비드 오어는 인공적인 환경이나 기술문명에 둘러 싸여 지내는 어린이에게서 ‘바이오포비아’, 즉 자연공포증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확실히 도시에 사는 어린이는 자연 환경에 덜 노출되며,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동화는 자연에 대한 공포로 가득하다. 숲 속에는 늘 호랑이나 도깨비, 마녀가 살고 있고 어린 주인공은 종종 숲에서 길을 잃고 부모와 헤어지고는 한다.


실제로 자연은 원래 춥고 컴컴하며 포식 동물과 독초가 가득하다. 건조한 사막과 얼어붙은 대지, 무더운 밀림이 자연의 본 모습이다. 낮은 구릉에 위치한 아름다운 사바나가 자연의 전부가 아니란 얘기다. 인류가 좋아하는 자연환경, 즉 온화한 기후와 폭신한 땅, 충분한 물과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과일 같은 환경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따라서 진화 관점으로 볼 때, 어린 나이에 성급하게 위험한 자연으로 뛰어드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을 두려워하는 게 생존에 더 유리하다. 안전한 마을 안에서 사냥과 사회적 기술을 익히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수만 년을 이렇게 살아왔으니, 주말 산행에 대해 나이 많은 사장님과 젊은 김 대리의 생각이 다를 수밖에.


그렇다면 사장님은 왜 굳이 젊은 직원들을 전부 이끌고 산에 오르려는 걸까. 이는 생애사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평균적인 수렵채집 사회에서 남성은 약 20대 초반이 되면 필요한 에너지를 스스로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다. 쉽게 말해, 밥값은 한다.

 

그러나 집단생활을 하는 인류에겐 제 밥값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식량을 초과 생산해 임신 혹은 육아 중인 배우자와 어린 아이, 늙은 부모에게 전달해야 한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남성의 최대 생산능력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완성된다. 이 시기를 수습 교육 기간이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경험 많은 부족 선배는 젊은 부족원에게 수렵채집기술을 열심히 전수한다. 선배의 순수한 호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전통적인 인간사회는 남녀 간의 성적 분업뿐만 아니라, 연령에 따른 분업도 복잡하게 이뤄져 있다.

 

가능한 효과적으로 다음 세대에 생존기술을 전수하지 않으면 집단 자체의 존립이 어려워진다. 얼른 젊은 친구를 가르쳐서 훌륭한 사냥꾼으로 길러내야 내 딸과 손자, 그리고 몇 년 후의 자기 자신도 먹여 살릴 수 있다.

 

자료출처 한국갤럽 - 과학동아 제공
자료출처 한국갤럽 - 과학동아 제공

 


● 원시 족장 하고 싶은 우리 사장님


현대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직장인이라면 OJT(On-the-job Training), 즉 실무수습을 해봤을 것이다. 신입 직원이 각 부서의 현장 업무를 상사에게 직접 배우는 방식의 직무교육이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 거치는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이나, 수습변호사 과정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이런 수습 교육이 사실은 인류의 오랜 전통인 것이다.


다시 말해, 최고의 사냥기술을 가진 베테랑 사냥꾼이 수십 명의 젊은 부하를 이끌고 높은 산과 넓은 들을 누비는 모습은 수만 년 전부터 반복된 과정이다.

 

산을 좋아하는 중년의 사장님은 무의식적으로 원시 시대의 족장 역할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게다가 산에서 내려오면 보통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집단적인 여흥을 즐기고는 한다. 혹시 사냥감을 가지고 마을에 돌아와 벌이는 원시적 축제의 잔재는 아닐까.

 


박한선
성안드레아 병원 정신과에서 마음이 아픈 환자를 돌보는 한편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정신장애의 신경인류학적 원인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parkhanson@gmail.com

 


※ 더 많은 과학기사를 2015년 6월호 과학동아에서 만나보세요. <과학동아 신청하기>

 


에디터 우아영 기자 | 글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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